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22화. 돌이킬 수 있는 기회 >
4강에 안착한 나는 형석이 녀석을 찾아 찬진의 경기가 있는 링에 왔으나,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 코치님은 못말리겠다는 듯 말한다.
"보나마나 그 중국 선수와의 수다가 길어지고 있는 거겠지. 내가 찾으러 갈 테니 넌 앉아있어라."
"옛."
나는 자리를 잡고 링을 올려다보았다.
링 위에선 찬진이 눈을 감은 채 스텝만 요리조리 밟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상대 무라타 료타는 링 밖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며 마지막 예열을 하고 있다.
그때 내게 어색한 발음과 함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성현."
이노우에 나오야였다. 그는 씨익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나오야! 오랜만이네요."
"그래, 직접 만나는 건 1년이 넘었나?"
"어디 있었어요? 첫날에 찾았는데 없더라고요."
"라이트 플라이급 경기는 9일부터 있거든. 그래서 조금 늑장을 부렸지."
나오야는 내 옆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저쪽이 네 동기야?"
"예, 김찬진이라고. 같은 고등학교의 같은 학년입니다."
"오, 고등학생이 아시아예선까지 올라오다니. 심지어 너를 포함해서 2명이라는 거잖아?"
"사실 한 명이 더 있어요. 걘 오늘 경기를 이겨서 올림픽 진출을 거의 확정 지었죠."
"대단한데? 너도 무난하게 진출한다고 보면 이미 2명은 진출한 셈이고. 그렇담 동창 3명이 나란히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선 이 경기가 고비인 건가."
나오야는 안쓰럽다는 듯 표정을 흐렸다.
"미들급은 4명을 뽑으니까 충분히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 네 친구는 운이 나빴어."
"무라타라는 선수가 그 정도로 강합니까?"
"강해, 이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인데…. 그는 지금 WCB와의 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어. 최근에 계약 제안을 받았거든."
"WCB에…!"
"확정된 건 아니야. WCB측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조건으로 내걸었거든. 금메달을 따느냐 마느냐에 따라 계약 금액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 해. 장난 아니지?"
"무지막지한 조건이긴 하네요."
"어쨌든, 그래서 무라타 씨도 금메달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야. 경기에 대한 동기부여는 누구보다도 높을 걸."
그때 무라타가 링으로 올라오며 심판이 경기 개시를 준비했다.
마침 형석이와 김현수 코치님이 왔기에 나오야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대회가 끝나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만들어지진 않을 것 같네."
"전 괜찮습니다만."
"아니야, 식사는 런던 선수촌에서 같이 하자. 거기선 시간이 남아돌 테니까."
"…예, 그럼 당신도 꼭 진출하길 바랄게요."
"그건 걱정 마."
나오야가 떠나자 교대하듯 형석이가 다가온다.
"뭐야? 저 사람은 누구야?"
"전에 말했던 일본 선수."
"아, 그 경계해야 하는 선수를 알려줬다던?"
"맞아."
"흠, 그래서 뭐래? 무라타라는 선수가 그렇게 강하데?"
김 코치님도 궁금했는지 귀를 기울인다.
"최근에 WCB에서 계약 제안을 받았대."
"…!"
설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석이도, 김 코치님의 표정도 심각해진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마침내 공이 울리고.
찬진은 초반부터 공세를 취하기 위해 빠르게 치고 나갔다.
녀석의 강점은 치고 빠지는 복싱이었다. 그걸 통해 상대의 거리를 교란시켜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걸 통해 인도 선수를 이기며 첫 라운드를 통과했었다.
허나 이번엔 상대가 좋지 않았다.
"흣!"
팡, 팡! 찬진은 접근해 들어가 잽과 바디를 찌른 뒤에 물러나려 했으나 무라타는 첫 공방부터 그 부분을 허용하지 않았다.
끼익! 한 번의 묵직한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버리더니 바디를 후려친다.
펑! 펀치도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지 바디를 막아낸 찬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이후의 경기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응원을 하고 있던 형석이도 금방 입을 다물었을 정도로.
녀석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프로로 성공하려면 저 정도 수준은 돼야 된다는 건가…."
형석이 녀석은 느끼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실력적으로 찬진보다 자신이 나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찬진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으니 충격이 컸을 테다.
"허억! 허억!"
찬진은 1라운드가 종료된 시점에 이미 녹초가 돼있었다. 그만큼 압박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오히려 기분이 좋다는 듯,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2라운드가 시작될 땐 웃으면서 링 중앙으로 향했다.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판정으로 간 경기는 심판 만장일치로 무라타가 무난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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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진출의 분수령이 된 8강 일정이 끝나고.
우리 복싱팀은 초상이라도 난 듯한 분위기가 돼있었다.
이날에만 우리 복싱 국가대표팀 8명 중 5명이 탈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탈락한 선수들은 울먹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몇몇은 서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코치님들은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울음을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뭐 이런 일로 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 이건, 복싱은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그럼에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국가대표였다는 이력 한줄. 그 부분을 잘 살리면 체육관 트레이너로의 취업은 쉽겠지.
