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 26화. 눈도장(2) >
성현의 실력에 대해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수영을 배운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 대회에 출전한 이력이 없었고, 훈련조차 폐쇄적인 태릉에서 한 것이었으니 수영 관계자들조차도 문서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다.
SBC의 해설자인 허대훈은 그 문서 자료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영이 강점이라고? 특이한걸.'
잠영을 잘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지만 그걸 강점이라고 까지 내세우는 선수는 별로 없었다. 잠영 제한 룰이 생긴 뒤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예! 선수들이 수면을 향해 뛰어듭니다! 이성현 선수는 6레인!]
수면 아래로 깊이 파고든 성현은 무시무시한 돌핀킥을 통한 잠영으로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 나갔다.
캐스터는 환호를 했다.
[이성현 선수 빠릅니다! 시작부터 1위로 치고나갑니다! 허 위원님, 이걸 두고 잠영이라고 하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성현 선수의 잠영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하네요. 보통 자유형의 잠영은 8m부근에서 빠져나와 스트로크를 시작하는 게 이상적인 형태라고 말을 하거든요.]
[아, 그럼 이성현 선수가 잘못 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보세요, 이성현 선수가 먼 거리 잠영을 통해 선두로 치고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군요, 지금 모습을 보면 다른 선수들은 왜 잠영을 더 하지 않는가가 의아할 정도입니다. 앗, 이성현 선수! 50m에서 턴을 합니다! 23초 36! 굉장히 빠릅니다! 세계신기록 구간과 맞먹는 수준인데요!? 아…! 이성현 선수가 플립턴 이후에 또 다시 길게 잠영을 가져갑니다! 멋져요!]
허대훈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로 멋지네요! 우리 코치들이 잠영을 정말 잘 가르친 것 같습니다!]
[이성현 선수가 물살을 가르며 100m지점으로 향합니다! 아직까지도 선두입니다! 또다시 플립턴!]
꾸르르륵! 성현은 100m 구간에서도 전혀 힘을 잃지 않은 돌핀킥으로 빠르게 치고나갔다.
[100m 구간 기록 50초 21! 아직도 세계신기록 구간과 나란히 달리고 있습니다!]
[페이스가 굉장히 빠르네요! 예선인데도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또다시 잠영! 우와, 이것만 보면 잠영이 정말 강한 기술인 것 같은데요?]
[강한 기술이 맞습니다. 아주 막강한 기술이죠. 하지만 후반부 페이스 조절이 힘들어져 자유형에선 보통 오래 잠영하지 않습니다.]
[허! 그렇다는 건 페이스 조절이 가능하다면 완벽한 무기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죠, 이런 괴짜같은 잠영 스타일로 자유형을 평정했던 선수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마이클 펠프스입니다.]
[펠프스요! 아! 이성현 선수가 150m지점을 통과합니다! 아…! 페이스가 조금 느려졌나요? 150m 구간 1분 17초 67! 세계신기록 구간이 멀어져 갑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예요. 예선에서 힘을 뺄 필요는 없거든요!]
초반 페이스를 강하게 잡은 성현은 150m 구간에서 부하가 걸렸으나 굳이 무리를 하여 스퍼트를 하지는 않았다.
이미 독보적인 선두로 치고 올라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를 느긋하게 조절하며 200m지점의 벽을 손으로 찍는다.
[1분 46초 48! 우리 이성현 선수가 예선 1차전에서 1위를 차지합니다! 예선 2차전에 진출합니다!]
[아주 좋은 기록이에요. 고등학교 선수가 정말 장하네요!]
성현은 카메라가 자신을 단독으로 비추자 찡긋하며 윙크를 한다.
[하하! 이성현 선수가 쇼맨십이 있군요. 이거 여성 팬들이 생길 지도 모르겠는데요?]
[전 이미 이 선수에게 반했습니다. 왜 수영 코치들이 입을 모아서 기대주라고 했는지를 잘 알겠어요!]
