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 유어 페이스-9화 (9/250)

< 9 : 4화. 사소한 행복(2) >

10월 26일 월요일.

우리 중학 복싱부는 현장 실기라는 명목 하에 학교 수업을 빠지고 고등학교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상대가 도착해 있었다.

서울체고와 서울체중의 복싱 선수들이다.

이사장의 비서 임병식이 내 시합 하나만 하기는 아쉽다고 판단했는지 아예 학교끼리의 교류전을 기획한 것이다.

그로 인해 체육관은 선수들로 가득했다.

"와, 씨. 시설 뭐냐."

"괜히 부자 학교 소리 듣는 게 아니네."

서울체고 선수들은 체육관 시설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해 은근한 적의를 드러냈다.

이런 신경전은 중학생들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쟤들은 좋겠구만. 성적이 안 나와도 밀어주니까."

"초등학교 때 잠깐 잘한 걸로 나대기는 오지게 나대요."

대놓고 앞담을 까는 상대.

중등부 주장인 형석이는 이를 갈며 후배들에게 고한다.

"오늘 지면 토끼뜀으로 집에 가는 거다. 무조건 이겨. 알겠지!"

이런 마음가짐은 고교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양측의 코치들은 팔뚝에 핏대를 세우며 악수를 주고받는다.

"오래간만입니다. 표명호 코치님, 김현수 코치님. 대회장이 아니라 체육관에서 만나기는 또 처음이네요."

"예, 오늘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로 절차탁마 했으면 좋겠군요."

대화는 그걸로 끝. 서로는 엔트리 용지를 받아 들고선 선수들에게 돌아왔다.

김 코치님은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미리 말했듯이 오늘은 스파링이 아니라 시합이다. 공식 경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 거다."

한국 복싱계는 좁다. 같은 학년으로 한정하면 더더욱.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선수들은 대회에서도 만나게 될 선수들. 기 싸움에서 밀렸다간 실제 대회에서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비공식 경기라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우선…. 형석이. 네가 선봉으로 가자."

"옛! 맡겨주십시오!"

"다음 호진이이랑 수호. 준영이까지. 이렇게 넷이야. 1학년들 경기는 내일이니까 오늘은 응원이나 열심히 해라."

그때 형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슬쩍 손바닥을 든다.

"성현이는 경기 없나요? 요즘 얘랑 스파링 해보니까 폼이 장난 아니던데요."

"성현이도 경기 할 거야. 근데 좀 사정이 있어서 상대 고교 선수랑 하기로 했어."

"헉."

"아무튼 준비해라. 한 경기도 져선 안 된다!"

"옛!"

양측은 무려 1시간가량이나 몸을 푼 다음 경기에 들어갔다.

경기는 중등부가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선봉으로 나선 형석이는 고개를 까딱하며 상대를 턱짓했다.

그 모습에선 왕자의 관록이 느껴졌다.

형석이가 이래보여도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초등대회를 싹쓸이하며 길성 중학교에 스카웃 된 이래, 중학 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중등부 웰터급 1위에 올라있었다.

그런 형석이의 상대는 웰터급 2위 김현. 둘은 라이벌 관계에 있었으나 언제나 이기는 건 형석이었다.

"풉! 오늘 또 1패를 추가하겠네?"

"…."

"아까는 잘도 지껄였겠다? 여기가 왜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지 몸으로 알려줄 테니까 기대해."

이 트래시 토크에 상대 고교 선수들이 표정을 구겼다. 반면 우리 고교 선수들은 잘 한다며 환호한다.

"거, 입 다물고 해라! 아가리로 시합하는 거 아니잖냐!"

상대 코치가 주의를 주자 형석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심판역의 코치가 둘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

덜컹! 하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최종훈 이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측근인 임 비서. 그리고 안경 쓴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어딘가에 교수님 같은 이지적인 인상이다.

최종훈은 그 남자를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우리 길성 고교가 자랑하는 복싱부죠."

"예…. 듣던 대로입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구닥다리 체육관의 모습과는 궤를 달리하는군요. 미래를 위한 이사장님의 열정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훗, 그야 당연하죠."

