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9화. 런던을 향한 여정(2) >
꽃이 피었던 것도 모를 정도로 바빴던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어 우리 복싱부는 바쁘게 랭킹을 올리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하려면 압도적인 성적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발전의 기준은 아마추어 대회에서 쌓은 점수인데, 고교생은 이 점수를 따기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우리는 복싱 협회 규정상 아마추어 대회 엘리트 부분을 나가지 못한다.
주니어의 다음 레벨인 유스 부분에서 대회를 뛰고 있었다.
당연히 대회에 따른 점수는 엘리트 부가 더 높으니 우리가 점수로서 성인들과 대결하려면 유스급 대회는 싹쓸이를 해야만 했다.
그런 만큼 형석이와 찬진이, 윤호는 열리는 대회마다 참석을 하며 전국을 전전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꽤 여유로웠다.
헤비급은 다른 체급에 비해 선수풀이 얕기 때문이다.
"성현아, 지난 대회 우승으로 선발전 커트라인에 들어갔다. 이젠 차분하게 관리하기만 하면 돼. 이번에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는 굳이 안 나가도 되는데, 어쩔래?"
"그 대회가 언제였죠?"
"8월 7일부터 8월 8일까지다."
"아…. 그러면 빼주세요. 제가 그 시기에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주은이의 출산 날짜가 8월 6일에서 8월 9일정도로 잡힌 것이다.
김현수 코치는 입맛을 다시더니 내게 속삭인다.
"찬진이랑 윤호가 조금 불만이 있는 것 같더라. 성현이 너만 특혜를 받아 훈련을 많이 빠진다면서."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전부 제가 치르는 거예요. 걔들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형석이 말마따나 그 정도로 흔들린다면 그냥 그 정도의 멘탈이라는 거예요. 저에 대한 건 핑계일 뿐이죠."
"그렇긴 하다만…. 단체 생활이라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 뭐, 성현이 네가 물을 흐린다는 건 아니고."
"코치님들이 제 편의를 봐주시고 계신 건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김 코치님은 작심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게 묻는다.
"성현이 넌 복싱이 재미가 없니?"
"…예?"
"요즘 찬진이랑 윤호가 들어오고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애들이 복싱을 재미없어하고 있구나, 복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형석이 한 명밖에 없구나 하고."
코치님은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말하더니 나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갔다.
"네 말이 맞다. 찬진이랑 윤호는 높이 올라갈 깜냥이 안 돼. 복싱을 사랑하지 않거든. 그냥 잘 하는 게 그거니까. 그걸로 올림픽에 나가고, 성공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야. 그러니 성현이 네가 추가 훈련을 하지 않아서 배가 아픈 거고. 왜냐면 자기들도 내심으론 놀고 싶거든. 걔네 둘은 툭 까놓고 말하면 재능이란 놈이 억지로 복싱을 시키고 있는 거다."
"코치님, 저는…."
"그래, 너는 조금 달라. 복싱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훈련에선 누구보다 의욕이 높고 진지하니까. 마치 프로처럼."
코치님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나는 복싱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프로페셔널하게 배우고 있을 뿐이다.
김 코치님이 뭘 말하고 싶은 지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복싱에 애정이 있었다면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추가 훈련을 했을 테다. 실제로 전생에서 농구를 배울 때는 밤을 새가며 슈팅 연습을 한 적도 있다. 그야 농구를 하는 게 좋고, 즐거웠으니까.
"성현아, 네 재능은 분명히 훌륭해. 믿을 수 없을 정도지. 지금 그 마음가짐으로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만 해선 언젠간 큰 코를 다칠 거야. 그도 그럴게…."
김 코치님의 말은 내 가슴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왔다.
"너와 대등한 재능을 가진 녀석이 나타난다면, 그 녀석이 복싱을 사랑하고 즐기는 녀석이라면. 넌 그놈을 이기지 못할 테니까."
"…."
"그걸 꼭 말해주고 싶었다. …시간을 뺏은 것 같네. 어서 가봐."
내 어깨를 두드리곤 떠나가는 코치님.
'즐기는 자인가….'
그런 말이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이건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그야 즐길 수 있으면 남보다 효율적이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력치와 재능치가 같으면 즐기는 쪽이 우세한 건 당연한 거다.
코치님이 말하는 건 이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복싱을 사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부디 재능도 있고 복싱도 사랑하는 괴물같은 녀석을 만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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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이의 출산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매일같이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출산 예정일인 8월 6일부터는 여름휴가를 내고 PT도 쉬고 있었다.
"아, 오빠."
주은이는 지친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있었다.
그녀를 간호하고 있던 어머니 홍영숙은 편하게 얘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피해준다.
"괜찮아? 산통이 조금씩 시작됐다며."
"괜찮아. 다 아기가 나오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주은이는 정말로 행복한지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있지, 있지? 할아버지가 오빠를 엄청 마음에 들어했나봐. 아기도 태어나니까 일찌감치 약혼을 해놓는 게 어떠냐고 그러셨어."
"야, 약혼? 벌써?"
"응, 외부에는 알리지 않고 친척들만 불러서. 할아버지는 바로 결혼을 시키자고 했는데, 아버지가 말려서 약혼으로 양보를 하셨어. 오빠는…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조금 갑작스러워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애를 낳았는데 혼약을 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야."
그것도 그랬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대외적으로 알리기는 조금 어려운 일이니까 아기 돌잔치 때 같이 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는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
"…."
내가 시원하게 확답을 주지 않자 주은이는 입을 삐죽 내민다.
