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18화. 태릉선수촌 >
씻고 준비된 방으로 돌아오니 선영이가 침대에 누워 싱글벙글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어?"
"사진 찍은 거. 오빠도 볼래?"
최종훈 이사장네 집에 있을 때 찍은 사진들인 모양이었다.
와이프 임수영 여사와 개를 산책시킨 사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방 놀이공원에 갔을 때 찍은 것이었다.
"어? 어제 놀이공원에 갔었어? 여기 잠실에 있는 거 아니지?"
"응, 용인에 있는 거야. 거기서 눈썰매 페스티벌 같은 걸 한다고 수영이 아줌마가 같이 가자고 했어."
"수영이 아줌마가…."
선영이가 조른 게 아니라면 상관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애를 맡아준 걸로 모자라 이렇게까지 놀아주다니.
임수영 여사는 최종훈 이사장과 달리 무척 온화한 성격의 사람이긴 했다. 재벌에 대한 프라이드도 딱히 없다.
대표적인 게 가정부를 많이 두지 않는 점이었다.
집이 워낙 넓어 청소를 도와주는 가정부를 두는 걸 제외하면 요리나 세탁 같은 건 전부 본인이 한다.
"선영이 너, 수영이 아줌마가 좋아?"
"응, 엄청 좋아."
"그래…."
임수영 여사도 자식이 아들 둘밖에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영이를 유독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그 아들 둘이 외국에 나가 있어 적적하기도 할 테고.'
선영이가 또래에 비해 예의가 바르고, 떼를 쓰는 경우도 없어서 기특하게 보인 것도 있을 거다.
얘기를 듣자니 선영이가 졸졸 따라다니며 집안일을 도와줬다는 듯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기특하게 느끼겠지.
"그래서 눈썰매를 탔는데… 우웅…."
선영이는 놀이공원 갔던 얘기를 하다가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곧 잠이 들었기에 선영이가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재우고 나니 시간은 10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2층 거실 소파에 주은이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추운데 방에 들어가 있지."
"괜찮아, 선영이는 잠들었어?"
"자고 있어. 많이 피곤했나보더라. 얘기를 하다가 잠들어 버리더라고."
"…그럼 이제 괜찮겠네."
덥썩! 주은이는 내 팔을 잡더니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적당히 끌려가주니 쿵! 방의 문을 닫고는 나를 벽에 밀어붙이며 토라진 듯 말한다.
"회식 때 그 여자들은 누구야?"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주은이는 딱히 나에게 화가 나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바람을 피우려 한다고는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분만큼은 항상 구분을 한다.
그러니 그녀가 화를 내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그 여성들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식당에 자리가 없어서 의도치 않게 합석을 하게 됐거든."
"정말이지, 임자가 있는 사람한테 다들 너무하다니까? 난 그래서 오빠가 약혼반지를 끼고 다녔으면 하는 건데…."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운동선수는 진짜 불편하네."
"그래서 문신을 하고 다니는 걸지도 몰라. 장신구는 끼면 안 되니까, 그 대신 문신을 하는 거지. 문신은 규칙에 어긋나지 않거든."
"문신…."
주은이는 그런 방법이 있었냐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왜? 문신 같은 거 엄청 싫어하지 않았어?"
"응…. 그렇긴 한데. 오빠랑 나만의 문신이라고 하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는 느낌이 조금은 들어서."
"그랬다간 너희 아버님이랑 할아버님이 난리 칠 걸."
"알고 있어. 그냥 해본 소리야."
주은이는 그걸로 화가 풀렸는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자기, 국가대표 된 거 축하해."
"고마워. 뭐, 아직 올림픽 대표가 된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제일 잘한다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 나는 피아노를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내 위에 몇 명이나 있는걸. 그런데 오빠는 위에 한 명도 없다는 거잖아."
"주은이 네가 더 대단하지. 지은이를 키우느라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는 없잖아."
"아냐, 요즘엔 지은이 놀아주면서 영감을 얻으니까. 그게 너무 즐거워."
"미안해, 아이 키우는 걸 너한테만 맡기는 듯이 해서…."
