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34화. 잭팟(2) >
주요 복싱 기구 4단체 WBC, WBA, IBF, WBO.
이들이 통합하여 출범한 WCB는 자기들이 가져가는 PPV비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과거엔 선수들이 수백억 가량을 챙겨 갔었다면, 이제는 선수들이 챙길 수 있는 금액은 그 40%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수익은 전부 WCB가 챙겨간다.
이걸 노리고 4개 단체가 통합을 한 것이다.
선수들 입장에선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이 줄어들고 말았지만 WCB가 선수 연금, 복지, 비인기 선수들의 경기 기회 보장, 유동적인 스폰서 계약 체결을 약속했기에 복싱의 전반적인 질적 향상이 이뤄졌다.
복싱도 그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진정한 프로 스포츠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하여튼 이런 이유로 선수들의 평균적인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위 선수들은 돈을 쓸어 담았다.
600억을 벌 경기에서 이젠 200억을 번다고 할까.
게다가 PPV 비율이 줄어든 대신 첫 계약과 재계약 시 커다란 계약금을 받는 게 관례가 됐다.
이 계약금은 그 선수의 잠재적인 PPV가치를 기준으로 삼는데, 그렇기에 선수의 인기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내가 당면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계약금으로 얼마를 끌어낼 수 있는가….'
그 첫 번째 협상 테이블은 청와대에서의 만찬이 끝난 저녁에 이뤄졌다.
선수단 해단식을 끝낸 나는 미성년자라는 걸 이유로 들어 뒤풀이 회식 자리를 거절하고 CGS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로 향했다.
위치는 남산 부근의 허름한 3층 빌딩이었다.
"허…."
건물이 너무 오래돼 보여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때마침 도착한 임병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80년대에 구매했던 건물이니까, 건설은 아마 70년도 초반에 했을 걸?"
"그래도 주변 부지가 휑해서 좋네요."
"그렇지, 여긴 상가를 짓기엔 입지가 별로니까. 우리에겐 오히려 호재가 됐어. 나중에 주변 땅을 매입하면 으리으리한 사옥을 새로 지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병식의 뒤에는 이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얌전히 서있었다. 내가 시선을 주자 악수를 청한다.
"이번에 CGS의 에이전트로 부임했습니다. 한석호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길성 법무팀에서 해외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눈빛에서부터 야망이 보이는 인물이었다. 사전에 병식 아저씨가 얘기하길 내 아래에서 커리어를 쌓아 개인 에이전시를 차리는 게 꿈이라고 한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협상 전략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사옥 안은 트로트 할아버지들이 종종 이용을 하는지 바둑판이나 난로 같은 것들이 보였고, 트로트 제작을 위한 콩알만 한 작업실이 있었다.
적당히 테이블을 치우고 서류를 살펴보며 얘기를 나눴다.
나는 한석호에게 한 가지를 확실히 했다.
"겸직, 겸업의 무제한 허용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부분을 계약서에 넣어주세요."
"흠…. 알겠습니다. 복싱의 경우엔 경기 텀이 길어서 선수들이 그사이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상대측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물론 초장부터 그 얘길 꺼내진 않겠지만요."
"계약금은 어느 정도로 부르실 거죠?"
"일단 크게 지를 겁니다. 아무래도 협상 첫날이니까요. 절 믿고 지켜봐주십시오."
2시간 정도 후에 WCB의 스카우트 담당자가 통역사, 그리고 협상을 위한 프런트 직원 둘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리! 반갑네, 금메달 축하해."
"반갑습니다."
"그레이엄 포터라고 하네. 몇 년 전 세미나에선 얘기만 하고 통성명은 하지 않았었지?"
"그때 그분이시군요."
이에 한석호가 입술을 다셨다. 그레이엄 포터란 남자가 WCB내에서 총 3명밖에 없다는 수석 스카우트였기 때문이다.
한석호도 프런트 직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에 5분 정도 한국의 날씨가 어떠느니 하는 잡담이 이어졌다.
이후에 다들 눈빛을 바꾸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프런트 직원은 서류를 한 다발 내밀며 선제시를 해왔다.
그러나 한석호는 굳이 그걸 받아들지 않았다.
