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 유어 페이스-90화 (90/250)

단두대 매치 (1)

7월은 여러 굵직한 일들로 빠르게 지나갔다.

7월 초에는 내년 결혼식을 위한 양가 상견례가 있었다.

나와 최종훈 부부, 주은이와 정명훈 부부가 마주하여 인사를 나눴다.

인사야 지난 약혼식 때 했었지만 그땐 여러모로 소란이 있었기에 이번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것이다.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최종훈과 정명훈은 사업 얘기로 불타올랐고, 임수영, 홍영숙 여사는 육아 얘기로 꽃을 피웠다.

이때 결혼식 날짜도 잡게 됐는데, 내 NBA 시즌이 끝나는 시점인 7월 5일로 가닥이 잡혔다.

정말로 결혼 날짜가 잡히자 주은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써부터 신혼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상견례가 끝난 뒤에는 훈련소에 입소할 준비를 했다.

여기선 딱히 큰일은 없었다.

내가 머리를 짧게 밀어 버린 걸 보고 지은이가 엉엉 울었던 것 정도.

그렇게 형석이와 함께 원주 쪽의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나는 한 달을 그곳에서 보내게 됐다.

난 잠시 쉬는 느낌으로 온 것이었지만 생각 외로 피곤했다.

같은 훈련소 동기들에게 사인을 해 주는 건 그렇다 쳐도, 훈련소 부근 자대 사람들까지 찾아와 사인을 받아 간 것이다.

그 탓에 사이사이의 휴식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고 할까.

신체적인 부분에서도 힘든 점이 많았다.

다른 동기들은 훈련이 힘들다 뭐다 앓는 소리를 냈지만, 내 경우엔 훈련이 너무 쉬워서 탈이었다.

그 훈련 외에 따로 개인 운동을 할 수가 없었기에 체중이 쭉쭉 빠졌던 것.

이걸 식사로 채워 줘야 했지만 군대 식사의 경우 맛도 없고, 건강한 느낌도 없었기에, 이참에 수영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높아져 있었던 기초 대사량을 다시 낮추기로 가닥을 잡았다.

그 탓인지 훈련소 4주 차가 될 즘에는 체중이 90kg으로 4kg이 빠져 있었다.

‘천천히 몸을 만들어야겠네. 시간은 넉넉하니….’

그렇게 훈련을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훈련소 바깥에선 기자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기자들의 환영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 달간 외부와 단절돼 있었던 만큼 소식이 궁금했으니까.

주로 클리퍼스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식으로 프런트코트를 꾸렸으려나.’

그런 내게 여러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사무국이 발표한 13-14 NBA의 일정이었다.

이 시즌의 개막전 경기 중 하나가 LA 레이커스와 LA 클리퍼스의 경기가 된 것이다.

최근의 두 구단 사이에 있었던 민감한 사건을 감안한 흥행 매치였다.

‘일이 재밌게 돌아갔네.’

레이커스가 혼란한 사이, 우리 클리퍼스는 어부지리를 취했다.

먼저 지니 버스에 의해 해고당한 미치 쿱착 단장을 이때다 하며 데려와 단장으로 선임했다.

쿱착은 레이커스의 황금기를 이끈 명단장. 능력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스털링 구단주, 스티븐스 감독과 면담을 나눈 쿱착은 곧장 행동에 나섰다.

워싱턴을 끌어들여 스티브 내쉬를 챙겨 온 것이다.

먼저 워싱턴 위자즈가 사인 앤 트레이드로 드와이트 하워드를 영입하고, 그 과정에서 스티브 내쉬도 같이 데려왔다.

다만 워싱턴은 내쉬까지 품을 만한 샐러리 캡이 되지도 않았고, 어차피 포인트 가드로 존 월이 있었기에 내쉬를 트레이드하게 된다.

사실 클리퍼스 프런트는 하워드까지 품어 볼 생각이었지만 하워드는 LA 생활에 싫증이 났다며 거부.

하여 새로운 센터를 찾아 돌아다닌 결과, 션 리빙스턴과 2016년도 드래프트 픽 한 개를 주고 보스턴의 노장을 주워 오게 된다.

