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 6화. 손끝 감각(2) >
주은은 들뜬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평일 정오의 데이트라고 하니 일탈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농구 코트에서 보자고 한 거지?'
그 부분을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농구 코트가 찾기 쉬워서 그랬겠거니 싶었다.
그녀는 곧 인파가 모인 농구 코트를 찾을 수 있었다.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라 지레짐작한 그녀는 시선으로 성현을 찾았다. 성현은 키가 큰 편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없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오빠가 말한 농구 코트가 여기가 아닌 걸지도 모르겠네.'
근처 계단에 앉아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보려 한 그녀는 그제야 성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경기장이었다.
퉁, 탕! 간결한 크로스 오버 드리블 이후 수비수의 옆으로 돌파해 들어간 성현은 섬전같은 속도로 골밑을 노렸다.
그 효율적인 움직임을 고작 동아리 학생들이 따라갈 수는 없었다.
성현은 가볍게 레이업을 올려놓고는 백코트를 했다.
관중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친, 움직임 봤냐?"
"개빠르네 진짜. 저거 선출이라며?"
"근데 선출치곤 너무 어려보이는 거 아니야? 선출이 아니라 현역이겠지."
"프로지망생인가? 그럼 싹이 보이네 진짜. 프로에서도 덩크 저렇게 찍는 국내 선수는 거의 없잖아?"
"프로는 또 다르겠지."
"어쨌든 대박 잘한다."
성현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동아리 학생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고는 해도 일반인 기준으론 상당히 잘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가지고 놀다시피 상대를 했다.
급기야는 상대를 배려해 패스 위주로 풀어가며 보조에 집중한다.
"아…."
주은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성현이 운동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코치에게 혼날 것을 우려한 성현이 주은을 체육관에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훔쳐보고 싶어도 복싱 체육관은 실내에 있는지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성현이 제대로 운동하는 걸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단해…."
압도적인 박력에 주은은 위압이 돼있었으나 그것이 선망과 호의로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 누구 남친이야?"
"몰라, 나도 처음 봐. 알고 싶으면 유라한테 물어봐. 지금 걔 남친이 같이 경기하고 있으니까 알지도 모르지."
"근데 비율 장난 아니다. 우리 학교 학생은 맞는 거지? 그것도 몰라?"
"모른다고!"
주은은 움찔하며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운전기사가 다가온다.
"주은아! 너 지갑 놓고 갔다."
"아, 고마워요 아저씨."
운전기사는 외투를 차에 놓고 왔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쟤들은 이 추운 날에 잘도 뛰댕기는구만. 역시 젊은 게 좋아."
그 또한 경기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 주역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저 친구가 잘하네. 키야! 얼굴도 잘생겼고, 여자애들이 가만 놔두질 않겠어."
"무, 무슨 소리에요 아저씨!"
"응? 내가 뭐 잘못 말했니?"
"방금 여자애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야 대학생활이란 그런 거니까. 그리고 원래 운동 잘하는 애들이 인기가 많거든. 내가 학창 시절엔 야구를 했는데 말이야? 내 선배 중에 엄청 날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일주일마다 다른 여자를 만나더라."
"…."
"어이쿠, 너한테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네. 아무튼 지갑 잘 챙겨라. 집에 갈 시간에 불러줘, 근처에서 당구나 치고 있을 테니까."
주은은 입 꼬리를 삐죽하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이때부턴 성현의 활약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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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짜리 경기가 끝이 나고.
함께 했던 선수들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어휴, 진짜 엄청나시네요."
"뭘요. 다들 잘하시던 걸요."
"그게 선출… 이신 거죠?"
"비슷한 겁니다."
"역시나! 아직 어려 보이시는데, 혹시 프로 진출도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헛짚은 거긴 했으나 결국엔 다 맞는 말이었다.
"예, 기회가 된다면 해보려고 합니다."
"우와, 나중에 응원하겠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이성현 선수군요. 하하, 나중에 프로가 되면 꼭 응원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팬 서비스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프로로 뛰던 시절엔 가끔씩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방문해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나 따위가 무슨 재능기부냐며 자조했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혹시 나중에도 몸을 풀러 오실 거면 연락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더 잘하는 친구들을 불러보겠습니다."
"아…. 예, 그러죠 뭐."
그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내 번호를 저장했다.
나는 번호를 알려주며 겸사겸사 샤워실 사용을 문의했다.
"물론 사용하셔도 됩니다. 번호키는 별표 누르고 3433샵버튼입니다. 마음껏 사용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경기를 한 동아리 사람들과는 담백하게 헤어졌으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가 프로를 지망한다는 게 와전이 돼서 현역 프로라는 둥의 뜬소문이 흐른 것이다.
현역 프로라고 하니 사인을 받아보겠다며 달라붙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력을 가진 건 기본적으로 여성들이었다.
"사인해주세요!"
"아니, 그러니까 저는 프로가 아니고요."
나는 힘겹게 오해를 풀며 주은이를 찾았다.
"아, 주은아!"
주은이는 뚱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있었다.
"미안한데 샤워만 잠깐 하고 와도 될까? 옷이 다 젖어버렸네."
"…하고 오세요."
"응?"
왜 존댓말을 하나 싶었다. 그녀가 존댓말을 하는 건 화가 났을 때뿐이었으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샤워를 하며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봤다.
'불러놓고 농구나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몰라. 근데 오고 싶다고 한건 자기인데? 내가 부른 건 아니잖아.'
역시 여자의 심리는 모르겠다.
그러니 일단 사과부터 해놓기로 했다.
"미안해, 불러놓고 농구나 하고 있으니 지루했지?"
