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체급 (2)
초반 공방을 벌이는 두 팀.
2쿼터 중반까지의 스코어는 43-42로 얼핏 치열해 보였지만, 내용으로 보면 클리퍼스가 열세에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보스턴은 쉽게, 쉽게 공격을 성공시키는 반면, 클리퍼스는 매 공격마다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클리퍼스는 공수 밸런스가 좋은 팀으로 꼽힙니다만, 역시 보스턴 앞에선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군요.]
[어떤 팀이든 안 그러겠습니까? 그만큼 보스턴의 에너지 레벨은 미쳤어요. 감히 말하건대 역사상 최고라고 봅니다.]
[역사상 최고요? 하지만 비슷한 에너지 레벨을 갖춘 팀은 있었던 것 같은데요.]
[보스턴의 이건 궤가 다릅니다.]
볼 핸들러의 차이 때문이다.
자고로 에너지 레벨이란 볼 흐름이 윤활할 때 더 극대화가 되는 것.
보스턴은 그 기반이 있었다.
[최고의 포인트 포워드라 불리는 르브론 제임스와 완성형 포인트 가드라 불리는 크리스 폴이 리딩을 분담해서 하고 있으니까요. 두 선수가 활발하게 움직여 주니, 볼 흐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르브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죽은 볼 처리도 크리스 폴이 해결해 주었다.
폴은 샷 클락 7초 이하 상황에서 리그 최고의 효율을 보여 주며 보스턴을 지탱해 주었다.
[심지어 여기에 라우리까지 있죠. 오늘은 벤치에서 출발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뛰어난 볼 핸들러들이 있으니 쿤보와 엠비드가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엠비드는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위협적인 공간에서 공을 전달받을 수 있었고, 쿤보의 컷인 공격은 불도저와 같았다.
[그나마 클리퍼스니까 여기까지 막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가넷이 영혼을 바쳐서 수비를 하고 있네요.]
오늘 경기에서 림 프로텍터 역할을 맡은 가넷은 그의 커리어 역사에서도 두 손가락에 들 만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엠비드에 대한 전담 마크는 물론이고 림 어택을 시도하는 쿤보와 르브론까지 막아야 했다.
이에 가넷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닥 리버스 감독은 크리스 폴과 엠비드의 투맨 게임을 지시하며 가넷에게 압박을 줬다.
노쇠화된 이후의 가넷은 수비 부담이 높을수록 공격 효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
여기에 엠비드의 터프한 수비까지 더해지며 가넷은 공격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그렇게 센터 포지션의 선수가 압도를 당하자 공격 리바운드는 꿈도 꾸지 못했고, 수비 리바운드 단속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허억! 허억! 디펜스! 집중해!”
가넷은 본인의 장기인 트래시 토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
스티븐스 감독은 내심 가넷을 교체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쨌든 승부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기도 했고, 가넷을 대신해서 나갈 선수가 지금처럼 수비를 해 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넷은 르브론과 일대일 매치가 됐고, 크리스 폴의 미스매치도 비교적 잘 견뎌 내는 편이었다.
반면 가솔과 요키치는 공격에선 더 위협적일지언정, 수비에선 분명하게 마이너스가 발생한다.
그들보다 빠른 러브가 탈탈 털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쉽사리 가넷을 뺄 수가 없었다.
[크리스 폴이 또 한 번 러브를 노립니다.]
[완전히 날을 잡았네요.]
폴은 러브를 미스매치로 낙점.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농락을 시작했다.
러브의 측면을 파고들어 돌파를 하더니, 러브를 등진 채로 자유투 라인 부근에서 공간을 보았다.
폴이 워낙 영리하게 등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파울을 의식한 러브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른 선수들도 자신의 마크맨을 체크하느라 도움을 갈 수 없는 상황.
그렇게 클리퍼스 수비진의 망설임을 캐치한 폴은 유유히 질주하여 헬프가 오기 전에 플로터를 던져 넣었다.
[아…. 러브는 교체를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미스매치 수비를 전혀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르브론과의 매치도 힘들어하고 있어요.]
[하지만 대신 넣어 줄 선수가 없어요. 가솔이나 요키치도 상황은 똑같을 거거든요. 공격적인 부분에서도 외곽 슛을 넣어 줄 수 있는 러브 쪽이 조금 더 낫고요.]
