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 유어 페이스-145화 (145/250)

교류전 (2)

게스트는 나를 포함해 남자 넷, 여자 넷이었다.

첫 번째 촬영으로는 팀 선정을 위한 야외 수영장 촬영이었다.

나로선 억울했던 게, 수영 촬영이라고 하고 나를 불렀기에 당연히 진지한 수영 대결 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실상은 우스꽝스러운 게임이었다.

그걸 뒤늦게 알았던 당시의 나는 준비해 온 경기용 래시 가드를 입고 촬영에 임했다. 하의는 수영용 반바지를 덧입긴 했으나 상체는 딱 달라붙어 라인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현장의 반응은 당연히 호들갑스러웠다.

[이야…! 비율이 진짜!]

[와, 씨! 복근에 초콜릿 봐! 거기에 빨래 좀 하자, 성현아!]

[아, 좀. 진석이 형, 들어가 계세요. 광수야! 너도 나대지 좀 마라.]

다른 게스트들도 입을 둥그렇게 모은 채 바라보고 있다.

그 장면을 주은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다들 나를 추켜세워 주는 건 기쁘지만, 한편으론 독점욕이 샘솟은 모양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았으나….

이어진 게임은 수영장에 떠올라 있는 스티로폼 부표를 뛰어다니는 계주 경기였다.

그것도 남자가 여자를 안아 들고 뛰어야만 했다.

[저기, 성현이는 결혼식이 바로 내일인데, 이건 조금 아니지 않아요?]

준우 형의 말에 보고 있던 주은이가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PD도 납득을 했다.

[그럼 이성현 선수는 남자랑 짝을 하면 되겠네요.]

그러나 출연자 중 하나인 지진석이 딴지를 걸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다 귀한 몸 다치면 어쩌려고. 최대한 가벼운 사람이랑 하게 해 줘야지.]

이것도 맞는 말이었기에 결국엔 플로라의 멤버 중 하나인 로라와 짝이 됐다.

촬영의 흐름이 있기도 했고, 은근히 승부욕을 자극하는 상황이기도 했기에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그땐 나도 몰랐지만 지금 보니 상당히 낯부끄러운 상황이 많았다.

부표를 뛰다가 미끄러져서 동반 입수를 하는 장면에선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장면에 주은이는 눈을 부릅떴다.

“…앗! 가솔이 잘 들어갔냐고 메시지를 보냈네!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그러나 주은이가 팔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움직이지 못했다.

간단히 뿌리칠 수 있는 힘이었지만, 왜인지 천근만근 팔이 무거웠다.

그러던 중, 화룡점정 같은 장면이 나왔다.

플로라의 멤버인 리라, 김승아를 내가 수영해 가서 구출하는 것이었다.

3점이 걸린 게임이기도 했고, 상대인 남자 게스트가 수영 선수 출신이었던지라 나도 진지하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김승아를 안은 채 수영을 해 돌아와 3점을 얻어 내며 게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영광의 상처는 작지 않았다.

삑! 주은이는 더 이상 못 보겠는지 TV를 꺼 버렸다.

“요즘 예능은 별걸 다 하네.”

“그, 그렇지. 초능력 농구라니 생각도 못 했다니까?”

“그거 말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옙.”

“…자기, 촬영하기 전에 대본 안 봤지.”

“응.”

“진짜루! 그러면 어떡해. 방송국에서 자기 뜯어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여유가 생겼는지 딱히 질투심을 불태우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만 화는 조금 난 모양인지 제압을 하는 것처럼 내 양 손바닥을 맞잡은 채 내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고혹스럽게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 * *

꿈만 같았던 신혼여행이 끝나고.

프랑스 공항에서 주은이를 배웅한 나는 곧장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 이미 우리 크루의 멤버들이 도착해 있었다.

국내 웰터급 챔피언인 형석이와 아마추어 헤비급 1위 강혁이. 스카우트들이 최근에 뽑은 국내 페더급 챔피언 배민식. 마지막으로 WCB 입성을 앞둔 플라이급 이노우에 나오야까지.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여덟 명에 달하는 스태프들까지 포함하면 어엿한 중형 크루처럼 보였다.

“어, 이제 왔냐?”