실시간 인터넷 중계창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 1등했네? 복싱이랑 양다리 걸치고 있다기에 실력은 없는 줄 알았는데.》
《피지컬로 찍어 누른 거 아니야? 운동 능력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 원래 동양인이 저 정도 키면 둔해야 정상인데ㄷㄷ》
《저 돌핀킥인지 뭔지, 진짜 빠르게 한다. 저거 어느 정도 잘 하는 거임? 수영 잘 아는 사람 없음?》
《수잘알로서 말한다. 잠영은 펠프스 급이다.》
《오바ㄴㄴ 근데 생각보다 훨씬 잘하는 건 맞음.》
실시간 검색어도 성현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현의 이름으로 검색을 할 경우 나오는 건 당연하게도 수영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복싱에 관한 내용이었다.
《길성고 이성현 치니까 복싱밖에 안 나오는데?ㅋㅋ》
《올림픽 아시아예선 전경기 KO? 이거 대단한 거임?》
《나 복싱 팬인데, 이성현 이미 국내에선 역대급으로 소문난 놈임. 중량급에서 100년에 한번 나오는 재능이라고 평가받는 중.》
《100년? 우리나라 역사가 100년이 안되는데ㅋㅋ》
《우와, 얘 진짜 스타성 있다. 저거 카메라에 윙크하는 것 봐. 쇼맨십도 있네?》
줄을 잇는 호평.
경기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완벽한 데뷔전이라 할 수 있었다.
성현은 TV를 통해 강렬하게 눈도장을 찍음과 동시에 포털 인기 검색어 1위부터 8위까지를 독점하며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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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1차전 경기를 끝낸 나는 가벼운 피로감을 느끼며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예선 2차전은 9시간 정도 후에 진행이 되니 그때까지는 컨디션 유지 싸움이 된다.
'9시간을 어떻게 보낸담….'
휴대폰이 없는 게 이럴 때 아쉬웠다.
뭐, 그렇기에 선수단에서 휴대폰을 뺏어간 거기도 하지만.
"성현아."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예선 1차전을 치르러 가는 이용호가 말을 걸어왔다.
"왜 이렇게 힘을 줬어? 적당히 1분 47초 초반만 가도 되는 건데."
"첫 올림픽이니까요.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네요."
"하핫, 그 심정 알지. 어쨌든 잘했어."
"예, 형도 잘 하고 오세요."
이용호가 가고 나선 몸을 말린 뒤 수영복 위에 추리닝을 덧입었다.
그러고 멍하니 대기실의 TV 스크린을 보고 있자니 윤성호 코치님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는 기록이 적힌 표를 뒤적이더니 내게 말한다.
"아주 좋았다 성현아. 내가 지금 지난 베이징 올림픽 기록을 보니까, 당시 2차 예선 8위 선수의 기록이 1분 47초 07이고 7위 선수의 기록이 1분 46초 54였어. 그러니 지금대로만 하면 결선 하위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다."
"지금 페이스를 기억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음…. 1차 예선에서 1위를 했으니 2차 예선에선 4레인에 서게 될 거다. 그러면 미세하게 기록이 좋아지겠지. 목표치는 넉넉하게 1분 46초 40으로 하자. 괜히 빼다가 결선 진출에 실패하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잠깐 괜찮겠냐?"
"예?"
"아니, 방송사 측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그러거든. 경기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하지 말고."
"시간 때우기로 딱 좋을 것 같네요. 그 인터뷰를 하고난 뒤에 친구 경기를 보고와도 될까요?"
"복싱? 그래, 그런데 컨디션 조절은 계속 해야 된다?"
"옙."
난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웠다.
애초에 복싱 선수이니 터치가 많지 않다고 할까. 휴대폰 제출에 관해서도 원한다면 나만큼은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줬을 정도다.
'그것도 그거지만….'
내가 최종훈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의식하고 있는 것일 테지. 협회 쪽은 그런 눈치를 보니까 말이다.
뭐가됐든 덕분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츄리닝을 입고 대기실을 나서자 금방 믹스트 존이 보였다. 그곳에 SBC 취재진과 NTBC, KBC의 보도진이 모여 있었다.
NTBC와 KBC는 뉴스 보도를 위한 인터뷰를 하려는 거였고, 중계를 맡고 있는 SBC는 뉴스 겸 개인 취재를 위한 것이었다.