[그 대신 가솔과 요키치는 포스트 업 옵션이 더 좋지 않습니까?]
[골든 스테이트를 상대로는 그랬겠죠. 하지만 보스턴을 상대로는 아닙니다. 그들이 일대일로 압도할 수 있는 선수가 보스턴에는 없거든요. 포스트 업 세팅을 통해 폴이나 J.R. 스미스를 미스매치로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보스턴의 수비 회복 속도가 너무 빨라요. 샷 클락만 허비할 뿐이죠.]
그러나 그 탓에 성현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가넷도 공격에선 허수아비였고 러브도 외곽으로 나와 주는 스페이싱 역할밖에 되지 않으니, 직접 돌파를 해서 휘저어야 했으니까.
그나마 멜로와 빌이 활약을 해 주면서 점수의 균형은 맞춰지고 있었으나 그것도 아슬아슬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하나 있긴 합니다. 러브를 빼 주고 크리스 미들턴을 넣는 거죠.]
[미들턴을요?]
[예, 미들턴이 르브론이나 쿤보의 수비를 해 줄 수 있다고 하면, 클리퍼스도 숨통이 트일 거예요. 일단 미스매치는 없어질 테니까요.]
스티븐스 감독도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형태는 해설들의 예측과 달랐다.
그 구도가 2쿼터 막판에 나왔다.
스티븐스 감독은 지쳐 버린 러브를 빼 주고 미들턴을 투입. 그에게 폴의 수비를 맡겨 버렸다. 그러곤 쿤보의 수비를 성현에게 일임해 버린 것이다.
[이건…!?]
[스티븐스 감독이 칼을 빼 들었네요.]
성현은 오늘 경기에서 폴을 수비하며 진을 빼고 있었다. 폴이 능숙하게 투맨 게임을 펼치면서 성현을 계속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이는 알게 모르게 성현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가뜩이나 공격에서 짊어진 게 많은 상황에서 수비 부담까지 안게 됐다간 4쿼터 중반쯤에 퍼져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데토쿤보를 마크하게 하는 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쿤보에게 이성현은 미스매치 대상이니까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
성현은 좌측 45도에서 거리를 둔 채 쿤보를 마크하고 있었다.
이 새깅 디펜스에 쿤보는 입맛을 다셨다.
3점 옵션이 없었던 쿤보에게 이를 파훼할 수 있는 공격 옵션은 둘.
무작정 돌파를 해 보거나 포스트 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현과의 체격 미스매치가 나는 상황이니 포스트 업이 가장 효과적인 옵션이었으나 쿤보는 포스트 업 공격에 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르브론은 쿤보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아직 시리즈 초반이니 여러 가지 공격 옵션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것.
텁! 엘보 지역에서 엔트리 패스를 이어받은 쿤보는 성현을 등으로 밀어 내며 공격을 시도해 보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쿤보는 체격에 비해 포스트 업 공격이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성현은 체격은 작더라도 포스트 업 수비가 굉장히 좋은 편에 속했으니, 극과 극이 만나 수비 성공이 이뤄진 것.
“쳇!”
포스트 업 무브가 어색했던 쿤보는 몸을 돌려 페이스 업으로 전환해 뚫어 내 보려 했으나 성현은 그 움직임을 완전히 간파했다.
아무리 쿤보가 사이즈 대비 최고의 돌파력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가드의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만약 그가 먼 지점에서부터 속도를 붙여 돌파를 해 왔다면 파워를 견디지 못해 성현도 막지 못했겠지만, 지금처럼 정적인 페이스 업 상황에서 드라이브 인을 시도하는 것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었다.
성현은 쿤보의 돌파 경로에 먼저 몸을 집어넣으며 수비. 쿤보의 슛 거리를 최대한 길게 만들었다.
이에 골 밑까지 들어가지 못한 쿤보는 어중간하게 훅 슛을 시도하며 득점에 실패하고 만다.
[수비 성공! 이성현이 아데토쿤보를 막아 냅니다! 이럴 수가요!?]
[클리퍼스가 준비를 많이 해 왔다는 게 느껴지네요.]
[하지만 이러면 오히려 이성현의 수비 부담이 늘어나는 것 아닙니까? 수비 성공을 하긴 했습니다만 무척 힘든 수비였습니다.]
