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23화. 재벌집 막내아들(2) >
오랜만에 돌아온 학교의 복싱 체육관은 뒤숭숭한 분위기가 흘렀다.
복싱을 때려 치고 야구로 가버린 김찬진과 아직도 복싱 체육관에 나오고 있지 않은 정윤호로 인해 기둥이 되어줘야 할 3학년 라인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돌아온 덕에 그 어수선한 분위기도 조금은 해소가 되는 듯 했다.
"형석이 형! 올림픽 진출 정말 축하드려요!"
"형이 살아남을 줄은 진짜 몰랐다니까요? 무조건 1회전에서 탈락할 줄 알았어요!"
"형은 지금 기적의 사나이라 불리고 있다고요!"
"뭐라고 이놈들아?"
인망이 있는 형석이는 후배들의 거친 환영을 받았다. 나의 경우엔 다들 당연히 올라갈 줄 알았는지 그렇게 놀라는 눈치는 아니다.
형석이는 새로 들어온 1학년 애들과 얘기를 나누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시작했다.
나도 무리에 끼어들어 얘기를 나누려 했으나 김현수 코치님이 급하게 손짓을 하며 사무실로 호출을 한다.
사무실에 가보니 김 코치님 외에도 복싱 협회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성현아, 오랜만이다."
"앗…. 안녕하세요."
그는 1년 반 전쯤에 WCB 세미나에 일행으로 같이 갔었던 남자였다.
"손쉽게 올림픽에 진출했다며, 역시 역대급 재능이라고 불릴 만 해."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곳에…?"
"그야 당연히 널 도우려고 왔지."
"저를요?"
"자. 이걸 봐라."
그는 잘 정리된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이젠 올림픽 헤비급 진출자들이 전부 정해졌으니까. 너를 제외한 15명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왔다. 우리 협회 전력 분석가들이 오랜만에 일을 했지."
"아하…."
슬쩍 살펴보니 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돼있었다.
남자가 말한다.
"주목해야 될 선수는 크게 세 명이야. 먼저 미국의 크레이그 켐벨. 핵주먹이라 불리는 괴물이지. 뭐, 이 선수에 대해선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넘어가고. 두 번째가 바로 루치아노 베레티니라는 이탈리아 선수다."
"들은 적 있어요. 별명이 귀공자라고 하던데요? 이건 외모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경기 스타일 때문에 그래. 우아하고, 세련됐다고 할까. 게다가 경기가 끝나고 얼굴에 상처를 입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거든. 그래서 귀공자라 불려. 메이웨더가 프리티 보이라 불린 것과 비슷하지."
"스타일도 같은 아웃복서인 거군요."
"메이웨더랑은 본질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다음 세 번째는 해리슨 베인즈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의 기대주야. 루치아노와의 전적은 0승 2패로 루치아노가 앞서고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3라운드밖에 하지 않는 아마추어 복싱이라 그런 느낌이 있어. 아웃복싱이 판정 면에선 유리한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서 전문가들도 7라운드 이상의 경기를 치르면 해리슨이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더군. 별명은 대포알,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 둘은 장차 WCB에 입성할 수 있을 재능으로 여겨지는 선수들이었다.
크레이그 켐벨이 이미 프로 최상위 레벨로 평가받는 다른 차원의 선수라면, 이들은 아마추어 레벨에서 천재로 불리는 선수들인 셈이다.
"스카우트 리포트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어볼게요."
"그래, 그럼 이제 제대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본론이요? 이게 본론이 아니었나요?"
"이 정도라면 사람을 시켜서 보내면 되는 거니까. 오늘 온 건 네 스파링 상대를 잡아주기 위해서야. 성현이 너도 알고는 있지? 크레이그 켐벨이나 루치아노 같은 녀석들은 현역 프로들을 상대로 스파링을 하고 있다는 걸."
"…예."
크레이그 켐벨이 WCB 헤비급 챔피언 모하메드 사다트와 스파링을 하는 영상이 동영상 사이트에서 대히트를 쳤을 정도다.
켐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WCB의 프로들과 연달아 스파링을 치르고 있었다.
루치아노나 해리슨도 마찬가지. 그들은 아마추어에서 쌓아놓은 명성이 있으니 그런 수준 높은 스파링을 잡기가 쉬웠다.
"성현이 너에게 부족한 건 그런 높은 수준의 스파링 경험이라고 협회의 전력 분석가들이 판단을 했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릉에서도 수준이 맞질 않아 스파링을 하지 않았을 정도니까.