임시로 임대한 체육관에서 몸을 풀고 있던 형석이가 나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야, 너 씨…. 몰골이 그게 뭐야.”

“몰골이 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여, 인마. 역시 신혼여행이라 그거냐.”

“어, 어흠! 몸 상태는 괜찮으니까 걱정 마. 너야말로 시차 적응은 됐어?”

“컨디션이 좋진 않은데…. 지금은 감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괜찮아.”

이후 나오야와 인사를 나누었다.

나오야는 나보다 2주 앞선 8월 중순에 WCB 데뷔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WCB 월드 투어로 일본에서 개최되는 이벤트였다.

자국에서 개최되는 경기에다 데뷔전인 만큼 그 각오가 남달랐다. 감량도 힘들게 하고 있는지 무척 예민해 보였다.

어쨌든 우리는 루치아노가 속한 크루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가 속한 크루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복싱팀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세계 챔피언을 배출한 곳이었다.

이탈리아 자체가 복싱 강국이기도 해서, 프로에서부터 아마추어까지 폭넓은 선수층을 가지고 있었다.

“어서 와라. 오랜만이군.”

수석 코치 그로소였다.

루치아노를 발굴하여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온 게 그였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엔 적개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선수의 올림픽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까.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실력은 인정을 하는 모양인지 이번 스파링을 추진한 것이 바로 그라고 한다.

“충분히 몸을 풀어. 우리는 이미 준비됐으니까.”

체육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12명 정도의 선수들이 보였다. 체구를 보면 중량급이 아홉 명으로 가장 많았고, 세 명 정도가 경량급으로 보였다.

프로 선수는 여섯, 아마추어 선수도 여섯이었는데, 프로 중에 WCB에 입성한 선수는 셋이었다.

그중에 루치아노 베레티니가 있었다.

팡! 팡! 링에 올라가 미트를 때리고 있던 녀석은 내가 나타나자 꽈득! 마우스피스를 악물고는 미트를 치는 속도를 높였다.

이에 형석이가 입맛을 다셨다.

“우워, 눈빛 봐라. 성현이 너, 정말 괜찮겠냐? 꼬라지를 보니까 스파링이라곤 해도 진심으로 덤빌 것 같은데.”

“오히려 좋아. 나도 실전에 가까운 스파링이 필요한 참이었으니까.”

웜업을 하는 선수들.

가장 먼저 스파링을 시작한 건 형석이였다.

상대 쪽에 라이트급~웰터급 선수들이 많았기에 스파링을 여러 번 하기로 한 것이다.

첫 번째 상대는 안토니오 카렐라라는 아마추어 선수였다.

유럽 선수권을 노리는 젊은 선수로, 그는 형석이가 런던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라는 얘기를 듣고는 은근히 긴장을 하는 듯했다.

경기 결과는 형석이의 완승이었다.

형석이는 주도적으로 상대를 몰아치며 조급함을 유도한 뒤, 파고들어 오는 상대에게 카운터를 먹이며 점수를 따냈다.

헤드기어 때문에 다운이 나오진 않았으나 시종일관 형석이가 주도를 했다.

‘많이 성장했네.’

예전에는 상대가 들어와 주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카운터 펀처 유형이었다면, 이제는 본인이 주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WCB에 들어갈 수준이냐고 하면 그건 아직이었다.

웰터급이 유독 험난한 동네이기도 하고 말이다.

형석이는 그걸 시험해 보기 위해 WCB 입성을 앞둔 로렌조 그리포와 스파링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로렌조도 형석이의 실력을 보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다음!”

다음 스파링은 강혁이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노리는 강혁이도 기세가 남달랐다.

상대는 지오반니라는 이름의 같은 체급 선수로, 유럽 선수권에 나가는 실력자였다.

“후욱! 후욱!”

강혁이는 묵직한 상체 리듬으로 펀치 주도권을 쥐려 했으나 상대의 터프함이 한 수 위였다.

팡! 상대는 어깨를 붙여 강혁이의 상체 움직임을 차단한 뒤, 몸을 비틀며 유효타를 먹였다.

소위 말하는 더티 복싱을 구사한 것이다.

그걸 통해 상대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자기 페이스로 가져오려 했다.