"그런 거 아냐."
"…."
그럼 화난 이유가 뭔데? 라고 물어보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에 이어질 회화가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했다. 주은이는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했다.
"그래서 선영이도 학원에 다니게 됐어. 나 참, 학원에 다니게 된다니까 기뻐서 펄쩍 뛰더라. 보통은 싫다고 난리 쳐야 되는 게 정상인데 말이야."
"응, 잘 됐네."
"저기….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도 돼."
"…."
주은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떠보듯이 말한다.
"…오빠는 대학에 갈 거야?"
"대학?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져서. 오늘 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기도 했고."
"대학은 아마 안 갈 것 같은데?"
복싱을 하던 농구를 하던 대학은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복싱은 대학 팀보단 실업팀이 더 효율적이었고, 농구도 배울 거라면 미국에서 할 생각이었으니까.
"정말!? 대학 안 갈 거야?"
"그래, 등록금도 비싸고, 시간도 아깝고."
"응, 응! 그렇지, 대학은 굳이 갈 필요 없긴 하지! 그리고 오빠 그거 알아? 우리 길성 고등학교는 남녀 분반이래! 고3까지 쭉!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반에 들어가기만 해도 선생님한테 혼난다나 뭐라나? 심지어 독서실에서도 나란히 앉으면 안 된다더라!"
"그런 것 같더라고. 진학에 진심인 곳이니까. 연애에도 민감한 거지 뭐."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는 중학생 때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니까?"
왜인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주은이.
그녀가 고등학교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고 판단한 나는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거 체육계는 예외인 거 알아?"
"…어?"
"체육계는 남자애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고, 여자애랑 남자애랑 같은 운동을 하는 경우도 많거든. 그리고 남자애들만 한 반에 놓으면 애들이 땀이 나도 도무지 씻고 다니질 않아서 여자애들도 일부 포함시키나봐. 그래서 체육계는 분반이 아니야."
"그렇…구나."
"그래서 여자 배구부 애들이 같은 반이 되기라도 하면 남자애들이 잘 보이려고 난리를 피우나봐."
"…."
돌연 싸늘해지는 분위기.
주은이는 애꿎은 파스타를 포크로 굴리며 언짢음을 표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여간 여자의 기분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해답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그 기분을 확실히 풀어줄 수 있는 필살기를 꺼내기로 했다.
"있잖아, 사실 지난 경기날에 아버님을 만났어."
"뭐? 우리 아빠를!? 아빠가 또 이상한 소리 했구나! 내가 진짜…!"
"그런 게 아니야. 침착하게 들어."
그날의 일을 설명하자 주은이는 감동을 받았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아빠가…."
"그러니까 아버님에게 모질게 말하거나 하지 마. 되도록 잘해드려. 오늘 집에 가서 선물을 드려도 되고."
"흑! 응, 그럴게."
효과는 탁월했다.
주은이는 어느새 화내던 것도 잊었는지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앞으로의 이야기라는 게 약혼이라던가 육아라던가 하는 무거운 이야기였기에 조금 부담이 됐지만 일단 기분이 풀렸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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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지나가며 중학생활도 끝을 고했다.
이미 고등학교 입학을 확정지은 나는 일찌감치 고교 복싱부로 옮겨가 훈련을 진행했다.
길성고교 복싱부는 라이트급 1위였던 김민종을 비롯해 여러 실력자들이 대학으로 진학하며 전력의 공백이 생긴 상태였다.
이제 막 3학년이 된 4명의 선수가 다 별 볼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서울체고와의 교류전에서도 2학년들은 전패를 당하며 체면을 구겼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교 헤비급 1위를 잡은 내가 입학했으니 표명호 코치가 내게 집중을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쉽다! 정말 아쉬워!"
표 코치는 내 훈련을 지도하며 연신 그런 말을 내뱉었다.
"성현이 네가 지금 고3이었다면 올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는데 말이다."
복싱은 만 18세라는 공식적인 출전 제한이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만 18세가 되기 전까진 성인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목표를 런던 올림픽으로 잡은 것이기도 하다. 내 생일이 3월이니 런던 올림픽 시점엔 만 18세가 되는 것이다.
"혹시나 규정 변경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표 코치가 그렇게나 원하던 규정변경은 있었다.
"명호 형님! 이거 보셨습니까!"
중등부의 김 코치님이 체육관 문을 젖히며 들어왔다.
그 손엔 공문서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런던 올림픽 규정이 바뀌었어요!"
런던 올림픽 규정이 바뀌었다는 말에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나이 제한이 만 19세로 올라갔다던가 하면 난 출전할 수 없게 되는 거니까.
다행히 그런 일은 아니었다.
아니긴 했으나 내게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긴 했다.
"이번 올림픽부터 헤드기어를 사용하지 않겠답니다! 이탓에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 조직위에서도 헤드기어를 벗는 걸 고려하기로 한 상태에요!"
"뭐!? 그게 뭔 개소리야?"
내용은 간단했다.
런던 올림픽 진행위원회가 최근에 발표된 헤드기어에 대한 과학적인 논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헤드기어는 펀치의 데미지를 줄이는 효과가 있긴 하나 충격을 골고루 분산시켜 오히려 뇌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경기에 영향이 있겠는데?"
"그러게요. 헤드기어가 펀치 드렁크를 유발한다느니 뭐니는 둘째 쳐도 다운을 막는 효과는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그거지만 체급에 따라 편차가 커지겠지. 경량급 애들은 딱히 문제없을 수도 있어. 오히려 답답한 헤드기어를 벗는다고 좋아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중량급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코치.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중량급에서 무시무시한 펀치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