"계약서는 이 자리에서 같이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생각하고 계신 게 있는 것 같군요."
"예, 골조는 간단합니다. 계약금 2500만 달러에 15경기 계약을 원합니다."
우리 돈으로 대략 300억. 상대측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2500만? 장난칩니까?"
"장난이 아닙니다. 크레이그 켐벨이 올림픽 이전에 있던 세계 선수권 우승 이후 제시받았던 금액이 약 2000만 달러로 알고 있습니다. 그 켐벨을 꺾은 우리 이성현 선수가 그보다 더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켐벨은 자국 선수인 점 외에도 여러 가지 스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약 기간 내의 예상 PPV 수익을 감안하여 그에 상응하는 계약금을 제시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성현은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죠? 우리 이성현 선수가 스타성이 없다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요…."
"이성현 선수는 대한민국의 강렬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계약을 하기만 해도 한국 시장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거죠. 지난번에 중국 선수를 700만 달러의 계약금을 주고 영입을 한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닙니까?"
상대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럼 반대로 말하죠. 한국 시장이 뭐 대수입니까?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서도 700만 달러밖에 쓰지 않았는데, 한국 시장을 먹겠다고 2500만 달러? 어림도 없습니다."
본래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금액이 나올 경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는 그럴 기미가 없었다.
이게 우리가 가진 이점이었다.
한석호도 입 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듣기로 크레이그 켐벨 측이 우리의 계약이 먼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하던데요."
"…!"
이건 켐벨의 에이전트가 고의적으로 우리에게 흘린 정보였다.
그쪽 에이전트도 켐벨의 고집을 말리지 못했던 모양인지 우리에게 소스를 흘려 어서 계약을 끝내게끔 한 것이다.
켐벨 그놈의 우려도 이해는 간다.
복싱 선수들이라고 전부 프로 계약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인 채로 커리어를 끝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게다가 설령 내가 프로로 간다고 해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매치가 성사되기 어렵다.
그걸 감안해서 나와 계약을 맺어놓으라고 WCB에 강하게 요구를 한 것이다.
"우리와 계약이 늦어지거나 파토가 나면 곤란해지는 쪽은 그쪽일 텐데요."
"…그래서 뭐, 협박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그렇다 해도 WCB측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면 안 된다. 폭탄을 해체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서로 좋게, 좋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신들은 계약을 빨리 하고 싶고, 우리는 빨리 하는 만큼 제대로 된 보장을 받고 싶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1000만 달러."
"안됩니다. 적어도 켐벨보다 1달러라도 더 받고 싶습니다. 2000만 1달러!"
"어이가 없군. 1300만! 이 이상은 안 돼!"
"2000만 1달러!"
기세를 잡아 강하게 나가는 한석호.
그렇게 무려 3시간에 달하는 입씨름 이후 1725만 1달러라는 금액이 책정된다.
이는 당장 켐벨과 협상중인 1725만 달러보다 1달러가 큰 금액이었다.
물론 켐벨의 협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니 그놈보다 많이 받을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어쨌든 이게 최대치인 것 같았다.
이후엔 계약 경기와 PPV 분배 비율에 대한 협상이 이뤄졌다.
"그 전에. 겸직과 겸업에 대한 무제한 허가 조항을 넣도록 합시다."
"무슨 일을 할 생각입니까?"
"그냥 여러 가지 개인 사업이죠. 현재 이성현 선수는 여러 분야에서 러브 콜을 받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조건에 상대는 어깨를 으쓱할 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복싱 선수들의 겸직, 겸업은 비일비재하다. 파퀴아오가 국회의원이 된 것이 대표적인 예고, 그 외에도 와인 사업을 한다든가,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어차피 계약의 가장 위에 매 경기 준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우선 조항이 있으니 별 문제 삼지 않는 모양이다.
이후엔 경기에 대한 세부 협상이다.
"PPV비율은 다른 신인 기준과 똑같이 할 겁니다."
"만약 한국에서 경기를 한다면 그 경기만큼은 비율을 10%증가 시켜주십시오."
"…5%증가로 합시다."
사소한 것 하나 정도는 양보를 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한석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계약 경기 중에 합당한 순위가 된다면 타이틀 매치를 잡아줄 것."
