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 38화. 스토리 메이킹(2) >
복부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앤서니 조슈아.
그는 카운트를 6까지 기다린 뒤 일어나 일그러진 표정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경기 재개 신호가 떨어졌지만 곧장 공이 울린다.
[1라운드 종료입니다! 이성현 선수의 완벽했던 프로 데뷔 1라운드! 좋습니다!]
성현의 경기는 국내에서 아침 6시 40분경에 지상파 중계를 시작했다.
그로 인해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TV를 켜놓고 라디오처럼 듣거나, 출근을 하면서 휴대폰이나 DMB 중계로 곁눈질 시청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상황인지라 중계진은 말로서 최대한 많은 것을 설명해야했다.
[여전히 빠르네요. 이성현 선수가 체급을 올리며 4kg을 증량했다고 했을 땐 혹여나 속도나 민첩성에 하락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예, 가히 천둥의 신이라 불릴만한 속도입니다. 상대 앤서니 조슈아는 이성현 선수의 속도를 전혀 따라잡지 못합니다. 이건 조슈아 선수의 체격이 크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도 분명 있습니다. 조슈아 선수가 프로로 오면서 여러 준비를 했다고 해요. 그 중 하나가 정도를 넘는 증량과 벌크 업이었습니다만, 제가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증량은 좋은 효과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순수 힘은 향상시킬 수 있을지언정 스피드는 물론이고, 가동 범위와 유연함을 잡아먹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허…! 그렇지만 이성현 선수는 스피드와 유연함을 유지한 채 오히려 펀치력이 향상된 느낌인데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걸까요?]
[그런 셈이죠. 지금의 펀치력 증가는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어요. 특히 글러브가 얇아진 게 좋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 글러브는 아마추어 글러브보다 2온스가 적다는 거군요. 큰 차이가 있나요?]
[이게 이성현 선수처럼 핀 포인트로 펀치를 찌르는 선수한텐 더 좋은 시너지를 냅니다. 지금 보세요. 조슈아 선수가 쓰러진 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바디 깊숙한 곳의 내장 신경까지 데미지가 전달된 거예요. 죽을 정도로 아파서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겁니다.]
[죽을 정도로 아프다? 프로 선수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의 아픔이라니 상상이 잘 안가네요. 프로 선수들은 정신력으로 고통을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차원을 넘어서는 아픔인 거예요. 이제 남성분들을 예로 들자면 소중한 급소를 맞으면 정신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아…! 그, 그걸 버틸 순 없죠. 어떤 터프한 사람이라도 아이처럼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를 겁니다.]
[그것과 비슷한 상황인 겁니다. 너무 아프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것도 그렇지만 조슈아는 굳이 다운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이긴다면 큰 거 한방을 먹여서 KO로 이길 테니 판정 점수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뭐가됐든 바디를 크게 당하고 있으니 불리해진 건 사실이었다. 바디를 의식하면 가드가 자기도 모르게 내려갈 테니까.
'저 자식…. 펀치가 생각 이상으로 매운데.'
2라운드에 들어가자 조슈아는 바디를 의식하며 플레이 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은 바디 샷으로 다운을 따낸 것을 바탕으로 2라운드 초반에도 바디를 집중 공략했다.
조슈아가 접근하여 펀치를 내자 타이밍을 절묘하게 뺏으며 측면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슈아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너무 빠르잖아!'
마음 같아선 오른 팔뚝으로 바디를 막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성현이 기민하게 타깃을 바꿔 턱을 후려칠 것 같았다.
그러니 이 바디는 당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흐읍!"
콱! 마치 칼로 배를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조슈아는 마우스피스를 악물며 통증을 버티고 있었지만 지독한 고통에 멘탈이 갈려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어!'
스윽! 조슈아는 무릎을 반쯤 굽힌 싯 다운 자세로 전환을 했다. 그리곤 상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몸의 타점을 낮춰 복부를 파고드는 움직임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특유의 높은 타점을 이용하지 못하게 됐지만, 그래도 수비는 더 튼튼해졌다.
'여기서부터 돌파구를 찾겠어.'
조슈아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밀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기술이 좋으면 뭐! 여긴 헤비급이라고!'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펀치 한 방에 가버릴 수 있는 곳.
조슈아는 그 한 방을 노리기 위해 몸을 웅크리기로 한 것이다.
이때 그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성현이 기존 조슈아의 수비를 은근히 까다롭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의 키가 더 크고 펀치 리치도 기니 정면에서 몰아치는 것보단 사이드로 돌아가면서 공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가 자세를 낮추고 주먹도 몸에 바짝 붙여버리자 그런 이점이 전부 사라졌다.