"싫은 거구나."
"그런 건 아니라니까,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큰일이잖아."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것보다 큰일은 아니잖아."
주은이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토라진다.
나도 내가 왜 시원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것도 복싱과 마찬가지일지도 몰라.'
내가 복싱을 사랑하지 않고 프로의식으로 대한 것처럼, 주은이도 마찬가지였던 걸지도 모른다.
몸의 주인이었던 이성현의 뒤처리를 한다는 의무감일 뿐, 진심으로 주은이를 사랑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이쪽은 복싱과는 얘기가 달랐다.
연애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아예 없을 정도로 메말라 있는 내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여성은 과분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이건 복싱과 달리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이니 만큼 노력을 기울이는 사이에 나도 애정이 싹텄다.
사랑까지는 몰라도 충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결혼은 호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후에 그게 진짜 사랑이 될지, 파국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결혼이야말로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할까?"
"정말!? 오빠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
"헤헤, 할아버지랑 엄마한테 말해야지. …아! 지금 아기가 발로 찼다. 오빠도 들어볼래? 배에 귀를 대봐."
주은이는 억지로 내 머리를 끌어안아 배에 가져갔다.
"오빠는 남자애가 좋아? 아니면 여자애가 좋아? 그러고 보니 물어보지 않았네."
"남자애."
"대답이 바로 나오네. 왜 남자애가 좋은데?"
"나중에 나를 뛰어넘을 선수가 돼주길 바라니까. 운동선수는 그래서 다들 아들을 원해."
"그렇구나. 그러면 나는 여자애가 좋겠어. 우리 둘 다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면 그 애가 너무 가엽잖아."
"그런데 그런 건 미리 알려주지 않아? 아들인지, 딸인지."
"나는 낙태할 위험이 높아서 미리 알려주지 않는데."
"학생이라 그렇구나."
"응…. 나는 낙태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는데도 믿어주지 않더라. 최근에는 의사 선생님이 그냥 알려주려 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아들인지 딸인지는 낳고서 확인하는 게 더 감동적일 것 같아서."
얘기를 하고 있자니 금방 면회 시간이 지나갔다.
보호자 등록을 하면 계속 같이 있을 순 있었지만 나는 빠질 수 없는 일과가 있으니 그 부분은 주은이네 어머님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그럼 가볼게. 내일도 올 테니까 마음 편히 있어."
"응, 오빠도 조심해서 돌아가."
이때 눈치를 챘어야했다.
나와 얘기하던 중, 주은이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음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음을 말이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한 나는 다음날 아침에서야 주은이에게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귀여운 딸이 태어났으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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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이는 애초에 내가 출산 과정을 보길 원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자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걸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 뭐라나.
내 일과도 있으니 연락을 하지 말라고 부모님께 졸랐다고. 연락은 낳고 난 뒤에 해도 충분하다면서 말이다.
여하튼 태어난 딸아이의 이름은 주은이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지은(至恩)으로 하기로 했다. 뜻풀이를 하자면 일찍 받은 선물 정도가 되겠다.
당장은 정지은이 되겠지만 훗날 내가 성인이 돼서 내 호적에 올리면 이지은이 되는 거다.
지은이의 탄생 이후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됐다.
본래도 바빴던 스케줄에 종종 아기를 보러 가야했기에 여유가 없었던 것.
이에 주은이네 할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사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기도 했고, 뭣보다 내겐 선영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8월의 여름도 지나 다시 찾아온 12월의 겨울.
이 시점에 이미 고교 헤비급 1위에 올라있던 나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으음…!"
사무실에서 줄자를 이용해 내 키를 재고 있던 김 코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더 컸구나. 190.9cm야. 체중도 자연스럽게 불어나겠지."
고1 사이에 3cm가 더 커버린 키. 농구 선수들이라면 반가워했을 일이지만 복싱 선수에겐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성현아, 너도 알다시피 91kg이상부턴 슈퍼헤비급이다. 말이 91kg이상이지 그냥 무제한급이라는 거야. 그런 만큼 경기 양상 자체가 달라질 거다. 거긴 100kg이상 나가는 녀석들도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러니 선택을 해야했다.
체중을 조절하며 헤비급에 남던가, 체중을 신경 쓰지 않고 슈퍼헤비급으로 가는가.
"헤비급에 남겠습니다. 아직 체중 조절이 어려운 단계는 아니니까요. 런던 올림픽 때까지 88kg에서 90kg정도로 유지를 하겠습니다."
"휴우! 잘 생각했다. 네가 갑자기 슈퍼헤비급으로 간다고 하면 어떻게 말려야 하나 싶었어."
김 코치님은 그러면서 공문 한 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결정된 거라면 여기에 한 번 나가보지 않겠냐?"
"이건…?"
영어로 된 공문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현존 최고 복싱 단체인 WCB가 주관하는 복싱 세미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현존 프로 복서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유스들에게 재능기부를 하는 이벤트라고 한다.
개최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이고, 세미나 기간은 4일. 비행기 시간을 합치면 일주일 정도는 소요될 거다.
"이사장님은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샌프란시스코…."
"세계구급 재능을 직접 볼 수 있는 찬스야. 난 네가 꼭 갔으면 한다."
김 코치님의 의도는 그곳에 가서 진짜 재능을 보고, 복싱에 대한 마인드를 새로이 해보라는 거겠지.
"으음…."
바쁜 와중에 일주일이나 외국에 나가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지만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었다.
나는 제안을 수락. 곧장 미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