"이성현 선수! 여기입니다!"
SBC의 여성 리포터가 손을 흔들며 내 위치를 지정해준다.
카메라가 켜져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이거 생방송인가요?"
그녀는 소리를 죽여 속삭인다.
"맞아요, 이원방송 중이거든요! 현재 케이블 채널인 SBC 스포츠에선 라이브로 나가고 있어요. 인터뷰가 시작되면 SBC 본 채널에서도 생방으로 들어갈 거예요. NTBC랑 KBC는 녹화니까 우리 SBC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봐줘요. 알겠죠?"
내가 위치에 서자 본격적으로 큐 사인이 나왔다.
NTBC와 KBC의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었고, 대표하듯 SBC 리포터가 묻는다.
"이성현 선수! 자유형 200m 예선 1차전 1위!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2차 예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는데요?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첫 경기라 조금 긴장을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현 선수는 우리나라 선수단에 세 명뿐인 고등학생 선수인데요! 선배들 사이에서 힘들지는 않으세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형들과 누나들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시거든요."
실제론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인터뷰란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기가 끝나고 카메라에 대고 윙크를 했어요! 그걸 두고 누나들의 심쿵을 유발하려 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그건 어떤 의미의 윙크였을까요?"
"아…. 그건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빠가 1등 했으니까 학교에 가서 자랑을 하라는 거였어요."
사실 1차 예선은 1분 47초대로 통과를 해도 넉넉하게 통과할 수 있는 시합이었다.
그럼에도 페이스를 끌어올려 1위를 한 것은 선영이를 위해서였다.
2차 예선의 경우에는 전략적으로 하위권에 가야했으니 1위를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기도 했고.
"우와, 여동생은 정말 행복하겠네요. 그 동생에게 한 마디 하시겠어요?"
"음…. 선영아, 돌아갈 때 오빠가 선물 많이 사갈게! 응원 고마워."
"후훗! 정말 좋은 오빠네요. 예, 감사합니다. 이성현 선수. 2차 예선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아, 잠시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예?"
"조금 있다가 복싱 웰터급 32강전 심형석 선수의 경기가 있거든요.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 경기도 관심 있게 지켜봐주셨으면 해요."
"아…!"
리포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런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복싱의 예선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건 SBC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졸지에 다른 방송사 광고를 해준 셈이었으니 리포터가 당황한 건 당연했다.
반면 복싱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NTBC쪽은 부산해졌다.
"야, 이거 10시 스포츠 뉴스로 내보내지 말고 편집해서 지금 바로 올림픽 중계센터에 전달해!"
NTBC는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SBC쪽 작가는 배가 아픈 듯 오만상을 찌푸린다.
"잠깐 오디오 내려 봐. …이성현 선수. 다음부턴 되도록 수영 얘기만 해주세요. 지금은 수영 경기를 한 거잖아요."
그러자 줄곧 잠자코 있던 KBC쪽 작가가 냉소한다.
"선수에게 그게 무슨 되도 않는 소리입니까? 지금 뭐 검열이라도 하십니까?"
"신경 끄시죠?"
"풉!"
신사협정을 맺고 종목을 나눠먹긴 했으나 근본적인 신경전은 어디 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세 방송사는 서로를 견제하며 내 인터뷰 분량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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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경기가 펼쳐지는 아쿼틱스 센터를 나온 나는 복싱 경기가 펼쳐지는 엑셀런던으로 가려 했으나, 거리가 상당했다.
차를 타고 가지 않으면 족히 2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자니 선수촌에 다시 돌아갔다가 가야 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니 관광객들이 사용하는 올림픽 셔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관광객들은 비용을 주고 사용을 하지만, 선수들은 선수단증만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 시청 쪽으로 가는 게…. 이거다."
나는 좌석에 앉아 멍하니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때였다.
"출발하려나 봐, 빨리 타야 돼요!"
"어휴, 이 버스가 맞긴 한 거야? 성렬아! 빨리 와!"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난입해 들어온 남자 둘과 카메라맨 하나.
그 중 하나는 나도 낯이 익었다.