[힘들긴 하겠지만 보스턴이 계속 시도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수비 부담을 주고 싶다고 해도 효율이 나오지 않는 공격을 계속 시도할 리가 없다.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도 아니니, 성현이 쿤보에게 붙는다고 해도 보스턴은 이를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클리퍼스 입장에선 오히려 이성현의 수비 부담을 줄여 준 거죠. 그와 동시에 쿤보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상쇄시켰고요.]
성현은 쿤보의 컷인 움직임에도 영리하게 대처했다.
쿤보가 위크 사이드 부근에 있을 때는 거리를 두고 수비를 하여 페인트 존 백업에 힘을 썼고, 만약 공이 쿤보 쪽으로 올 경우에는 일 차적으로 디나이 디펜스를 한 뒤에, 공이 투입되려 하면 빠르게 뒤로 물러나 돌파에 대비했다.
이에 쿤보는 벌어진 공간을 이용해 속도를 붙여 저돌적으로 돌파를 해 보았으나, 성현의 일 차적인 돌파 경로 저지와 가넷의 백업으로 림 어택을 저지했다.
쿤보는 르브론에 비하면 시야가 넓은 편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돌파가 성공하지 못하면 애매하게 공을 돌렸다.
그로 인해 죽은 볼을 J.R. 스미스가 3점을 던져 처리해 보려 했으나 빗나가고 만다.
그렇게 변칙과 전략을 섞어 가까스로 수비의 흐름을 잡아낸 클리퍼스는 그 흐름을 공격으로 이어 가려 했다.
하지만 보스턴은 수비와 공격은 다른 이야기라는 듯, 여전히 압도적인 수비력을 선보였다.
“후우…!”
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2쿼터 남은 시간 1분 52초.
성현은 1, 2쿼터 도합 17분을 뛰면서 21득점 3어시스트 2리바운드를 기록 중이었다.
이는 4쿼터에 저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골스 시리즈와는 완전히 상반된 기록이었다.
‘동료들의 움직임이 경직돼 있어….’
보스턴의 빡빡한 수비 때문도 있지만 다들 파이널 무대에 대한 중압감, 그리고 TD 가든의 압박에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클리퍼스의 득점력이라면 이 시점에 50점은 가뿐히 넘어 줘야 했지만 이제 44점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보스턴도 빈공에 시달리며 큰 격차가 나고 있지 않았지만, 성현은 머지않아 보스턴에게 공격 흐름이 갈 것을 확신했다.
‘그 전까지 최대한 득점을 해 놔야 돼.’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해 줘야만 한다며 이를 악물고는 가넷의 스크린을 받아 공격을 전개했다.
외곽포가 전무한 가넷이 스크린을 서자, 엠비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블 팀을 시도.
성현은 폴과 엠비드의 옆구리 사이로 공을 빼내며 가넷에게 패스를 전달한 뒤, 골대를 향해 뛰었다.
공을 잡고 질주하는 가넷의 앞을 쿤보가 막아서자 가넷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성현에게 공을 연결.
절묘한 기브 앤 고 플레이가 될 뻔했지만, 덩크를 찍으려는 성현의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흡!”
“…!?”
탁! 어느새 쫓아와 체이스 다운 블락을 성공시키는 르브론 제임스.
덩크 실패로 인해 균형을 잃은 성현이 코트 바닥을 뒹구는 사이 백보드를 맞고 나온 루즈 볼을 잡아 낸 J.R. 스미스가 속공으로 연결했다.
외곽에 있던 폴이 쏜살같이 뛰어가며 장거리 패스를 캐치. 그대로 레이업을 올려놓았다.
“젠장!”
중요한 공격 실패에 스티븐스 감독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하아! 하아…!”
성현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 멍하니 코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성현에게 손을 내민 것은 르브론 제임스였다.
“헤이, 타임아웃이 나왔다고. 블락을 당해서 충격받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네 벤치로 가야지.”
그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애초에 클리퍼스는 상대가 되지 않는 팀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처럼, 우승은 처음부터 보스턴의 것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성현이 손을 잡고 일어나자 르브론은 씨익 웃더니 자신의 벤치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TD 가든의 팬들이 킹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르브론의 치명적인 체이스 다운 블락.
이는 게임 체인저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걸 기점으로 보스턴이 공격의 흐름을 타면서 경기가 기울어져 버린 것.
그렇게 1차전 최종 스코어 109-97.
클리퍼스는 전문가와 팬 들의 예상대로 무기력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