"어쨌든, 그래서 우리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스파링을 잡아봤다. 너도 이제는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복서니까, 프로 중에서 관심을 가지는 녀석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다가 얘기가 된 곳이 있어."
그는 한 가지 자료를 더 내밀었다.
현 WCB 라이트 헤비급 랭킹 11위 앤서니 프레이저라는 선수의 데이터였다.
"이 녀석이 4주 뒤에 일본에서 펼쳐지는 WCB 월드투어 이벤트에 출전하거든. 그래서 황급히 매달려봤지. 우리 한국에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전경기 KO로 끝낸 초특급 유망주가 있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앤서니 측에서 OK사인을 냈어. 도쿄에 훈련캠프를 차리면 그곳으로 오라더라."
"앤서니 프레이저…! 라이트 헤비급에서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선수잖아요."
"맞아. WCB에 입성하고 나서 전승을 기록하며 치고 올라오고 있는 놈이지. 이번 경기도 랭킹 6위 선수와의 경기니까 이기면 라이트 헤비급 탑10에 들어갈 거다. 몇 경기를 더 이기면 타이틀 샷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선수지."
"이런 수준 높은 스파링을 잡아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협회가 이렇게 일을 잘 하다니, 의외였다.
그러자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WCB 쪽에서 큰 도움을 줬어."
"WCB는 갑자기 왜요?"
"그쪽도 성현이 네 현재 기량을 체크해두고 싶나봐. 그래서 앤서니 프레이저 측에 좋게 얘기를 해준 것 같아. 그러니 스파링 현장에는 WCB 스카우트도 참석을 할 거다. 열심히 해서 WCB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보자."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프레이저의 경기 스타일은 크레이그 켐벨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인파이팅을 구사하는 파워펀처. 체격도 얼추 비슷했다.
그러니 내게 있어 이번 스파링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한 최종점검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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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학교로 돌아온 이유는 중간고사 때문이었기에 우리는 점심시간 직전에 교무실에 방문해야 했다.
시험 범위를 전달받기 위해서다.
시험 범위라고 해봐야 고3인 지금은 모든 부분이 범위이긴 했으나 집중적으로 문제가 나오는 범위가 있는 모양이었다.
인문계 교무실로 향한 나는 교사들에게서 수제로 만들어진 문제집을 받았다.
"여기 나오는 문제에서 조금씩 응용을 할 거니까 문제만 한 번씩 풀어 봐도 크게 도움이 될 거다. 성현이 너라면 별 걱정은 없겠지. 운동도, 공부도 둘 다 해낼 수 있을 거다."
수학 교사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리고 떠난다.
다음 중년의 문학 교사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문제집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그리곤 속삭이듯 말했다.
"거기 비문학 지문 20개 중 몇 개가 시험에 나올 거야. 20개 전부 외워두면 굉장히 편하겠지? 문학은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읽고 느껴! 그러면 충분해."
이건 문제유출 급의 서비스였다. 교사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무안함을 감추듯 웃으면서 떠나간다.
그 다음 탐구 과목의 교사들도 범위가 잘 정리된 참고서나 문제집을 가져다주었다.
덩달아 그것들을 받게 된 형석이는 저 세상의 것을 본 듯한 표정이 된다.
"이거 대체 뭐라고 써있는 거냐? 한글인데도 읽지를 못하겠는데?"
"넌 그냥 평소대로 찍고 잠이나 자."
"어휴, 그러련다. 이제 와서 공부는 무슨."
녀석은 문제집을 대충 가방에 처박고는 내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성현이 너 점심 회식은 갈 거냐? 후배 녀석들이 우리 올림픽 진출 기념으로 한턱 쏜다는데. 점심 먹고 피씨방 갔다가 저녁도 먹기로 했어. 그 후엔 노래방을 갈 수도 있고."
"쏘리, 나는 오늘 수영 훈련을 가야 되거든."
"아 참, 그랬었지? 그럼 너 시간 될 때로 미룰까?"
"아냐, 언제 시간이 날지도 모르고. 너 혼자 갔다 와."
"쩝, 그래. 네 몫까지 즐기고 올게. 너도 열심히 해라."
형석이는 부랴부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교무실의 시계를 눈짓했다.
'수영부 버스가 미영 체고로 출발하는 게 1시 30분이라고 했었지?'