자신의 학창 시절을, 20대를 바친 결과가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은 그런 경력조차 쌓지 못한다.
"재민아, 힘내자. 힘내서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보자."
"아시아 예선도 못 뚫었는데 제가 어떻게 아시안게임에서 성적을 내요…!"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더 열심히!"
"그 소리 좀 제발 그만 하세요!"
새삼 스포츠가 잔인하다는 걸 느꼈다.
코치들도 자신들이 속이 빈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젠 돌이킬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니까.
'비인기 종목은 이렇게나 잔혹하구나….'
나는 이런 상황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다.
농구는 프로리그라는 체계가 있으니 더 제대로 준비하면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건 프로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하거나 리그 꼴찌를 할 때도 아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걸로 인생에 타격이 가거나 하진 않았다.
"성현아…. 우리는 나가있자."
형석이가 침울한 목소리로 내 팔을 붙잡았다. 진출에 성공한 우리가 위로해봤자 오히려 역효과였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형석이와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
그러자 김현수 코치님이 우리를 쫓아 나온다.
"형석아, 성현아. 혹시 찬진이를 보면 너희가 녀석 좀 위로해줘라.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나 원…."
찬진은 이미 무리에서 겉돌고 있었던 녀석이라 위로를 해봤자 들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런 것에 의무감이 강한 형석이는 바쁘게 녀석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찬진을 찾은 곳은 부근의 식당이었다.
녀석은 그곳에서 기름진 음식을 6개정도를 시켜놓고는 걸신들린 듯이 먹고 있었다.
"야, 김찬진!"
"…."
형석이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녀석은 무심한 듯 바라보고는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형석이는 그 앞에 앉아 말했다.
"얌마, 왜 여기 있어? 코치님들이 찾고 있다고."
"찾아서 뭐 어쩌게?"
"어쩌냐니…."
"입에 발린 위로를 해주기 위해서라면 됐다고 그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찬진은 내 쪽을 눈짓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이성현 너도 날 위로해주게?"
"해줄까?"
"됐다, 씨바. 네가 위로를 하면 졸라 비참해질 것 같으니까."
녀석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성현 너한텐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크다."
"고맙다고? 네가 나한테?"
"그 무라타라는 일본 놈도 그렇고…. 나한테 프로의 벽이라는 걸 알려줬으니까. 그걸 몰랐으면 나도 다른 형들처럼 다음 아시안게임이 있겠지, 다음 올림픽 때는 잘하면 되겠지 하면서 미련하게 굴었겠지."
"너 설마…."
"그래, 난 복싱을 때려 칠 거다."
그러자 쾅! 형석이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 새끼야! 그런 건 섣불리 결정하는 게 아니야! 넌 지금 경기에 져서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라고!"
"오히려 누구보다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있는 거지. 복싱밖에 남은 길이 없는 형들과 달리 난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내겐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내가 초등학생 때까진 야구를 같이 했다는 건 말했었나? 난 학교에 돌아가면 곧장 야구부 코치님에게 부탁해 입부를 할 거다."
"절대 쉽지 않을 텐데."
"어렵겠지. 고3인데도 대주자부터 시작을 해야 할 테고. 프로 지명까지 받으려면 대학에 들어가서 미친 듯이 훈련을 해야 할 테니까. 그렇지만 운동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야. 복싱 프로의 세계는 그것보다도 험난하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심형석 너도 잘 생각해야 할 걸? 빅4라고 불렸던 우리들 중에 진짜 프로로 갈 수 있는 건 이성현 쟤밖에 없어. 너도 괜히 쟤 따라한다고 나댔다간 가랑이가 찢어져 후회하게 될 거다."
"…!"
형석이도 느낀 바가 있는지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러니까 나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 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올림픽에 나가서 오기로라도 메달을 따보라고. 알겠냐, 심형석?"
"…고맙다."
역으로 격려를 받은 형석이는 씁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치님한테는 귀국 전날에 알아서 숙소로 복귀하겠다고 말해. 이렇게 된 거 관광이나 해보려니까."
"…그래. 그렇게 전할게."
식당에서 나오니 형석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찬진 저놈도 참 지독해. 저 멘탈이라면 정말 야구 선수로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윤호 녀석과는 달리 저놈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게 숙소로 향하던 찰나였다.
형석이가 아차하며 말한다.
"맞다, 탈락한 사람들 중에 희망하는 사람은 시내 고급호텔로 숙소를 옮겨준다고 했잖아. 그걸 말해야 했는데."
"어휴, 그걸 말 안하냐? 제일 중요한 거잖아."
"너도 깜빡했잖아."
우리는 다시 그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엔 아직 찬진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크흑…! 흑! 흑…!"
녀석이 흐느끼며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꾹 참고 있었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니 감정이 폭발한 것 같았다.
스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우걱우걱 밥을 먹고 있었다. 앞으로를 위해 어떻게든 먹고 힘을 내기 위해서다.
얼핏 보기엔 우스운 꼴인지라 다른 식당 손님들은 키득키득 거리면서 훔쳐보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 모습이 전혀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형석이의 어깨를 잡아 속삭였다.