"나도 힘든 일은 안하는 걸? 엄마랑 가정부 아줌마가 다 해주시는 거지."
"그래도. 고마워 주은아."
"응…."
스위치가 켜진 듯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내 목에 팔을 감더니 천천히 얼굴을 들이댔다.
꾹! 나는 검지로 그 이마를 밀어냈다. 그녀의 입술이 향하는 곳이 다른 곳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너 또 목에다 키스마크 남기려 그랬지."
"으으…!"
주은이는 굴하지 않고 박치기를 하듯 이마에 힘을 줬지만 내 손가락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안된다니까. 이젠 겨울이라 모기에 물렸다는 핑계도 안 돼."
"그러면 한 개만!"
"이게 무슨 과자야?"
거의 매번 이런 식이었다. 주은이는 영역 표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키스마크를 남기려 했기에 제지를 해야만 했다.
"키스마크 남으면 내일 너희 부모님을 어떻게 보라고. 아버님은 당장 골프채를 들고 오실 걸?"
"그러면 내가 막을 거야. 하나면 충분하니까 한 개만…!"
주은이는 기어코 내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는 물어뜯는 듯이 거칠게 키스마크를 남겼다.
그 기세를 이어 하나 더 남기려 했기에 바로 머리를 밀어내야 했다.
"하나만이라며!"
"어떻게 하나만 하고 말아."
"말의 앞뒤가 다르잖아."
곧 그녀가 입술을 댔던 곳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주은이는 황홀한 듯 그걸 바라보고 있다.
"그 수영 선수들이 이걸 봤으면 좋겠다. 오빠 좋아하는 다른 여자애들도."
그 부분에 배덕감을 느끼는지 주은이의 눈빛이 더 몽롱해진다.
이윽고는 참지 못하겠는지 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 붙였다.
쿵! 나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리더니 그대로 위에 올라탄 그녀는 다시금 목을 노리려 했지만 이 이상은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단념하고 입술을 맞대었다.
혀가 얽히며 농밀한 키스가 몇 분이나 계속됐다.
그러다 주은이가 옷의 단추를 풀려 하기에 손을 잡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너희 부모님이 아래층에 있는데 더 하기는…."
"괜찮아. 아빠는 잠들면 절대 일어나지 않거든. 엄마는 이해해주실 거고. 애초에 우리 집은 방음이 잘 돼있거든?"
"잠깐… 읍!?"
선발전으로 인해 며칠 만에 만난 탓인지 묘하게 적극적이었다.
나도 말리는 걸 단념하려던 때였다.
"주은아! 네 남편 왔다며!"
쿠당! 언니 시은이 문을 열어젖히며 당당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그대로 굳어 고개만 돌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은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
"…."
스륵! 시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잠시 뒤 다시 문을 열어 고개만 배꼼 내밀고 말한다.
"콘돔은 가지고 있어? 없으면 언니가 가져다줄까?"
"언니! 문 닫아!"
"헉, 진짜 미안해!"
주은이는 수치심에 차 울 것 같은 얼굴이 된다. 그래도 그 덕에 쿨 다운을 할 수가 있었다.
"난 방에 돌아가서 잘게. 주은이 너도 자."
"…알겠어. 잘 자 오빠."
내가 방으로 돌아가자 주은이는 곧장 언니 방으로 쳐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것에 화를 내려는 모양이다.
그게 신경 쓰여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으나 피곤했던 탓인지 의외로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
꿀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집은 아침 식사부터 떠들썩했다.
힘을 얼마나 줬는지, 상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차남 휘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장남 휘진이 아내와 함께 음식을 서빙하며 말한다.
"성현이가 국가대표 된 기념이래."
"어? 진짜 국가대표 됐어? 유망한 선수란 건 인정받기 위해서 뻥친 건 줄 알았는데. 어쨌든 축하한다."
상에 앉자 다들 앞으로에 대한 일을 물었다.
"태릉선수촌에는 들어가는 거야?"
"예, 그곳에 가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거든요. 아시아 예선에 대한 숙소나 비행기 일정도 알아서 잡아주고요."