김광수라는 장신의 남자였다.
"어…!?"
그 또한 내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너 저기… 성현이 맞지? 그때 그 돌잔치에서…."
"예,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광수 형."
그는 예전 김준우 형이 돌잔치에 데려온 연예인 동생이었다. 당시엔 비교적 무명의 배우였으나 현재는 예능인으로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가 출연중인 '클링맨'은 일요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고수중인 굴지의 예능이었다.
"야, 광수야. 뭘 그러고 있냐."
"아뇨, 현재 형.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요!"
"뭐?"
그러자 안경을 쓴 남자. 국내에선 국민 MC라 불리는 유현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누구신데?"
"예전에 저기 준우 형 따라 돌잔치 간 적 있는데. 거기서 안 사람이에요. 올림픽 선수에요!"
"아 그래!?"
유현재는 눈을 빛내더니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근처에 앉는다.
그들도 바쁘게 촬영 중이었는지 조금 전 내가 치른 경기에 대해선 알고 있지 못한 듯 했다.
버스에 승객이 많지 않은 걸 확인한 유현재는 지나가는 식의 토크쇼라도 할 생각인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이야, 여기서 우리 선수를 만나게 되네요. 안녕하세요."
"하하,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수영과 복싱에 출전하고 있습니다."
"수영이랑 복싱이요? 어…. 트라이애슬론처럼 두 종목을 동시에 하는 종목이 있었나…?"
"지금 촬영 중이신 거죠?"
"아, 예. 클링맨이라고. 들어는 보셨나요? 포기하지 말고 매달려라!"
"당연히 알죠."
"지금은 그 미션중이거든요. 런던 경기장 곳곳에 숨겨진 이름표를 떼고 있어요."
"어…. 그럼 아쿼틱스 센터는 안 가보셔도 되는 거예요? 저기 바로 앞에 있는 건데."
"엥? 저게 아쿼틱스 센터였어요!? 아니, 광수야! 저게 아쿼틱스 센터 맞다잖아! 어이구, 내가 너 때문에 진짜!"
그때 김광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곧 연결이 됐는지 호들갑을 떤다.
"준우 형! 형 어디예요? 양궁 경기장? 어휴, 너무 멀다! 아니요, 형! 지금 성현이 만났어요! 형이 진짜 아낀다는 동생!"
"야, 야! 광수야! 녹화 중에 그게 지금 무슨 짓이야. 전화 끊어."
유현재는 강제로 김광수의 휴대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내게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이성현 선수는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시는 거죠?"
"런던 시청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 바로 옆에 엑셀런던이라고 복싱 경기장이 있거든요. 그 외에 펜싱이랑 레슬링, 태권도 같은 경기도 하는 곳이에요."
"어…. 저기, 성렬아. 엑셀런던에도 이름표 갔다 놨어?"
그러자 성렬이라 불린 카메라맨이 고개를 끄덕인다.
유현재는 마침 잘됐다며 같이 가자 제안을 했다. 그렇게 엑셀런던으로 가기까지 여러 대화가 오고갔다.
"그럼 고등학생인 건가요!? 심지어 수영이랑 복싱도 같이 나가고요? 우와…. 진짜 대단하네요."
"올림픽 전체로 보면 미성년 선수들은 저 말고도 많이 있는 걸요 뭘."
"그래도 그렇죠. 우와…."
그렇게 엑셀런던에 도착하고 난 순간이었다. 카메라맨 성렬이 말한다.
"현재 형이랑 광수 둘 다 아웃이래요!"
"뭐? 벌써 우리 이름표를 찾았대? 나 참."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유현재는 마침 잘 됐다며 말한다.
"작가들한테 얘기해줘. 우린 여기서 조금 쉬다가 간다고."
"카메라 끊을까요?"
"아냐, 그럴 필욘 없어."
유현재와 김광수는 아침부터 시작된 추격전에 지쳤는지 멍하니 나와 함께 관중석에 앉았다.
그때 마침 형석이 녀석이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어? 우리나라 선수 경기네? 이성현 선수. 혹시 저 선수를 아시나요?"
"예, 제 고등학교 동기입니다. 심형석이라고 웰터급 선수에요."