"지금은 그냥 혼자 놔두자."
"…그러는 게 좋겠네."
형석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찬진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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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반에 치달은 런던 올림픽 복싱 아시아 예선.
계속된 일정에선 올림픽 티켓을 건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다.
4강에서 시리아의 모하마드 고사운을 2라운드 1분 51초 TKO로 제압하고 결승으로 향한 나는 결승에서 이란의 알리 마자헤르를 만나게 됐다.
이 경기는 나로서도 애를 먹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상대의 신장이 무려 2m나 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키를 가진 선수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적응이 필요했다.
뭣보다 리치가 길어서 내가 파고들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
결과는 3라운드 2분 31초 TKO승.
무리해서 머리를 노리기보단 바디를 공략한 게 주효했다.
바디 샷만 20방을 꽂아 넣으니 3라운드에 가선 마자헤르의 발이 멈춰버렸다.
그 틈을 이용해 러쉬를 가하니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아시아 예선 전경기 TKO. 관중석 한편에 앉아있는 스카우트처럼 보이는 남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연락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해냈다, 성현아! 네가 이제 올림픽 대표야!"
김현수 코치님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고효민 총괄코치도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의 경우 수영 훈련이라는 외도가 있었기에 여기서 떨어질 경우 후폭풍이 불어 닥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국가대표 복싱팀의 전반적인 성적이 부진했던 점도 그랬다.
8명 중에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건 고작 3명.
이것도 형석이가 이변을 일으켜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초라한 귀국이 될 수도 있었다.
11년도 세계선수권에서 본선 직행을 확정지은 선수 하나와 함께. 이걸로 우리 복싱팀에서 올림픽에 나가게 된 선수는 4명이 되었다.
귀국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씁쓸함은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그걸 마음에 담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기분전환을 할 겸 공항의 면세점을 방문하고 있었다.
곧 있을 주은이의 생일 선물과 선영이의 옷을 살 생각이었기에 혼자 돌아다니고 싶었으나, 통역사 외에 영어가 되는 건 나밖에 없었기에 형석이 녀석은 물론이고 코치님들도 내게 찰싹 붙어 다녔다.
'음…. 주은이 생일 선물은 뭐로 하는 게 좋으려나.'
주은이는 오히려 명품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내가 비위를 맞추려 하는 걸 싫어한다고 할까.
생일이 특히 그랬다. 일방적으로 축하를 받기 보단 오히려 그걸 기념하여 서로가 행복해지는 걸 더 좋아했다.
'좋아, 이걸로 하자.'
내가 고른 건 고급 악기점에 있던 돔브라라는 카자흐스탄의 전통 악기였다.
얼핏 기타처럼 보이는 악기이지만 줄이 2줄밖에 없는 게 특징이었다.
이걸 크기별로 2개를 구매했다. 하나는 주은이가 사용하기 좋은 크기로, 다른 하나는 지은이가 사용할 수 있는 장난감용이다.
그 선물을 포장 받은 뒤에는 선영이가 입을 옷을 고르기로 했다.
'음…. 선영이 건 고르기가 힘드네.'
사이즈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자애의 옷이니 만큼 내 심미안으로는 선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사진을 찍어 보내 물어보기로 했다. 생일 선물과 달리 이건 서프라이즈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답이 오질 않았다.
채팅 앱에 읽었다는 표시는 있었지만 답장이 올 기미가 없었다.
'선영이가 읽씹을…!?'
내 메시지에는 꼬박꼬박 정성스럽게 답해주던 그 착한 애가 읽씹을 하다니.
'이게 사춘기라는 건가…!'
나는 잠시 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때였다.
우우웅! 돌연 걸려온 전화. 선영이에게서였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선영아. 사진 봤어? 뭐가 좋아?"
그러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건 남자의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나다, 임병식.]
"임 비서님…? 아, 선영이가 지금 전화를 받기 어려운 상태인가요? 시차로 보면 지금쯤 하교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그럼 더 이상했다. 하교를 할 시간에 임 비서가 선영이 쪽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선영이를 마중 나왔다고 해도, 왜 선영이 휴대폰을 그가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에 관해서이지만. 너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귀국하면 곧장 나한테 연락해라, 내 연락처는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귀국해서 보자.]
"자, 잠깐만요. 선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혹시 안 좋은 일인가요?"
[지금으로선 나도 잘 모르겠다. 좋게 생각하면 또 좋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돌아와서 얘기하자.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야.]
"…알겠습니다. 오늘 바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귀국을 하면 밤 10시쯤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거라면 내가 인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지. 짐도 있을 거 아니야?]
"감사합니다. 그럼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옷 사진 보낸 거 봤는데, 그냥 그거 다 사라.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전화를 끝낸 나는 일단 선영이에게 선물할 옷을 구매했다.
'대체 뭐지…?'
맥락으로 보면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임 비서는 딱히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다고 했다.
선영이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반대로 나에 관한 일일 수도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고민을 해봤지만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채, 나는 임 비서가 기다리고 있는 입국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