"예선은 카자흐스탄에서 한다고 했나? 내가 옛날에 여행 삼아 가봤는데, 거기 4월쯤엔 은근히 춥다? 일교차도 커서 옷을 다양하게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식사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나 유이하게 표정이 안 좋은 둘이 있었다.
주은이와 언니 시은이다.
주은이는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시은은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 눈치를 보고 있다.
어머니 홍영숙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시은이 넌 왜 무릎을 꿇고 밥을 먹는 거니?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그런 게 있어."
시은은 먼 산을 보며 중얼거린다.
"엄마, 주은이도 다 컸더라…. 진짜로…."
탁! 주은이가 젓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자 시은은 움찔하며 다시 밥을 먹는데 집중한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선영이가 내 소매를 슬쩍 당겼다.
"왜?"
"응…. 저기 저거…."
멀리 있는 소갈비찜을 먹고 싶은 모양이다. 선영이는 이런 대가족의 식사가 적응이 되질 않는지 조금 초조한 듯 했다.
소갈비가 있는 곳은 아버지 정명훈 쪽이었기에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하나 난감했다.
그때 주은이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쪽의 반찬을 줄까?"
"아, 예. 거기 그 소갈비찜을 조금만 덜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많이 먹어. 우리 손주사위가 금메달을 딸 생각을 하면 벌써 벅차오르네."
그러자 정명훈이 미간을 찌푸린다.
"아버지, 손주사위라니요. 아직 약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할지 말지도 모르는데 그런 호칭은 일러요."
"에잉, 넌 정말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거냐? 이럴게 아니라, 네가 소갈비 좀 덜어줘라."
"제가 왜…."
"늙은 아비가 해야겠냐?"
명훈은 못마땅한 듯 밑접시에 소갈비를 덜어낸다.
그리고는 가정부를 시켜서 주려는 듯 했으나 할아버지가 직접 하라며 보챘기에 손을 쭉 뻗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성현아! 고맙습니다, 장인어른이라 하고 받아라."
"어…."
명훈의 눈에선 '하면 죽인다.'라는 듯한 기백이 느껴졌다. 그래도 웃어른은 할아버지 쪽이기에 그쪽을 따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누가 장인어른이냐!"
그 뻔한 반응에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식사가 끝난 뒤에는 거실에 모여 다 같이 잡담을 시작했다. 이게 이 집안의 전통 같은 것인 모양이다.
사건은 그 도중에 일어났다.
"할뻐찌!"
지은이가 명훈이 있는 곳으로 우다다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불안해서 내가 살짝 잔소리를 한 게 문제였다.
"지은아, 천천히 걸어. 넘어질라."
내 목소리를 들은 지은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방향을 전환해 내게 다가왔다.
그러다 넘어질 것 같았기에 나는 손을 뻗어 안아들었다.
"아빠!"
"어이쿠, 천천히 걸으라니까."
지은이는 꺄르르 웃으며 찰싹찰싹 인형 장난감을 든 손으로 내 가슴을 두들긴다.
이 모습을 다른 가족들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명훈은 달랐다.
자신에게 오려는 지은이를 의도적으로 하이재킹 했다고 생각했는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걸 본 차남 휘민이 엉뚱한 제안을 해온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면 내기를 해보는 건 어때요?"
그 내기란 간단했다.
둘이 나란히 서서 지은이를 불러 지은이가 안긴 쪽의 승리.
명훈은 가당치도 않다며 소리친다.
"요 녀석은 일주일에 몇 번밖에 집에 오지 않는데 내가 질 리가 없지!"
그는 도발에 걸렸는지 당장 하자며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판이 깔려버렸다.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주은이가 지은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순간이 스타트였다.
"지은아! 할아버지한테 오렴!"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는 그 열정이 대단했다. 나한텐 어떻게든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에 나는 슬쩍 눈치를 줬다.
"지은아. 이쪽, 이쪽!"
할아버지 쪽으로 가라며 은근슬쩍 손짓하자 지은이는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방향을 바꿨다.
지은이를 안아든 명훈은 소리 높여 웃는다.
"후하하핫! 그러면 그렇지!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라. 당연한 결과니까 말이야."