"우워.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광수야! 알짱거리지 말고 너도 여기 앉아. 구경이나 하고 가자."
카메라가 있었던 탓에 구경이라기 보단 중계 같은 느낌이 됐다.
링 쪽을 보니 형석이는 불안한 듯 '후! 하! 후! 하!'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동기라면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요?"
"알고 지낸 건 초등학교 3학년부터입니다."
나는 중3 이전의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형석이가 가끔씩 말하는 걸 들으면 그때부터 친했었던 것 같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풀죽어 있는 성현을 반장이자 친구로서 이끌어 줬다고. 성현이 복싱에 입문하게 된 것도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형석이 본인이 다니던 체육관에 데려간 게 계기였다고 한다.
"정말 긴 인연이네요. 우정이 남다르겠어요."
"그렇긴 하죠…. 심형석 파이팅!"
내가 소리를 치자 녀석은 고개를 돌리더니 씨익 웃으며 내게 주먹을 뻗어보였다.
녀석의 상대는 아프리카 니제르 출신의 무스타파 히마라는 선수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상대는 긴 리치를 활용하여 빠른 견제를 퍼부었다.
형석이는 처음 상대해보는 흑인 복서가 낯설었는지 경기 초반을 끌려가고 만다.
"상대 선수가 진짜 빠르네요!"
"어우 씨! 주먹이 안보여!"
"이성현 선수! 이럴 땐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걸까요!?"
호들갑을 떠는 둘. 나도 조마조마하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잽을 이용한 상대의 견제가 생각 이상으로 무섭긴 하지만 아직은 흔들리지 않고 게임 플랜대로 진행하고 있어요."
"게임 플랜이요? 어떤 플랜이죠?"
"보시면 압니다."
형석이는 상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바쁘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틈을 보며 접근. 거기서 난타전을 벌였으나 그 일련의 흐름은 노골적으로 상대에게 있었다.
형석이는 주먹을 제대로 내지 못하며 가드하기 바빴다.
팡! 복부에 꽂힌 상대의 펀치에 리듬을 잃은 형석이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해 들어왔다.
일단 다운을 뺏어내기만 하면 승기가 크게 기울기 때문이다.
"어어! 위험해!"
"안 돼!"
비명을 지르는 유현재와 김광수.
그러나 그때였다.
핑! 뱀이 움직이는 것 같은 레프트 훅. 그 펀치는 엇박으로 들어가며 상대 타이밍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갔다.
그 훅을 턱에 정타로 맞은 무스타파 히마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운!"
"우오오오오오!!"
포효하는 형석이. 유현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상대가 들어오게 유도한 뒤에 레프트 카운터를 먹인 거예요. 제대로 들어갔네요."
형석이 녀석의 연기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건 상대에게 형석이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먹힌 거긴 하지만.
그렇게 1라운드에 다운을 뺏은 뒤부터는 경기 운영이 훨씬 쉬워졌다.
대놓고 독사 작전을 펼쳐도 상대 입장에선 덤벼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형석이는 클린치를 적절히 섞어가며 상대의 조급함을 유도. 마침내 3라운드에 다시 한 번 다운을 뺏으며 승기를 굳혔다.
"휴우…."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형석이 녀석의 경기는 정말이지 매번 가슴을 졸인다.
이건 유현재와 김광수도 마찬가지인지 둘은 흥분하여 재잘거린다.
"우와, 복싱이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우리나라 선수 경기라 그런가?"
"성렬아, 이거 카메라에 담았지? 올림픽 중계 팀한테 이거 촬영 분으로 써도 되냐고 물어봐."
그려면서 유현재는 나에게도 말한다.
"이성현 선수, 지금 촬영 분을 다음 주 일요일에 방영을 할 거거든요? 이성현 선수의 출연 분량을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클링맨이라면 선영이와 주은이도 시청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내가 여기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무척 좋아할 것 같았다.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하고 있을게요! 힘내십시오, 이성현 선수!"
김광수도 다음에 김준우와 함께 보자며 눈짓을 하고는 떠나갔다.
나도 형석이의 승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선수 대기실에 가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