"…핫."
성현은 피식 웃고는 정면에 서서 조슈아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팡! 펀치 세례를 퍼부으며 가드를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는 펑! 펑! 틈틈이 바디 샷을 섞어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젠장!'
참지 못한 조슈아는 성현의 호흡이 부족해질 틈을 노려 가드를 풀고 반격에 나섰다.
그는 성현이 턱을 노릴 것을 알고 몸을 비틀어서 라이트를 시도했다. 각도를 좁혀 어떤 펀치든 왼 주먹으로 가드를 하겠다는 계산이다.
성현은 그 계산에 말려들지 않았다.
끼익! 우측으로 이동해 라이트 훅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더니 파파팡! 그가 올리고 있는 왼손 가드에 연달아 펀치를 먹였다.
이때 사선으로 몸을 틀고 있던 조슈아는 성현이 뒤통수 방향인 왼쪽으로 빠져나가버리자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성현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어디지!?'
어차피 뒤통수 타격은 반칙이다.
그렇담 그냥 거리를 벌렸거나 아래로 파고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아래다!'
어느새 그의 밑으로 파고들어온 성현은 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퍼라고 생각한 조슈아는 급히 왼손 가드를 턱 방어로 돌리고 오른손으로 카운터를 치려고 했다.
'걸린 건 네놈이야!'
그러나 그 순간.
핑! 엇박자로 날아온 라이트 훅이 그의 왼쪽 볼을 강타한다.
"으억…!?"
턱이 흔들린 조슈아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그 순간. 꽉! 성현은 이미 쥐고 있던 왼손으로 쓰러지고 있던 그의 안면을 찍었다.
쾅!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작렬하는 레프트 스트레이트.
쿵! 그의 거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링 바닥에 처박혔다.
우와아아아아──! 광란하는 관중들. 심판은 완전히 실신한 조슈아를 보곤 손을 휘저었다.
2라운드 2분 17초에 나온 실신 KO승리.
데뷔전을 완벽한 승리로 장식한 성현은 가볍게 세레모니를 펼치더니 돌연 관중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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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았던 승리.
'뭐, 이 정도의 상대는 간단히 이겨줘야지.'
실상 런던 올림픽 경기 때랑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실제로 3라운드 안쪽으로 끝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환호하는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가장 가까운 관객석이다.
사전에 WCB 측에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에서 승리하면 VIP석에 앉아있는 선수 중에 하나를 도발하도록.
이것도 전부 스토리 메이킹을 위해서였다. 오늘 내 경기는 헤비급 랭킹 6위, 8위, 9위가 관전을 올 거라고 했다.
둘 중 승리한 사람이 그 선수들을 도발해 자연스럽게 다음 경기 매치를 잡는 것이다.
WCB가 의도적으로 준비한 스토리 메이킹이었던 것.
'으음…. 누구로 하지?'
먼저 9위 선수 러시아의 비탈리 이블레프. WCB 전적은 9승 3패 6KO. 전형적인 동유럽 복싱 스타일의 선수다.
그는 내가 시선을 주자 슬쩍 시선을 피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신호다.
내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라고 판단한 걸 테다. 본래 인파이터들이 테크니션을 상대하는 걸 꺼려하니 당연하다.
'그러시다면야.'
나는 8위 선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미국의 클린트 미나야라는 이름의 히스패닉 선수다. 전적은 7승 1패 4KO. 헤비급에서도 몇 없는 테크니션으로 평가 받는 선수다.
그라면 내 도발을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또한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억지로 일행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이 내가 보고 있다고 눈치를 줘도 기어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죽어도 안 쳐다보네.'
나는 "클린트!"하고 이름까지 부르며 신호를 줬지만, 녀석은 클린트라는 이름의 다른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며 철저하게 외면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6위 선수를 찾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떠나있었다.
"어이쿠…."
뭔가 김이 식었다.
다들 나를 무서워하고 꺼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스토리 메이킹을 하려고 해도 상대가 엉덩이를 빼고 도망가면 그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가 먼저 도발을 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이러면 다음 매치는 WCB측에서 알아서 정해줄 것이다.
계약서에 1경기 승리 시 탑10 선수와 붙여줄 것을 명시했으니 별 걱정은 없었다.
"이성현! 이성현!"
"장하다!"
나는 응원을 와준 교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링을 빠져나와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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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경기를 펼치며 끝이 난 성현의 데뷔전.
이번 경기는 처음부터 성현의 승리가 점쳐지는 경기였다. 도박사들도 대부분 성현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단적인 예로 앤서니 조슈아의 스카우트 점수가 65점이었던 것에 반해 성현은 74점이었다.
