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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69화 (468/468)

469화. 망자 전문병동 개설 (1)

당신들이 황가의 백성이니까.

어떻게든 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이며, 그대들이 억울한 사연으로 지옥에 억류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급히 달려왔도다.”

라키엘은 진심을 담아 대답하였다.

피해 망자들의 눈시울이 작게 떨렸다.

앞서 나섰던 이보르작 촌락의 촌장이 되물어 왔다.

“……저기, 화, 황태자……전하께서 말입니까?”

“그렇다.”

“그럼 당신께서 바로…….”

“그래.”

“어찌…… 전하처럼 높으신 분께서 저희 같은 것들을 위해 직접…….”

촌장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세상 어느 황족이, 그것도 황태자가, 변두리 중의 변두리인 국경 지대 촌락의 사람들을 구하러 직접 움직인단 말인가.

다른 피해 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또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의심 서린 놀라움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용건을 밝혔다.

“내가 그대들을 데리려 여기까지 온 이유? 간단하지. 그대들을 올바르게 된 보금자리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보금자리…….”

“실은 오늘에야 그대들의 소식을 들었다. 촌락이 습격을 당하여 고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지? 심지어 그 와중에 이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겠고. 지나가는 건 피부가 시뻘건 이들뿐이고, 물어본들 여기가 지옥이라는 무서운 소리나 해대고.”

“그, 그랬습니다.”

“무서웠을 거야. 두려웠겠지. 하여 미안하다. 내가 그대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너무나 늦게 들어서. 이제야 겨우 그대들을 데리러 오게 되어서.”

절반의 진심과 나머지 절반의 거짓말을 섞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진심이었다. 다만,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괜히 지금 당신들이 죽은 상태이고, 여긴 지옥이라는 말을 해봐야 망자들의 반발심만 사게 될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이들은 아직 자신들이 죽은 줄을 몰라. 여긴 지옥이 아니고, 자신들은 그저 고향을 잃고서 이상한 곳에서 방황하고 있노라 여기고 있지. 심지어 지옥왕이 직접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줬음에도 이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 실감을 못 해서. 자신이 죽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서.’

한데 아무리 이들을 설득한들 씨알이 먹힐까.

아니.

오히려 믿음만 잃게 될 것이다.

하니 지옥왕의 말대로 치료를 해야 한다. 이들을 진료하고, 저마다 지닌 지병이나 아픈 곳들을 고쳐주면 된다. 하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일 것이다.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저 멀끔한 도련님은 대체 누굴까. 스스로가 주장하는 것처럼 황태자가 맞기는 할까. 의심이 들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다. 내가 황태자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그대들을 이런 지옥 같은 곳으로부터 빠져나가게 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인데. 그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

망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 다들 긴가민가하던 처지였다. 그렇잖아도 혼란스럽던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귀공자를 믿어야 하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뜻 의심을 풀기가 어렵기도 하던 터였다.

한데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단다. 이런 지옥처럼 끔찍한 곳에서 빼내어 준단다. 일단 그것만이라도 되면 좋을 것 같았다.

“하면,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촌장이 물었다.

라키엘이 말했다.

“간단하다. 옆 사람을 챙겨라. 빠지는 인원이 없도록 손을 잡고, 부축을 하고, 줄을 서라. 그리고 나를 따라오면 될 것이다.”

라키엘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망자들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가족의 손을 잡고, 다친 이를 부축하였다. 줄을 섰다. 라키엘을 따라 줄지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비서 사탄이 눈짓을 보내어 왔다.

“헬게이트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비서 사탄을 따라갔다.

망자들이 뒤를 따라왔다.

그들이 머물던 광장을 벗어나 얼마쯤 움직였을까. 마침내 도착한 곳은 지옥왕성의 안뜰이었다. 그곳에서 지옥왕 하비엘이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자발적으로 그대를 따라오게 한 것인가.”

“예, 지옥왕이시여.”

“좋군.”