그때까지 2시간여가 비어있었다. 복싱부 체육관도 점심 회식을 나가 비어있으니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슬쩍 휴대폰을 꺼내 주은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은아, 시간 있어? 점심에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할래?
그러자 10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온다.
<점심 먹으면 바로 갈게, 인문계 독서실이지?>
─당연하지, 체육계는 독서실이란 것 자체가 없거든. 그럼 먼저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을게.
급식으로 점심을 대충 해결한 나는 독서실로 향했다.
[…….]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독서실.
중간고사 기간인 탓인지 점심시간임에도 학생들이 꽉 차 있었다.
유일하게 있는 자리는 입구 쪽의 자리 2개뿐이었다.
그 중 하나의 자리에 '3학년 7반 박은영의 자리입니다! 앉으면 지홍렬!'이라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이러면 주은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어쩔 수 없었다. 혼자 공부하는 수밖에.
나는 교사들에게 받은 문제집을 펼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럴수록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성현이다…!"
"시험 공부하는 건가?"
"우와, 씨. 키 졸라 크네."
"참고서는 뭘 쓰는 거지? 저걸로 전교권에 드는 거잖아. 참고서 구경해보고 싶다."
주변이 은근히 시끄러웠기에 언어 문제집을 집어넣고 수학 문제집을 풀기로 했다. 수학은 일단 문제를 풀면 저절로 집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주은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어흠!' 하는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박은영의 자리라 적혀있는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전세 낸 것도 아니고. 뭐야, 이게."
자리에 앉은 주은이는 내 쪽을 훔쳐보며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약혼을 한 연인 사이인 두 사람이 아는 척을 해선 안 되는 게, 마치 마피아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스릴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은이는 슬쩍 의자를 내 쪽으로 접근시켜 서로의 옷이 닿을 만한 거리를 만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더운데 떨어지시죠?
주은이는 키득거리며 휴대폰 액정을 연타한다.
<이러면 우리 사귀고 있는 거라고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주은이도 나와 비슷하게 남자애들 사이에선 주목을 받는 입장인지라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주은이 쪽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남자애들이 몇몇 보였다.
─글쎄?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알아챌 리는 없을 걸?
그렇게 보내자 주은이는 의자를 슬쩍 더 접근한다. 그러자 아예 팔이 맞닿은 상태가 됐다.
나는 다급히 반대 방향으로 의자를 옮겨 피했다.
─이러면 당연히 알아채지!
<ㅋㅋㅋㅋㅋ>
나는 주은이의 접근을 완전히 피하기 위해 의자를 더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되니 오히려 옆자리와 가까워지게 됐다.
"저기,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3학년 여자애가 당황하여 쭈뼛거린다.
"아, 미안해."
나는 다시 의자를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곧바로 주은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네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그런 거잖아.
<ㅠ.ㅠ>
주은이는 그제야 의자를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그 이후론 문자를 그만두고 공부를 했으나 그때였다.
"저기, 미안한데…. 여기 내 자리거든?"
주은이 자리의 주인이 나타난 모양이다. 주은이는 눈살을 찌푸린다.
"독서실에 내 자리가 어디 있어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는 하는데. 잠깐 매점에 갔다 온 것뿐이거든. 아주 잠깐 일어난 거야. 포스트잇 못 봤어?"
"…."
상대가 그렇게 말하니 자리를 비켜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말다툼을 해야만 하니까.
주은이는 입을 삐죽 내민 채 자리를 비켜줬다.
그렇게 내 옆에 앉은 박은영이란 애는 내 쪽을 힐끔거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헛!?"
경악성을 내지르고는 몸을 내 쪽으로 붙여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인다.
"저기, 너 이성현 맞지?"
"응, 그런데?"
"대박사건. 올림픽 진출 정말 축하해."
"고마운데, 여긴 독서실이니까 조금만 조용해줄래?"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목소리를 조금 더 죽였다 뿐, 몸을 밀착하여 계속 얘기를 걸어온다.
그럴 때마다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쌓여갔다.
<오빠 이제 훈련하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점심시간 끝나간다!>
<그러고 보니 4일 뒤에 내 생일이네?>
<생파 진짜 기대된다.>
<내 자리 뺏겼어ㅠ.ㅠ>
<ㅠ.ㅠ!!>
나는 그 압력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일찌감치 수영부 버스에 가있기로 했다. 공부는 버스 좌석에 앉아서 하면 되니까.
그렇게 짐을 챙기고 일어나니 독서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은이가 편안한 얼굴을 한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리곤 내 옆을 스쳐가며 작게 속삭인다.