켐벨을 꺾어낸 뒤 멘탈 점수에서 1점을 추가로 받으며 74점의 스카우트 점수로 WCB에 입성했다.
완벽에 가까운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성현을 조슈아가 극복하지 못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가벼운 KO승리. 이성현, 켐벨을 꺾은 게 우연이 아님을 입증하다!]
[클린 히트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승리! 신인 최초 기록.]
[조슈아 패배를 인정, "속도와 기술면에서 뒤떨어짐을 느꼈다. 보완해서 다시 시작할 것."]
[다음 상대는? 이성현 탑 10선수와의 매치 가능성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WCB 회장 멜슨 버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성현의 다음 상대 때문이었다.
성현이 까다롭고 막강한 복싱을 구사한다는 걸 경기에서 보여주자 상위권 선수들이 일제히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그들이 매치를 꺼려하는 건 당연했다.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심지어 이겨봤자 랭킹 권외 선수인지라 랭킹 포인트조차 얼마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라가기 바쁜 6~10위 선수는 결단코 매치를 거부했다.
그런 상황이니 타이틀 매치를 노리는 최상위권 선수들은 오죽할까.
"억지로라도 매치를 붙여야겠군."
다만 이러면 PPV 가치를 높이기 위한 스토리 메이킹이 힘들어진다는 맹점이 있다.
현재 성현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는 켐벨과 루치아노와의 악연.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켐벨은 세 체급 제패를 하기 위해 아직 하위 체급에 있는 상태.
루치아노 베레티니도 경험을 쌓으며 천천히 헤비급에 올라오겠다는 마인드인지라 아직은 스토리를 만들 수 없었다.
"그나마 클린트 미나야가 낫겠어. 테크니션 끼리의 자존심 싸움…. 조금 정도는 이야깃거리가 남을 지도 모르겠군."
그는 프런트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내선 전화를 들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돌연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
버드는 그 이름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화를 건 상대가 선수였기 때문이다.
WCB 회장인 그에게 직접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선수는 극히 한정돼 있었다.
버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다.
"리카르도? 무슨 일인가?"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부탁? 어휴, 사다트와의 타이틀 매치라면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 또 멕시코 선수 하나를 스카우트 해달라고? 자네가 저번에 추천한 선수가 5전만에 퇴출당한 걸 벌써 잊었나?"
그런 의미 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한 버드는 별 생각 없이 듣고 있었으나 이어지는 말에 그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제 경기를 펼친 한국인. 이성현의 다음 상대는 정해졌습니까?]
"아직 정해지지 않았네만. 왜 그러지?"
[그렇담 저를 붙여줘요.]
"…!?"
버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가 갑자기 왜?"
[그 녀석과는 자그마한 인연이 있습니다.]
버드는 눈을 번뜩 떴다.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괜찮나? 자네는 사다트와의 타이틀 매치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잖아. 갑자기 랭킹 권외의 신인 선수를 상대하겠다니?"
[랭킹 같은 건 상관없습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에요.]
"자존심?"
리카르도가 자존심을 운운하자 버드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첫 경기를 치른 신인 이성현에게 리카르도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리카르도는 투지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그놈은 결국 올라올 놈입니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 내 목을 위협하겠죠.]
"뭐…. 그렇긴 하지. 페이스대로라면 1년 후나 2년 후 정도가 되겠군. 그렇담 그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닌가?"
[멜슨, 이제 나도 늙었어요. 점점 녹슬어가고 있죠. 1년이나 2년 후에는 지금보다 분명 약해져 있을 겁니다.]
"…."
[그 순간의 나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1년 후의 경기에서 패배하고 '1년 전의 나였다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라며 패배를 합리화 하는 자기 자신을 말이에요. 그건 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가 되겠죠, 사다트 녀석에게 패한 것 이상으로요. 그러니 그나마 내가 아직 전성기에 있는 지금 그놈을 찍어눌러놓고 싶은 겁니다.]
"으음…!"
리카르도는 성현이 결국 최상위권으로 올라올 거라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경기를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이길 수 있을 때 이겨 놓자라는 거고, 좋게 포장하면 노장의 프라이드였다.
"…훗."
버드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좋아, 경기 날짜는 6월 중순이네만, 괜찮겠나?"
[언제든 좋습니다.]
"성립이네. 경기를 잡아주지."
WCB 창설 이전의 전적을 포함해 41전 38승 29KO. 멕시코 복싱의 대들보. 완성형 인파이터라 불리는 살아있는 전설.
현 헤비급 1위 리카르도 알멜다가 성현의 두 번째 상대로 정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