지옥왕 하비엘의 입가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흡족했다. 이 인간을 볼수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건강과 수명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묘하게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라니. 볼수록 먼 과거의 주인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를 지닌 인간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은 거기까지.

지옥왕 하비엘은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헬게이트의 개방 준비가 끝났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혹시 그대는 헬게이트가 열리기를 원하는 특정한 장소가 있는가?”

“어, 그런 것까지 지정이 가능합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으음…… 그러면…….”

라키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였다.

“별궁 정문으로 지정할까 합니다.”

“정문으로?”

“예, 지옥왕이시여.”

라키엘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왕 하비엘이 묘한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별궁이라면 그대가 인간계에서 머무는 궁전일 텐데. 그곳의 정문에 열리는 헬게이트라. 괜찮겠나?”

“예, 괜찮을 겁니다.”

“어째서?”

“어차피 이건 숨기거나 어설프게 둘러대는 걸로 무마할 스케일의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라키엘이 수천에 달하는 망자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실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려 수천, 보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숫자를 세자면 무려 6,600명에 달하는 규모의 망자들이었다.

이런 대규모의 망자로 별궁 한의원이 북적이게 될 텐데, 그게 가려진다고 가려질까. 숨긴다고 숨겨질까.

아니.

절대로.

“애초에 숨기지 못할 일이라면, 그냥 대놓고 드러내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가.”

“예, 지옥왕이시여. 그래서 미리 여쭙는 건데…… 저들을 별궁으로 데려가게 되는 지옥의 사연을 인간계에서 밝혀도 별 탈이 없겠지요?”

“당연하지.”

지옥왕 하비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은 인간계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 모든 망자들의 환생과 그에 관련된 행정 처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기관일 뿐. 그걸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난과 억측도 상관없을 터.”

“그렇습니까.”

“그렇지. 하니 잠시 물러서도록.”

지옥왕 하비엘이 눈짓했다. 라키엘이 눈치껏 샤샥 두 걸음 물러나는 사이, 지옥왕이 한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튕기는 순간, 지옥왕이 가리킨 지점에 지름 5미터가량의 시커먼 원형 통로가 생성되었다.

……콰아아아아!

비주얼로만 보면 13만 RPM으로 돌아가는 초강력 원심분리기 블랙홀 같은 모습! 시커먼 통로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일렁거렸다. 그 둘레를 따라 시뻘건 기류가 3단 풀파워 선풍기처럼 휘몰아쳤다.

“자, 그대가 원한 대로 별궁 한의원의 정문으로 게이트를 연결했다. 이제 넘어가도록.”

지옥왕이 말했다.

라키엘이 떠듬떠듬 물었다.

“저거…… 들어가도 괜찮은 거겠지요?”

“괜찮다.”

“혹시 들어가자마자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순서대로 막 온몸이 인수분해 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다.”

“혹시…… 저한테 따로 감정이 있으신 것도 아니시겠지요?”

“그것 또한 아니다. 그대는 내가 미덥지 않은 것인가?”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제가 여기로 건너올 때 이용했던 헬게이트와 모습이 좀 많이 달라서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지옥왕 하비엘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임시 게이트였고, 이번 것은 지옥과 인간계를 장시간 연결하는 타입의 게이트니까. 목적과 성능이 다르니 모습 또한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아하.”

“그럼 얼른 건너가도록. 나는 바쁘다.”

“아, 옙. 그럼…….”

“약속한 성공 보수는 잊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일에 매진하도록.”

“……감사합니다!”

라키엘은 넙죽 인사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게이트를 넘어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아, 잠깐.”

지옥왕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쪽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이쪽의 곁에 있던 데미안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가리켰다.

“그 인형은 잠시 여기에 두고 갈 수 있겠나?”

“……예?”

“그대의 호위 말이다.”

“데미안을 말입니까?”

“그래.”

“…….”

대체 무슨 용건인 걸까.

라키엘은 혹시나 하는 경계심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 이 친구가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서 섭리에 어긋나고 어쩌고, 뭐, 그런 이유 때문이신 건 아니겠지요?”