"그건 때에 따라 달라요. 타이틀 매치를 기다리는 선수가 워낙 많으니까. 그것보단 계약 경기 도중 상황이 합당하다면 크레이그 켐벨과 경기를 치룰 것."
"으음…."
이걸 거절하면 1725만 달러를 받아낼 수가 없었다.
한석호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 대신."
"대신?"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 안에 헤비급 랭킹 1~5위 선수와의 매치를 잡아줬으면 합니다."
"탑5? 그건 너무 나갔지. 만약 첫 경기를 이기면 6~9위 선수와 매치를 잡는 걸로 합시다."
"…좋습니다."
처음 두 경기를 이기면 곧장 탑10에 진입해 상위권을 노릴 수 있다.
이거면 충분히 조건을 보장받은 것이었다.
"후우!"
계약서 작성이 끝나자 WCB 사람들이 한숨을 흘렸다.
얌전히 지켜보던 그레이엄 포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수들이 따로 없군, 우리가 빨리 계약을 끝내고 싶게끔 일부러 에어컨도 제대로 안 나오는 곳에서 협상을 하다니. 평소였다면 바로 박차고 나갔을 텐데 말이야."
"에어컨은 그냥 고장 난 겁니다."
"그랬던 건가? 난 또 협상 전략인줄 알았지. 뭐, 어쨌든 계약을 마무리해서 기쁘군. 당장은 우리가 손해를 보는 듯한 협상이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어. 이 계약이 헐값이었다는 걸 네가 증명해줄 거라고 말이야."
"제대로 보신 겁니다. 오늘은 고마웠습니다."
이런 큰 계약 협상이 첫날에 끝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남기다니.
'이것도 켐벨 그놈 덕이네. 은근히 복덩이라니까.'
최종 계약금 1725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0억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물론 여기서 회사에 지불하는 에이전시 비용이고 세금이고 뭐고 다 제하면 내게 들어오는 금액은 기껏해야 100억 정도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잭팟이 터진 거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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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끝난 계약.
WCB측에선 내가 만 19세가 되는 3월에 첫 경기를 잡을 거라 통보해왔다.
'3월에 경기를 치루고…. 4월에 바로 올 아메리칸 게임에 출전하면 되겠네.'
이후 6월 28일엔 NBA 드래프트다.
아마 WCB측에선 반발을 하겠지만 겸직, 겸업을 무제한으로 허가해줬기에 계약상으론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내 PPV 가치가 올라간다고 기뻐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으니 이젠 다음 3월까지 느긋하게 벌크 업을 하면서 몸을 만들면 된다.
그때까지 시간이 꽤 여유로웠기에 방송가 일을 처리해놓기로 했다.
효율이 가장 높은 CF계약을 우선적으로 잡고, 예능은 최대 3개까지만 출연하기로 했다. 너무 많이 출연하면 내외적으로 안 좋은 소리가 나올 테니까.
출연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선 형석이 녀석과 상의를 하기로 했다.
그러던 8월 16일, 광복절의 다음날이자 길성고의 개학일이었다.
"끄으으…!"
올림픽이 끝난 피로인지 몸이 노곤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선수촌 숙소보다도 좁은 원룸. 교복이 여기 있었기에 어젯밤에 혼자 돌아와 있었다.
교복이야 병식 아저씨에게 요구하면 금방 준비를 해줬겠지만 이 원룸은 도보 등교가 편하다는 큰 이점이 있었다.
철컥! 아침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자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어이쿠, 집을 생각 없이 너무 오래 비우긴 했네. 미리 다 버려놓을걸."
냉장고를 정리하여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등교를 한 게 아침 7시 30분.
아침을 먹고 나오지 못한 탓에 배가 고파져서 학교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다른 학생들도 간식을 사려는지 편의점에 길성고 교복을 입은 애들이 두세 명 정도 있었다.
나는 적당히 두유를 하나 골라 계산대에 놓았다.
그러나 편의점 여성 점원은 바코드를 찍지 않았다. 내 얼굴과 명찰을 번갈아 보고는 눈을 부릅뜬다.
"너, 너 이성현 맞지!?"
"…예?"