바로 케빈 가넷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온 것이다.

이게 유일한 프런트코트 보강이었다.

이후에는 상황을 더 관망하고 있었다.

‘가넷이라….’

다재다능한 빅맨이라는 트렌드의 신호탄을 쏜 선수.

다만 그 가넷도 이제는 트렌드에 뒤처지고 말았다. 요즘 빅맨은 3점도 잘 쏴야 다재다능하다고 평가받지만, 가넷이 미드레인지 점퍼는 괜찮아도 3점에 재능이 있는 선수는 아니었으니까.

‘수비력 향상 측면에선 좋겠네.’

그 외에 어떤 좋은 영향을 줄지 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클리퍼스가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보강을 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FA로 풀렸던 안드레 이궈달라의 영입에 실패한 부분이다.

이궈달라는 결국 골든 스테이트로 이적. 여러 구단이 내가 아는 바와 다른 행보를 가고 있었지만, 골든 스테이트만큼은 내가 알던 그 스쿼드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이 농구 소식 외에 복싱 쪽에서도 연락이 있었다.

내 10월 경기 일정에 관한 것이었다.

***

8월엔 일과 훈련으로써 슈팅 연습만 소화하며 휴식을 취했다.

선영이와 주은이도 방학을 맞았기에 함께 여러 곳을 놀러 다니며 휴가를 즐겼다.

이건 선수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작년 올림픽부터 몸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었다.

이런 비시즌의 휴가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다.

괜히 축구에서 월드컵 시즌에 부상이 많이 나오겠는가.

비시즌을 충분히 쉬어 줘야 부상 위험도가 낮아진다.

이후 9월 중순부터 천천히 몸을 만들기 시작하여 복싱 경기가 있는 10월 27일을 목표로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돌입했다.

내 세 번째 상대는 헤비급 7위 클린트 미나야. 지난번에 내 도발을 애써 무시했던 그 선수다.

전적은 8승 1패 4KO. 그의 이 1패가 리카르도에게 당한 것이었으니, 이 선수와의 매치는 내가 리카르도에게 이긴 게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그렇다 해도 27일이라니.’

개막전 경기가 10월 29일이니 경기가 끝나고 2일 만에 경기가 있는 셈이었다.

WCB 측에서 은근히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까.

내게 겸업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직접 체험해 보라는 듯한 경기 일정이었다.

그렇게 복싱 경기 일정이 너무 뒤로 잡힌 탓에 10월 중순부터 팀에 합류하여 복싱과 농구 훈련을 병행할 생각이었지만, 스털링 구단주와 쿱착 단장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배려를 해 주었다.

난 어차피 신인이니 11월 중순이나 말부터 천천히 출전 시간을 늘려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신인들이 그렇게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 배려를 받아들인 나는 슈팅 연습 외에는 오로지 복싱 훈련에만 집중하여 마침내 10월 27일 경기에 접어들게 됐다.

***

성현과 클린트 미나야의 경기는 서로의 순위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다섯 번째 이벤트로 펼쳐진 이 경기에서 언론은 일제히 성현의 승리를 예상했다.

[리카르도를 제압한 이성현, 헤비급 서열 정리 들어간다. 첫 상대는 클린트 미나야.]

[테크니션을 상대로 첫선을 보인다! 팬들은 어떤 경기 보여 줄지 기대.]

[클린트 미나야, 인터뷰에서부터 신경전. “리카르도는 이미 하락세를 걷고 있던 선수, 이성현은 운 좋게 먼저 붙은 것뿐.”]

[이성현은 무덤덤, “하위 랭커들을 정리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

이 경기의 PPV 수익은 98억.

흥행 매치, 타이틀매치가 아니었음에도 상당한 수익이었다. 이는 성현에 대한 미국 팬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 펼쳐진 헤비급 2위와 7위 간의 대결.

성현은 라운드 초반부터 템포를 급격하게 올렸다.

인터뷰에선 지나가는 경기 중 하나라고 표현을 했지만 실제로는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리카르도와의 경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번 경기에서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끼익, 끽! 성현은 바쁘게 스텝을 움직이며 인파이팅과 아웃복싱을 자유자재로 전환.