최종훈의 태도를 보면 안경 남자도 꽤나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최종훈이 이곳을 찾은 이유가 내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임을 감안하면 나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흠!"

내게 시선이 닿자 안경의 남자는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설마.'

내게 이런 적개심을 가질만한 중년 남자라고 하면 하나밖에 떠오르질 않았기에 그 정체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김 코치, 이성현 학생. 잠깐 이리로 와 봐요. 아, 다른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세요."

우리 둘을 호출한 최종훈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한다.

"김 코치님. 이성현 학생의 경기는 언제 시작됩니까?"

"임 비서님이 가장 마지막에 진행하라고 해서 마지막 경기에 배치해놨습니다."

"시간적으론 얼마나 걸리죠?"

"길면 2시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 됐네요. 이성현 학생. 이분이 학생과 긴밀히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말이에요.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죠?"

내게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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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자는 임 비서의 안내에 따라 고교 본관에 있는 한 방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오고가는 이야기는 없었다.

방은 무척 적막했다. 외부 소음을 막는 설계를 한 건지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럼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십시오."

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던 남자는 임 비서가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는 건 한 달 만인가. 주은이와 함께 나타나서 책임을 지겠다는 둥의 얘기를 지껄였던 게 그쯤인 것 같군."

역시나. 이 남자가 바로 주은이의 아버지 정명훈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가 나오고 마는군."

설마 그의 입에서 사과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어리둥절했다.

"지금 이 대화가 오늘 경기 내용에 지장을 준다고 하면 그것도 미리 미안하다고 하고 싶군. 그래도 꼭 지금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어. 경기가 끝난 뒤에 말하면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거든."

"…신경 쓰지 마시고 뭐든 말씀하십시오."

"후우! 잠깐, 잠깐만…. 막상 네 얼굴을 보니 울화통이 치밀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군.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니까."

그는 내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주은이와 싸우면서 여러모로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내가 왜 딸과 싸우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말이야. 잘 생각해보니 주은이가 잘못한 건 아기를 낳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외에는 없었거든. 근데 그건 잘못된 걸까? 여성이 자기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하는 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않나?"

"…."

내게 대답할 권리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맞아, 잘못한 건 주은이가 아니고 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애에 대해선 화도 나지 않더라고. 애기를 낳고 싶으면 낳으면 되는 거야. 자기 애를 낳겠다는데 뭐? 그래서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소리 지르며 싸우는 것도 서로에게 상처만 되고 말이야. 그렇지만 넌 아니다."

그는 여과 없는 분노를 드러냈다.

"네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어. 그걸 애써 좋게 볼 생각도 없다."

"때리시던 욕을 하시던 모두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그런데 네가 강에 뛰어들었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아차 싶더군."

근본적으론 선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저 아버지의 분노라는 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는 거다.

"처음엔 한심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됐어. 내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네가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널 좋게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죽어버리길 바라는 건 아니었어. 그때 내 폭언이 큰 상처가 됐다면 사과하마. 정말 미안하다."

머리를 깊이 숙이는 명훈.

"고개 드십시오."

"아니, 사과할 건 해야지. 그래야 다음 이야기가 진행이 될 테니까."

본론은 이제부터인 것 같았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이 되었다.

"주은이에게 들었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돼서 내게 인정받겠다고?"

"…예. 그럴 생각입니다."

"눈빛을 보니 각오가 상당한 것 같군. 심지어 그걸 행동으로 옮기려 하고 있고 말이야. 오늘 직접 온 것도 최종훈 이사장님에게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런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으니 길성고에 입학시켜달라고 했다던데?"

"사실입니다. 그 시험이 오늘 경기입니다."

"오늘이 첫 발걸음을 내딛는 날이라 그건가."

"그렇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안 된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나는 그런 이유로 널 인정할 생각이 없다. 설령 올림픽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아."

"그렇담 어떻게 하면 인정을 해주실 겁니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거니까. 사랑은 특히 더 그렇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나? 정이란 것도 결국엔 떨어지기 마련이야. 주은이도 머지않아 너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어지겠지. 그때가 되면 서로 좋게 헤어지면 되는 거야. 그러면 네가 나한테 인정받을 필요도 없어지는 거지."