"나 엄청 응원했거든! 나, 저기 사인 하나만 해줄 수 있어?"
"일단 계산을 좀…."
"아, 이건 서비스로 그냥 줄게! 올림픽 수고했다는 의미로!"
"그래도 되나요?"
"내 알바비에서 차감하지 뭐!"
휴대폰을 꺼내 얼굴을 붙이고 셀카를 찍는 점원.
편의점에 있던 길성고 학생들도 바쁘게 소곤거리더니 편의점 알바에게 편승하여 사진을 요구한다.
경기장이나 공항에서의 사인 공세 같은 건 일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만 이런 일상 속에서 팬 서비스를 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이건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리겠네.'
이미 지금의 인지도는 전생의 나를 훌쩍 뛰어넘어 있었기에 나로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학교 교문 쪽으로 들어서자 동물원에 온 사자라도 된 마냥 다들 날 구경하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그중엔 주은이도 있었다.
"…대박."
주은이도 기가 막히다는 듯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꺄아아아!"
기성을 내지르며 갑자기 달려와 나를 껴안는 여자애.
너무 갑작스러웠던지라 순간 라이트 카운터를 쳐버릴 뻔했다.
여자애는 1초간 나를 꼭 껴안더니 후다닥 친구들 사이로 도망갔다.
그 친구들은 좋아라 비명을 질렀고, 다른 학생들도 조롱 섞인 환성을 지른다.
주은이는 충격을 받은 것 마냥 굳어버렸다.
"아, 아니야!"
나도 모르게 주은이를 향해 모르는 사람이라 어필을 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 방향으로 쏠렸다.
다행히 그 방향엔 주은이 외에도 사람이 많았기에 눈치를 챈 사람은 없었지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네.'
서둘러 교실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사정은 교실도 마찬가지.
체육계 학생들도 나를 구경하러 몰려든 상태였다.
심지어 교사까지 찾아왔다.
"얌마들아! 교실로 돌아가! 성현아,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니? 부탁할 게 있다."
그는 수영 교사 겸 코치였다.
"오늘 점심시간에 교내 수영장에서 한 번 헤엄쳐 줄 수 있나 해서. 이번에 수영장 리뉴얼 한 건 알지? 그래서 홍보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려고 하는데, 네가 헤엄친다고 하면 애들이 구경하러 관중석에 몰릴 테니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거든. 도와줄 수 있겠어?"
"예, 뭐. 어렵지 않습니다."
"고맙다! 그럼 3교시가 끝나면 교무실로 와라."
차라리 한번 크게 주목을 받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때 형석이가 인파를 헤치고 교실에 들어온다.
"우와… 엄청나네 진짜."
녀석도 못지않은 주목을 받았는지 피곤한 기색이다.
"우리 학교가 이렇게 시끄러운 학교인지 처음 알았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보다 형석이 너, 클링맨 출연은 생각해봤어?"
"생각은 해봤는데, 정말 괜찮을까? 첫 예능으로 나가기엔 너무 큰 예능인 것 같은데."
"왜 또 쫄았어. 너 나중에 연예인 하고 싶다며,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이거랑 아이돌 올림픽 대전. 2개 정도만 같이 나가자."
이 말을 또 어떻게 훔쳐들었는지 '이성현이랑 심형석 클링맨 나간데!'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은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개학일이라 그런지 수업 자체는 별 내용이 없었기에 아까부터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살펴보기로 했다.
채팅 앱에는 온갖 이모티콘과 함께 주은이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자기한테 안긴 애 누구야? 아는 애야?》
《그리고 점심에 수영한다고 하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수업 중이잖아 메시지 그만 보내.
《어차피 수업 안함.》
─수영은 그쪽 코치님이 요청해서 보여주기로 했어. 안긴 애는 얼핏 알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빼빼로 준 애 같아.
《어이없다. 거기서 그러면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할 거 아니야. 이 씨, 나도 할 걸.》
─주은이 네가 하면 나도 꼭 안아줄게.
《진짜 할 거야. 방에서 찐득하게.》
─헉.
《근데 수영 할 때 상의는 벗는 거야? 래쉬가드 입으면 안 돼?》
─실내에서 무슨 래쉬가드야.
