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 유어 페이스-231화 (231/250)

앞을 향해 (2)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을 꾸고 있었다.

가끔씩 꾸던 그 꿈.

신기루를 쫓는 것같이 몽환스러운 그 꿈이 왜인지 지금은 무척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건…?’

보이는 건 누군가의 기억 같았다.

걷어차이고, 폭언을 듣고, 웃고 있는 다른 부모 자식을 보며 슬퍼하고.

적어도 난 이런 기억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된다.

누구의 기억인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몸의 주인, 성현의 기억이었다.

‘그게 왜 지금…?’

아니, 애초에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걸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성현의 기억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현은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음에도 버려졌다는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학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어린 마음은 부모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곧바로 선영이가 할머니 집에 버려지면서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속은 곪아 가고 있었다.

친구인 형석이의 도움으로 복싱을 접하며 마음의 짐을 조금 털어 내긴 했지만 그 공허함은 여전했다.

그리고 녀석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맹목적인 사랑을 갈구했다.

나는 그게 주은이였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성현이가 사랑을 갈구한 대상은 내게도 조금은 익숙한 여성. 그 아이돌 여자였다.

꿈속이라 그런지 이름이 잘 기억나질 않았지만 아마….

‘리라였었나? 본명은 모르겠네.’

아무튼, 성현은 그 여자를 꽤 진심으로 사랑했다.

정말 놀라웠던 건 주은이를 만나게 된 게 이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리라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며 연락이 어려워지면서 개인 휴대폰의 필요성을 느낀 성현은 학교 봉사 활동에서 우연하게 만난 주은이에게 접근을 했다.

주은이가 부잣집 딸이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걸 알고 말이다.

‘말도 안 돼….’

성현이 주은에게 다가간 이유는 그저 휴대폰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

명목상 사귀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 리라에게 있었다.

그제야 왜 그 여자가 나한테 그렇게 집착을 했는가를 알 것 같았다.

성현이 얘기하던 게 있으니 그 여자 입장에서도 갑자기 바뀐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어쨌든 그런 이중생활을 시작한 성현은 본인이 굉장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언젠가 사정이 괜찮아지면 주은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사죄를 하겠다며 다짐을 했지만, 그 사정이라는 게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런 불안한 이중생활 속에서 결국 터진 게 바로 주은이의 임신이었다.

‘멍청한 놈….’

본인이 쓰레기 짓을 하고 있다고 자각을 하면서도, 괴로워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가 버리고 만 성현.

솔직한 심정으로 눈앞에 있으면 한 대 때려 주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그 누구도 성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없고, 할머니는 아프고, 선생도 알아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형석이만이 믿고 의지할 수 있었지만, 형석이도 성현이 미국으로 유학 간 여자애와 계속 연애를 하고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은이의 임신을 알게 된 성현은 패닉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벌인 일이 걷잡을 수 없는 책임감과 부담으로 다가오자 멘탈이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학금이 취소되고 할머니까지 사망하자 그의 멘탈은 한계를 넘어 버렸다.

주은의 아버지 명훈이 직접 찾아와 폭언을 쏟아 내자 자연스럽게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다.

그렇게 한강 다리 위에 올라선 성현은 뛰어내리기 전에 눈물을 쏟으며 신에게 읍소했다.

주은이에 대한 죄책감과 홀로 남겨지게 된 선영이에 대한 걱정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주은이와 선영이는 행복하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도무지 포장하기 힘든 이기적인 선택.

그러나 거기서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성현의 몸에 들어오고, 성현이 내 몸으로 가 버린 것이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트레이드가 사실이었던 것.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가관이었다.

나야 요령 좋게 성현의 행세를 했지만, 성현은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그러다 결국 어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그 황당한 얘기를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일단 자기가 알던 아들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니 그 얘기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성현을 호되게 혼냈다.

양다리를 걸친 것부터, 임신을 알고서 자살을 선택한 것까지.