"훈련 열심히 해, 자기야."
도망가듯 후다닥 뛰어가는 주은이.
나는 휴대폰으로 마지막 말에 대한 답장을 보낸 뒤, 버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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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체고로 향하는 길성고 전세 버스의 안.
수영부 선수들은 뒷좌석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성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버스 잘못 탄 거 아니야?"
이윽고 3학년의 부추김을 받은 2학년 선수가 쭈뼛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저기 복싱부의 이성현 선배님 맞으시죠? 올림픽 진출하셨다는…."
"응, 맞는데?"
"죄송한데 버스 제대로 탄 것 맞으신가요?"
"어? 이거 미영 체고 가는 것 아니었어?"
"아, 예. 맞습니다. 그럼 제대로 타신 겁니다."
성현은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내렸다.
수영부 선수들은 성현이 버스를 얻어 탄 걸로 대충 납득을 했다.
수영부 코치 강상호는 성현을 무시한 채 이야기를 진행했다.
"오늘 기록 측정은 절대로 져서 안 되는 거 알지? 미영 체고 그놈들이 기고만장해 하는 꼴을 계속 볼 거냐?"
"아닙니다!"
"무조건 이겨야 된다. 배영이랑 접영은 당연히 이겨야 하는 거고, 특히 자유형! 지난번이랑 똑같은 결과가 나오면 토끼뜀으로 집에 돌아와야 하는 거 잊지 마라!"
수영장이 리모델링에 들어간 탓에 합동 훈련을 시작한 길성고와 미영 체고.
소속이 다른 만큼 당연하게도 서로간의 경쟁심이 대단했다.
길성과 미영체고는 알아주는 지역 라이벌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미영 체고에 도착한 선수들은 전투태세로 탈의실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 일제히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엥?"
"…??"
버스에서 내린 성현이 탈의실까지도 동행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강상호 코치는 미리 수영장으로 향한 탓에 수영부 주장 민정윤이 성현에게 물었다.
"야, 이성현. 넌 왜 수영복을 입고 있는 거야?"
성현은 도리어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적반하장의 태도였다.
"코치님한테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
"어라? 수영 훈련은 내일부터였나?"
성현은 갸웃하며 휴대폰을 꺼내 확인을 해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윤성호 코치님이 미영 체고에만 연락을 해놓은 것 같네. 어쨌든, 나도 오늘부터 같이 훈련하기로 했어."
"…네가 대체 왜?"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라면 의문을 품어봤자 소용은 없었다. 수영부 선수들은 의문을 애써 추스르고 성현과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8개의 레인이 잘 정비된 수영장에선 미영 체고 선수들이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그 수영장 전체를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2층에선 국가대표 총괄코치인 윤성호가 미영 체고 감독, 그리고 강상호 코치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성현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어, 성현이 왔구나. 어서 몸 풀어라!"
성현의 등장에 미영 체고 선수들도 미간을 찌푸렸다.
"쟨 뭐야? 지난번엔 없었잖아."
"피지컬 미쳤는데? 몸 좋은 지방 학교 애를 스카우트한 건가?"
"길성고라면 있을 법한 얘기네."
성현이 길성고에선 유명인이긴 해도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있어선 완벽한 무명에 가까웠다. 미영 체고 선수들이 듣보잡 취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성현은 꼼꼼하게 준비 운동을 하고는 물에 들어가 가볍게 헤엄을 치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에 길성고 선수들의 의문은 더욱 가중됐다. 그들이 보기에 성현의 수영실력이 예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분여가 지나자 코치들이 분주하게 선수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각자의 종목에서 기록을 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윤성호는 마침 잘 됐다며 양 코치들에게 성현을 끼워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성현이의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했는데 잘 됐네요!"
"페이스메이커요…?"
미영 체고의 감독 구성훈은 그 표현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 불쾌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윤성호는 태릉의 총괄코치. 즉, 수영협회의 핵심 인사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실력이 굉장히 훌륭한 선수인 모양이군요."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우리 태릉 코치진이 준비한 회심의 인재라고 할까요. 하하하!"
"길성고에서 태릉에 간 수영선수가 있다고는 처음 듣는데요…."
"저 애는 별종이에요. 길성고 소속이지만 길성고 수영부는 아니거든요."
"그게 대체…? 아무튼 좋습니다. 저 선수의 적성은 어디죠?"
"자유형 200m입니다. 100m로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200m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윤중아! 자유형 200m부터 기록 체크하자!"