“아니다.”

“하면…….”

“조금 확인할 것이 있어서.”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 인형이 속에 담고 있는 존재.”

“…….”

역시.

마계왕에 대해 알고 있구나.

라키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이 친구를 조금 분해해본다거나, 좀 이리저리 두드려본다거나, 혹은 뜨거운 물 같은 걸로 한 번쯤 삶아본다거나, 뭐 그러시려는 건…….”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다만-”

“다만요?”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군.”

“프리토킹이요?”

“검으로.”

“아.”

“확인 겸 훈련을 시켜주겠다는 뜻이다. 내면의 존재에 대항할 힘, 필요하지 않겠는가.”

“……당장 데려가주세요!”

지옥왕의 뜻을 깨닫자마자 라키엘이 빼액 외쳤다. 무려 지옥왕의 특강, 특별 과외란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니. 이걸 거절하거나 놓치면 세기의 등신이다.

라키엘은 데미안의 등을 떠밀었다.

“굴리든 때리든 잡숫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하?”

“얘가 보기보단 막 굴려도 튼튼한 편입니다?”

“저기, 전하?”

“응 지옥 해외연수 결정. 땅땅땅. 이거 아무나 잡는 기회 아니야. 그러니까 잘해라? 알았지?”

“…….”

“화이팅?”

“…….”

이 인간, 이럴 때마다 한 대만 살포시 때려보고 싶어진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용솟음치는 내적 충동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옥왕의 앞에 섰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상대가 지옥왕이라고 해서 대충 하진 않을 겁니다.”

“대충 하지 말아야지.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까.”

“마음껏 해보시지요.”

“그럴 생각이다.”

……데미안과 지옥왕 하비엘. 어째서 둘 사이에 서늘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일까. 모르겠다. 상관하지 말자.

‘뭐, 지지든 볶든 둘이서 알아서 하겠지.’

데미안이 좀 험난하게 구르긴 할 것이다. 그래도 상대가 지옥왕이니 오히려 믿고 맡길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키엘은 걸음을 돌렸다. 광포한 기세로 회전하는 헬게이트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보르작 촌장을 비롯한 망자들에게 손짓을 하면서였다.

“다들, 날 따라오도록.”

……울렁!

헬게이트를 넘는 건 순식간이었다. 투명한 막을 넘어가며 약간의 멀미 비슷한 느낌이 왔다. 그걸로 끝. 이내 게이트 너머의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웅장한 별궁 정문의 광경이었다. 그곳에 익숙한 이들의 얼굴 또한 보였다.

“……저, 전하께서 나오셨다!”

별궁 근위대장 프란델 경이 빼액 외쳤다. 그는 검과 방패를 포함한 전투장비 풀세트와 함께 삼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곁의 근위대원들도, 특근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 너머에는 추가로 몰려오는 황도 방위군의 병력도 보였다.

“하하, 하하하…….”

라키엘은 그걸 보자마자 허허 웃어 버렸다. 헬게이트 때문이겠지. 별궁 정문 앞에 떡하니 열려 버린 이 의문의 통로 때문에 다들 들쑤신 벌집 속의 꿀벌들처럼 난리가 나 있는 거겠지.

“쓰읍. 그런데 이걸 어쩌나.”

라키엘은 뒤쪽의 헬게이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보르작 촌장을 필두로 우르르 넘어오기 시작하는 망자들의 물결!

“……전하를 뒤따라 유령 군단이 침공했다!”

빼액 드높아지는 프란델 경의 비장한 외침.

라키엘의 입가에 더욱 짙은 쓴웃음이 내걸렸다. 이제는 슬슬 오해를 풀어야겠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프란델 경을 향해 말했다. 티없이. 해맑게. 상냥하고 온화하게. 그리하여 그 누구라도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멘트를. 투명한 진실을. 사실 그대로. 차곡차곡. 야물딱지게.

“어. 유령처럼 흉흉한 건 아니고. 지옥에서 온 분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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