‘우리 엄마답네.’

어머니는 성현이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성현은 그 도움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쪽도 나 못지않게 좌충우돌하며 혼란을 겪었지만 결국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일곱 살 연하의 예쁜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만들었으며, 어머니와도 진짜 가족이 되었다.

성현은 뻥 뚫려 있던 가슴속의 공허함을 채우고 행복을 찾았다.

그가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냐고 하면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축복을 해 주고 싶었다.

뭣보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리고 그 어머니라고 하면 매일같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었다.

종교 같은 건 믿지도 않는 사람이 매일 아침 다른 세계에 있을 내 행복을 빌어 주었다.

‘엄마….’

그때 목소리가 들려오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

성현은 면목이 없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난 그제야 알았다.

이게 언제나 꾸던 꿈의 마지막이었다는 걸.

[주은이와 선영이를 행복하게 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 말을 드려야 할지….]

“후우! 너 말야…. 어휴, 아니다.”

성현의 몸에 들어와 온갖 고생을 다 하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부 즐거운 추억이었다.

뭣보다 내게 이런 가족이 생기고, NBA 입성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준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최상의 트레이드. 우리의 관계는 윈윈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나도 고맙다. 앞으로도 엄마를 잘 부탁할게.”

녀석은 울먹이며 웃는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경기 힘내세요, 은성이 형!]

“…!”

얼마 만에 들어 본 이름일까.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꿈속의 내 몸이 뒤로 젖혀지며 의식이 빠르게 각성했다.

“헛!?”

현실의 내 몸도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어퍼를 맞은 걸까. 천장의 조명이 보였다.

그래도 꿈에서부터 몸이 뒤로 젖혀지는 상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성현아-!!”

비명을 지르는 형석이.

뇌가 흔들렸는지 그 소리가 뭉개져서 들렸다.

시야도 흔들린다.

우뚝! 뒷발을 옮겨 겨우 무게중심을 잡고 섰지만 무릎에 힘이 풀리며 비틀거렸다.

그런 내 앞으로 괴수가 접근해 왔다.

켐벨은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쏘아 냈다.

이걸 맞으면 이번에는 찰나의 꿈의 아니라 그대로 병원으로 가 버리겠지.

‘뒤로 피할 공간은 없어.’

고개를 숙여서 피할 시간도 없다.

그렇담 어떻게든 비껴 내야 한다는 뜻.

나는 목을 옆으로 빠르게 꺾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놈의 펀치가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슬립 동작과 함께 장전해 뒀던 왼 주먹을 휘둘렀다.

“그읏…!”

콰득! 상대의 턱에 작렬하는 레프트.

이미 축적된 데미지가 한계를 넘어서 있었는지 켐벨은 눈을 까뒤집으며 무너져 내렸다.

-우와아아아!!

쏟아지는 환호성.

“하아! 하아…!”

나는 그제야 백일몽 같은 감각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뭐였지 방금은?’

누군가의 기억을 본 것 같은 감각.

머릿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정보는 성현이는 쓰레기지만 윈윈을 한 거다. 그리고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대체?’

경기 도중에는 시간이 멈추는 듯한 감각을 느끼거나 하는 신기한 일도 있다고 하니 그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행이야.’

방금은 진짜 위기였다. 날아간 의식을 빨리 찾지 않았다면 그대로 끝이 났겠지.

심판은 켐벨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손을 교차하며 경기 종료의 신호를 보냈다.

* * *

9라운드 1분 52초 TKO.

성현이 크루저급 챔피언에 오르며 두 체급 제패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야, 이성현-!!”

형석은 링 위에 뛰어올라 성현을 얼싸안았다.

코치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편 정신을 차린 켐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자신의 프로 첫 패배가 믿기지 않는 탓도 있고, 심지어 그게 실력 차이 때문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막판에 호각의 승부를 벌일 수 있었던 건 성현이 페이스를 잃었기 때문이었을 뿐,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분명히 보였다.