그의 지시에 길성고에서 성현을 포함해 4명. 미영 체고에서 4명의 남자선수들이 레인에 섰다.
그때 윤성호가 성현을 4번 레인에 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구성훈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자고로 4번 레인에는 8명 중 최고의 기록을 가진 우승 후보를 배치한다. 4번 레인이 과학적인 이유로 기록이 가장 잘 나오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 성현을 배치하라고 한 건, 다른 선수들을 이미 성현의 아래로 놨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디 얼마나 잘난 실력인지 보자고!'
구성훈 감독이 그런 불만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미영 체고 선수들도 자존심이 상해 성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온 듣보인지는 모르겠는데…."
"가볍게 밟아주자고."
그 둘은 미영 체고의 자유형 에이스들로, 고교 전국 체전에서 2, 4위를 차지했던 실력자들이었다.
그 둘이 목을 우드득 꺾으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반면 길성고 선수들은 연달아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성현을 전문 수영선수라 지레짐작하고 있는 미영 체고와는 달리 그들은 성현이 복싱선수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 준비해라!"
점핑 준비를 마치는 선수들. 이윽고 삑! 하는 전자 신호음과 함께 선수들이 일제히 물로 뛰어들었다.
2층 높은 곳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던 구성훈은 경기가 시작한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성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그는 초장부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잠영이었다.
푸확! 다른 선수들은 7~8m부근에서 물 밖으로 튀어나와 스트로크를 시작한 반면 성현은 무려 13m까지 잠영을 한 것이다.
그 속도에 구성훈은 경악했다.
'말도 안 돼는 돌핀킥이야…!'
성현은 하체의 유연함과 힘을 통해 무지막지한 추진력을 얻고 있었다.
그 돌핀킥은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발끝과 발바닥 움직임에서 나오는 디테일은 놀라울 정도였다.
윤성호 코치가 씨익 입 꼬리를 올린다.
"어떻습니까? 마치 펠프스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허어…. 그, 그렇군요. 잠영의 속도만 따진다면 그에 육박할지도 모르겠네요."
50m에서 플립턴을 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선수들이 4m에서 5m정도만 잠영을 하는 것에 반해 성현은 무려 9m까지 잠영을 했다.
구성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은 겁니까?"
자유형에서 잠영이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다.
잠영 상황에선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히 빠른 스피드를 낼 수 있지만, 그 동안 숨을 쉬지 못해 체력적인 소모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괜히 선수들이 8m까지만 하는 게 아니다. 잠영을 오래할 경우 체력 문제가 생겨 전체적인 페이스 분배가 망가진다.
초반에만 치고나갈 수 있을 뿐, 결국 마지막엔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저러고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 잠영을 썩혀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에는 구성훈도 십분 동의를 했다. 그만큼 성현의 잠영은 수준급이었다. 그걸 살리기 위해서 이런 전략을 사용한다고 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하면 기록을 더 빠르게 단축할 수 있어요. 페이스 조절이 안돼서 경기를 그르친다는 건, 페이스 조절만 할 줄 알게 되면 완벽해진다는 뜻이니까요."
그 준비물인 순수체력과 지구력 부분에서 성현은 이미 합격점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페이스 조절만 능숙해진다면 기록이 순식간에 단축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페이스 조절이 가장 어려운 장거리 잠영 전략으로 훈련을 하고 있던 것이다.
"푸하! 푸하…!"
150m에서 플립턴을 한 성현도 체력적인 부하에 직면해 있었다.
페이스가 떨어지는 타이밍을 억지로 버텨내며 도착지점인 200m까지 헤엄을 친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선수들은 아무도 없었다.
탓! 마침내 벽면에 손을 대며 완주를 끝내고. 무려 5초 정도 이후에 다른 선수들이 도착을 했다.
"허억! 허억!"
"미친…!"
미영 체고 선수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기록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평소처럼 1분 51~52초대를 찍으며 무난한 레이스를 해냈다. 그럼에도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같이 경기를 한 길성고의 주장 민정윤은 성현의 기록을 보고는 헛숨을 삼켰다.
1분 46초 71. 이번 런던 올림픽 출전 기준 기록인 1분 47초 10를 가볍게 통과한 기록이자, 대한민국 고교생 최고 기록인 1분 46초 73을 갱신한 미친 기록이었다.
다시 말해 성현은 지금 이 순간 비공식적으로 남자 고등부 신기록을 세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