그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하루 종일 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기분일지도 모르지만 나에 대한 태도도 조금은 부드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
설날을 보낸 이후엔 태릉으로의 입촌을 준비해야 했다.
태릉의 합숙생활은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됐다. 여러 귀찮은 일을 전부 알아서 해주기도 하고, 뭣보다 비용적인 부분을 전부 떠맡아준다.
그런 좋은 곳이었으나 선영이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릉으로 가면 못해도 4월까지는 그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고 괜히 불안해할 것 같았기에 태릉에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의외로 선영이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응…. 수영이 아줌마네 집에서 지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할게."
"정말 괜찮겠어?"
"응, 오빠는 올림픽에 나가려고 열심히 훈련해야 하는 거잖아."
"그래…. 매일 전화할게."
선영이도 나날이 커간다는 것이다.
이제 6학년이 되면서 여러 심경의 변화가 있던 모양이다.
표정이 어두운 걸 보면 내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린 엄마와는 달리 내가 다시 돌아와 줄 거라는 것도.
"선물 많이 사올게. 즐겁게 지내고 있어."
"매일 전화해 오빠!"
선영이를 최종훈 이사장네 집에 맡긴 나는 태릉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최종훈이 태워주겠다고 했기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최종훈은 기분이 좋은지 웃음기를 띤 얼굴로 말한다.
"복싱 협회 관계자에게 얘기를 조금 들었다. 길성고 2학년 이성현은 역대급 재능이라고 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아니, 그런 정도로 넘길 얘기가 아니더만. 국가대표 선발전을 모조리 KO로 끝낸 건 선발전 역사상 처음이라던데?"
"정확히는 TKO입니다만…."
"그게 그거지 뭐. 하하!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안달복달 못하겠더라고. 우리 길성고에서 역대급 인재가 나온 거니까 말이야."
그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거짓말처럼 목소리를 싸늘하게 낮추며 말한다.
"…너. 그런데도 왜 헤비급을 선택한 거냐?"
"이제 와서 그 부분을 말씀하신다는 건…."
"그래, 협회 사람이 말하더군. 역대급 재능이긴 해도 크레이그 켐벨이 있어서 금메달은 어려울 지도 모를 거라고 말이야. 운이 나빠 하위 라운드에서 만나면 허무하게 질 수도 있다고 하던데."
왜 금메달을 딸 확률이 더 높은 슈퍼 헤비급으로 가지 않았냐 묻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사장님, 제 목표는 올림픽 메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제가 켐벨과 맞서기로 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요."
"그건 무슨 뜻이지…?"
"몸값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몸값? 설마…."
"예, 저는 올림픽을 끝내고 WCB와 계약을 할 생각입니다. 거기서 켐벨을 이긴 경력이 있다면 제 몸값은 수십억으로 뛰어 오르겠죠."
"오호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제겐 그 정도의 비전과 야망이 있습니다. 그런 제가 켐벨에게 패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좋아하는 단어를 섞어서 포부를 드러내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핫! 그래! 사내놈이 그 정도의 야심은 있어야지! 설령 패한다고 해도 켐벨 그놈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이면 몸값은 올라갈 거다. 그게 수억에 달하는 가치가 있다고 하면 금메달을 딸 가능성과 저울질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겠어."
내 선택의 합당함을 이해하고선 이 일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지지 않습니다. 보란 듯이 켐벨을 누르고 WCB에 엄청난 몸값으로 입성할 겁니다."
"훗, 그러냐…. 그건 흥미롭군."
"흥미롭다뇨?"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쪽 얘기니까."
그때 태릉선수촌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고마움을 전해두기로 했다.
"선영이를 맡아주신 점에 대해선 정말 감사드립니다."
"훗, 애가 참 기특하더라고. 나한테도 과일을 깎아서 가져오지 뭐야? 와이프도 그 애가 마음에 든 것 같고, 괜히 신경 쓸 필요 없다."
차는 입구를 지나 총괄 사무실이 위치한 본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럼 열심히 해봐라. 길성고 학생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말이야. 하하핫!"
웃음소리를 남기고 사라지는 차량.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