“어이쿠.”

나도, 형석이도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성질이 급한 강혁이에겐 최악의 상성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강혁이는 상대의 더티 복싱에 휘말리며 리듬을 잃고 정타를 계속해서 허용했다.

체급이 헤비급이었던 만큼, 헤드기어를 끼고 있음에도 다운이 나와 버렸다.

스파링에 승패 같은 건 없긴 하지만, 과정을 보면 완패였다.

“푸하핫!”

폭소를 터뜨리는 상대 크루 선수들. 합동 훈련에서 이런 비웃음이 나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긴 했지만, 핵심이 되는 나와 루치아노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할까.

강혁이는 그 비웃음이 어지간히도 굴욕적이었는지 씩씩거리며 링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사과를 한다.

“죄송합니다.”

“우리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미안할 거라면 너 자신한테 미안해해야지. 조금만 더 침착했으면 더 잘할 수 있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예.”

“다음 스파링 땐 더 신경 써서 해 보자.”

그때였다.

아직 링에 있던 지오반니가 내 쪽을 향해 뭐라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말했기에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대충 뜻은 알 수 있었다.

내게 도발을 가한 것.

이에 그로소 코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를 만류했다.

“저놈은 레벨이 달라! 지오! 링에서 내려가라!”

그러나 지오반니는 굴하지 않고 치킨이라며 도발을 해 온다.

그걸 두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크루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죽고 싶다는데 죽여 줘야지.”

“괜찮겠어? 몸 아직 다 못 풀었잖아.”

“쟤를 두들기면서 풀면 그만이야.”

나는 스파링 글러브를 끼고 링으로 올라갔다.

지오반니는 바라 마지않는 상황에 흥분하여 입맛을 다셨다.

그로소 코치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 내게 헤드기어를 내밀었지만 거절을 했다.

이에 자존심이 긁혔는지 지오반니 녀석도 자신의 헤드기어를 벗어 던졌다.

그걸 루치아노가 주웠다.

“지오, 미친 짓 하지 말고 당장 껴.”

“하지만…!”

“끼라면 껴. 그래야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루치아노가 정색하며 말하자 지오반니도 마지못해 헤드기어를 다시 착용했다.

루치아노 녀석은 팔짱을 낀 채 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스파링 개시 신호가 떨어지고.

타다닷! 상대는 우격다짐으로 접근해 들어왔다.

강혁이를 흔든 것처럼, 몸을 붙이는 식으로 더티 복싱을 하려는 생각이었으나 내 복싱 스타일상, 그게 통할 리는 없었다.

파파파팡! 견제용 펀치가 쏟아지자 접근해 들어오던 녀석의 발이 멈췄다.

지금껏 이 견제를 뚫고 들어온 선수는 단 두 명.

크레이그 켐벨과 리카르도 알멜다뿐이었다.

켐벨은 경이로운 맷집과 압박감으로, 알멜다는 빈틈없는 수비와 효과적인 스텝으로 뚫고 들어왔었다.

지금 상대가 그 레벨일 리는 없었다.

꽈득! 이를 악물며 억지로 파고들어 왔지만, 이 경우 함정이 발동한다.

팡! 바디를 때리며 옆으로 빠져나온 뒤,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펀치 세례를 퍼부었다.

상대는 펀치 속도를 보고 이게 무호흡 연타라고 생각했는지 버티려고 했으나, 미안하게도 나는 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상대는 펀치 세례가 도무지 멈추질 않자 일단 클린치라도 걸려는 심산으로 달려들었지만 콰득! 그 순간 내 숏 어퍼가 그 턱에 작렬했다.

“크흑…!?”

휘청이는 상대.

그 안면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자 엉덩방아를 찧으며 무너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그로소 코치가 제지했다.

“그 정도면 놈의 실력은 충분히 알았잖아! 내려와라, 지오!”

이번에는 녀석도 버티지 않았다.

두려움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얌전히 링을 내려왔다.

그렇게 링을 점거한 나는 상대가 한 도발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기로 했다.

“이봐, 멍하니 있지 말고 올라와. 주제를 알게 해 줄 테니까.”

내 도발에 루치아노는 양 입꼬리를 올리며 섬뜩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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