그는 경기장을 떠나며 코치에게 말한다.

“헤비급으로 바로 가겠어.”

“뭐? 크루저급은? 어차피 이성현 저놈은 크루저급 방어전을 치르지 않을 거야. 금방 타이틀매치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필요 없어.”

이제 크루저급을 따낸다고 해도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안 것이다. 이미 성현에게 패배를 하고 말았으니까.

켐벨이 완전히 떠난 후.

링 위에 크루저급 벨트가 올라왔다.

성현은 왼팔에 헤비급 벨트, 그리고 오른팔에 크루저급 벨트를 매달고 근육맨 자세를 취해 보였다.

동양인 선수가 중량급에서 두 체급 제패를 한 충격적인 순간.

더 충격적인 건 링 위에서 이어진 인터뷰였다.

성현이 그 자리에서 은퇴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당일 스포츠 언론은 그로 인해 도배가 됐다.

[은퇴 선언! 이성현 링 떠난다. “이룰 것 다 이뤘어.”]

[당분간은 농구에 집중할 듯, 클리퍼스의 리핏 정조준.]

[WCB는 당혹감 내비쳐. “이성현과 얘기된 바 없다. 법적 조치 취할 것.”]

성현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에 복싱계가 술렁였다.

성현에게 패배했던 헤비급 선수들은 이기고 도망가는 것이라며 맹반발을 했다.

경기장에선 얌전히 퇴장했던 크레이그 켐벨도 성현의 은퇴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며 대기실의 물건을 죄다 부숴 놨을 정도.

다른 선수들도 성현의 은퇴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으나 그들은 마냥 그러고 있기가 힘들었다.

성현이 은퇴를 한 덕에 헤비급과 크루저급 챔피언 자리가 갑자기 공석이 됐으니까.

헤비급과 라이트헤비급의 선수들은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복싱 팬들은 성현의 결정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지고 나서 은퇴를 선언하는 것보단 모양새가 괜찮기도 했고, 뭣보다 성현은 구멍투성이 챔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 체급을 압도적으로 정리하며 이겨야 되는 선수는 모조리 이겼다.

다만 이쪽도 잡음이 발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농구 팬들이 복싱 팬들을 조롱하며 약을 올렸던 것.

그렇게 경기 후에도 여기저기 시끄러운 상황이었으나 성현은 그런 것들은 모조리 제쳐 둔 채, 서둘러 집에 돌아와 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지은이는 자고 있으려나?”

산타 옷을 입고 있는 성현을 보며 주은은 배시시 웃었다.

“아마 자고 있을 거야. 선영이가 재워 둔다고 했거든.”

“근데 굳이 내가 산타 옷을 입을 필요가 있는 거야? 어차피 자고 있는데.”

“지은이가 산타 할아버지 잡을 거라고 벼르고 있었거든. 혹시 모르잖아. 옷 입는 거 힘들면 도와줄까?”

“괜찮아. 근데 이거 무슨 선물이야? 엄청 크네.”

“요즘 유행하는 인형의 집이야. 하여간 얼마나 갖고 싶어 하던지.”

성현은 기다리고 있던 선영과 아이 컨택을 하고는 살금살금 딸 지은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는 머리맡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놔두고 가려고 했으나 지은이 눈을 번쩍 뜨며 그 가짜 수염을 붙잡았다.

“선영이 언니! 내가 산타 할아버지 잡았어! 엄마! 엄마-!”

“지, 지은아!? 그, 그러면 안 돼!”

화들짝 놀란 선영과 주은이 허겁지겁 들어온다.

“얘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힘이 세!?”

때아닌 난리 통이 벌어진 방.

주은과 선영은 이 상황이 우스웠는지 꺄르르 웃고 있는 지은과 함께 폭소했다.

성현만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짜 수염이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애를 쓰고 있었다.

인 유어 페이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