지당한 말이었다.

"네가 정말 내게 인정받고 싶은 거라면 주은이가 네게서 정을 떼지 않게끔 노력해라. 그렇게 10년이고 사랑을 이어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는 방향이 잘못됐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다면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는 게 아니라 딸의 사소한 행복을 지켜주라는 거다.

"네가 주은이와 만나고 다니는 걸 더는 막지 않겠다. 다만 주은이가 싫어하는 데도 네가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건 절대 용서 못해. 그 경우 힘을 써서라도 막을 거다.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나도 그녀가 싫다고 하면 깔끔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명훈의 타협안은 내게도 딱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부분은 융통성 있게 헤쳐 나가야지. 일단은 작년에 결혼을 한 첫째 녀석의 호적에 올릴 거다. 키우는 건 우리 집에서 키울 거고. 그러다가 네가 만에 하나의 경우 주은이와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때 정정을 해서 네 호적에 넣어주지. 틈틈이 아기 얼굴을 보러 오는 건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내가 집에 있을 땐 오진 말아라. 골프채를 들고 쫓아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는 속이 후련한지 피식 웃는다.

"그리고…. 가정환경이 좀 어렵다지? 뭣하면 금전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다."

"괜찮습니다. 제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음, 당연히 그래야지. 여기서 도와달라고 했으면 뺨이라도 한 대 때릴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나도 어렸을 적엔 찢어지게 가난했었어. 그럼에도 극복해나갔지. 그러니 널 동정할 생각은 없다. 불우하다고 무시할 생각도 없고."

그는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다."

"경기는 보고 가시지 않는 겁니까?"

"말했잖아. 널 인정하고 말고에 운동선수로서의 성공은 필요 없다고. 그래서 굳이 경기 전에 얘기를 하고자 한 거다."

만약 내가 경기를 이긴 뒤에 이런 말을 했다면 말마따나 의미가 퇴색됐을지도 모른다. 결과가 나오기 전이니 만큼 그의 말이 더 와 닿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건은 이사장님에게 잘 말해놓을 테니 부담 없이 경기해라."

그는 임 비서에게 전언을 전달하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배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그를 억지로나마 주차장까지 배웅한 뒤에 그제야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렸네. 고등학교 건도 걱정이 없어졌으니 말마따나 부담 없이 경기해도 되겠어.'

그러나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곧 박살이 났다.

1시간 30분여 만에 돌아온 체육관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상대는 축제 분위기인 반면 우리 측은 초상이라도 난 듯 축 쳐져 있었다.

최종훈 이사장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고, 코치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그 눈치를 보고 있다.

내가 돌아온 걸 보자 최종훈은 이리로 오라며 손짓한다.

"조금 전에 임 비서에게 들었다. 얘기가 잘 풀린 것 같던데?"

"다행히도 그렇게 됐습니다."

"잘 됐네. 근데…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 거 알지?"

"예…?"

그는 냉혹하게 못을 박았다.

"이기지 못하면 우리 고등학교엔 못 온다. 그런 약속이었잖아. 그세 잊어버렸냐."

"그건…."

"물론 정명훈이가 그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고 했다만, 그래서 뭐? 학교의 이사장은 나다. 그리고 넌 이미 나와 약속을 했지. 정명훈 그 작자가 뭐라고 하던 그건 달라지지 않아. 내가 일개 기업의 대표이사 따위한테 휘둘릴 위치에 있는 것 같냐?"

그것도 그랬다. 최종훈은 딱히 정명훈의 입김에 휘둘린 적이 없었다.

주은이 아버지가 날 당장 퇴학시키라고 했을 때도 대충 다른 학교로 보내는 걸로 결정을 지어버렸고, 심지어 그것마저 이 경기를 조건으로 무마를 시켜준다 약속했다.

그건 즉, 애초에 그는 정명훈의 입김 같은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다.

"…자, 슬슬 네 차례다. 준비해라."

여긴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건가.

이기면 길성 고등학교 입학과 장학금. 지면 다른 고등학교를 알아봐야 한다.

상대는 고교 헤비급 1위의 난적으로 객관적인 내 승률은 10%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인지 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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