상대 미나야의 리듬과 타이밍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미나야는 그 움직임에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뭐야, 이게…!’

변칙 속에 숨어 있는 정석.

얼핏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함정이 있었다.

팡, 팡! 바디와 훅을 때리며 접근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 움직이면 어느새 바깥으로 크게 빠져나가 있었고, 잽을 치며 바깥으로 나갔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파고들어 와 있다.

펑! 작렬하는 레프트 바디.

“크윽…!”

탕탕! 미나야의 세컨드가 외친다.

“놈의 스텝을 놓치지 마라! 핵심은 하체야!”

성현은 놀라운 하체 능력을 통해 발을 땅에 붙인 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상대 입장에선 신출귀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스텝만 보다간 큰코다친다.

성현은 미나야가 스텝을 보고 움직인다고 판단하자 페이크를 줘 요리를 했다.

이에 완전히 흔들린 미나야는 자기만의 리듬을 잃게 된다.

이건 예정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클린트 미나야의 경우에는 성현이 딱히 깨달음을 얻지 않았어도 6라운드 내로 요리할 수 있는 선수였다.

수비의 달인 리카르도조차 애를 먹은 성현의 이 스타일을 그가 감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1라운드 종료 19초가 남은 시점.

미나야의 타이밍을 완전히 손바닥 안에 둔 성현은 팡! 스트레이트로 클린히트를 먹인다.

“우욱…!?”

미나야는 비틀거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세웠다. 라운드 종료가 머지않았기에 조금만 버티면 다운을 당하지 않고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만다.

추격해 온 성현은 부웅! 미나야의 훅을 피하며 위빙한 뒤 팡! 그의 오른쪽 바디에 리버 블로를 먹였다. 그러곤 미나야가 클린치를 시도하려는 틈을 찔러 연타로 콤팩트한 라이트 어퍼를 먹였다.

콰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돌아가는 턱.

이 시점에 이미 미나야의 의식은 사라져 있었지만, 성현은 확인 사살을 위해 쓰러지는 그의 얼굴을 향해 레프트를 내리찍었다.

이제는 시그니처 펀치가 된 쵸핑 레프트.

쾅! 번개가 떨어지는 것 같은 타격음과 함께 미나야는 링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만다.

우오오! 탄성을 내지르는 관중.

심판은 곧장 손을 내저었다.

이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중계진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1라운드 실신 KO! 엄청납니다! 헤비급에서 나름 신성으로 취급받고 있는 클린트 미나야를 초살시켜 버렸습니다!]

[괜히 리카르도 알멜다를 꺾은 게 아니었어요! 리카르도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랭커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천둥이 내리치고, 또 한 명의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다음 제물이 될 선수는 과연 누구일까요!?]

관중은 이런 성현의 압도적인 승리에 환호를 하고 있었지만, WCB 프런트는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애초부터 챔피언 사다트와 1위 리카르도가 너무 압도적이었던 체급이었으니까. 여기에 성현이 더 추가돼 버렸다.

이렇게 압도적이면 다른 랭커들의 의욕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메이웨더처럼 적당히 받아 주면서 이기면 재도전을 할 생각이라도 들겠지만, 사다트, 리카르도, 성현은 상대를 압도해 순식간에 끝장내 버린다.

그러니 하위 선수들은 어차피 챔피언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아예 도전을 하지 않거나 체급을 내려 도망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해당 체급의 흥행력 하락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성현과 사다트의 매치를 급히 추진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성현의 거부로 일이 틀어져 버리게 됐다.

프런트 총책임자 놀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어쩐담….’

그러던 그때였다.

웅성이는 경기장.

성현이 관중석의 누군가와 아이 컨택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먼저 도발을 했는지 성현이 피식 웃으며 도발에 답례를 한다.

“퀵 실버 녀석은 그렇다 쳐도, 넌 내 안중에도 없는데?”

“곧 생각이 바뀔걸! 딱 기다리고 있어. 곧 그 목을 따러 올라갈 테니까.”

헤비급 선수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만한 경기를 펼친 성현에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는 남자.

현 라이트헤비급 3위, 루치아노 베레티니가 호전적인 웃음을 지으며 성현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