그러자 주은이는 입술 모양의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다. 계속 보냈다.
키스를 하고 싶다는 의미지만…. 주은이의 일이니 키스와 함께 키스마크를 남기고 싶다는 뜻일 테다.
나는 거부 표시의 이모티콘으로 응수.
그렇게 크게 바뀌어버린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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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의 첫 번째 예능 나들이는 NTBC의 아이돌 올림픽 대전이었다.
아이돌들이 선수로 출전을 하고,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일일 코치 겸, 용병으로 출전을 하는 기획이다.
섭외를 받은 선수들의 숫자는 80명. 이들 중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만 30명이었다.
이번 촬영은 9월 말에 있을 추석 3일간 방영이 될 예정이었기에 방송사에서도 크게 힘을 준 것이다.
"자, 오프닝 리허설 들어갈게요! 다들 집중해주세요!"
아이돌과 선수들, 그리고 촬영 스텝과 기타 관계자를 포함해 무려 500명이 동원된 촬영이었기에 현장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일단 팀 선정을 하고 선수 분들이 코치가 돼줄 종목을 맡을 거거든요! …어휴."
PD도 벅찬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이돌과 선수들이 균등하게 4개의 팀으로 나뉘었다.
청팀에 속한 성현은 수영 코치를 맡았다. 용병으로는 육상 100m달리기, 야구, 축구에서 뛰기로 했다.
여기서 야구와 축구가 핵심이었다.
PD는 이 인기 종목에 어떻게든 성현을 끼워 넣었다.
그 중 야구는 사실 이번 올림픽에서 퇴출이 된 종목이지만 국내에서는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종목인 만큼 당연하다는 듯 일정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도우미로서 프로 2군 선수들 몇몇과 독립 야구단 선수들이 와있었다.
"어휴, 진짜 꼴 보기 싫네."
"그래도 페이는 좋잖아."
"당연히 페이가 좋아야지. 우리가 한 경기 쉬고 들러리를 서주는데. 내가 보기에 구단 프런트가 방송국에 약점을 잡힌 거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냐고."
그들은 올림픽과는 관계도 없고, 인기 선수도 아니었기에 관심에서 소외돼 있었다.
이건 당연한 순리였으나 그들이 느끼기엔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들은 성현의 주위에만 맴돌고 있었다.
성현이 고등학생인 점도 주요했다.
나이가 어린 게 확실하니 반말을 하면서 친근하게 접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자 아이돌 멤버들은 물론이고 여자 아이돌들도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우리가 참자. 저거 어차피 거품이야. 복싱 그거 누가 알아 주냐? 우리가 1군에 가서 나중에 FA계약만 잘 맺으면 입장 역전이지 뭐."
"하긴, 쟨 지금 바짝 벌어놔야 하긴 하겠네."
"거지 종목이니까."
복싱에 대한 편협한 편견으로 가득 찬 둘.
그때 성현과는 다른 백팀에 가있던 형석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성현아! 너 이거 뭐야!?"
휴대폰 화면을 보이며 소리치는 형석. 성현도 그 화면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어? 발표는 오늘 밤에 한다고 그랬는데? 설마 미국 시간으로 말한 거였나?"
"뭐야, 그럼 내용 자체는 사실이야? WCB랑 200억짜리 계약을 맺었다는 게 진짜야!?"
"200억 짜리가 아니고, 계약금이 200억이라는 거야."
실제 계약 기간 동안 받을 수 있는 금액은 경기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애초에 계약금은 그 선수의 경기에 따른 PPV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의 기대치다.
그걸 보통 계약금의 5배로 보곤 한다.
이번 금액은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끌어낸 덕이긴 했지만 뭐가됐든, WCB는 성현이 계약된 15경기로 총 1억 달러 정도의 PPV 수익을 올릴 거라 예상한 것이다.
"계약금 200억…!?"
"노, 농담이지?"
이 얘기를 들은 야구 선수 둘은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어 기사를 확인했다.
그리곤 멍하니 성현을 바라본다.
이 시점에 국내 야구 FA 최고액은 5년 총액 120억.
성현은 계약금만으로 그 최고액을 훌쩍 넘어서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