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던 팬티
(1/121)
1. 입던 팬티
(1/121)
#1. 입던 팬티
2022.06.02.
3월 31일.
가게 안은 훈훈한 공기로 가득했다. 꽃샘추위로 바깥 공기는 제법 차서 창문마다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잔술을 데워 차가운 몸을 녹이기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술이 조금 오를 땐 밖에 나가 심호흡 열 번만 하고 들어오면 술이 확 달아나는 마법 같은 계절.
절친들과 술 마시기 더없이 좋은 날이다.
“봉봉 리서치, 아니, 데이터스 코리아를 위하여!”
천다희. 혜주의 대학 동창이자 입사 동기.
“불금에 왜 회사 얘기야.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진 나 회사원 아니다.”
강승원. 혜주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회사 개발팀에서 일하는 친구.
떨어져 지낸 세월을 계산해도 도합 10년의 인연을 이어온 세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순식간에 비운 소주잔을 머리에 털던 승원이 혜주를 향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오혜주. 장판 깔지 마라.”
“아주 술 마실 때만 매의 눈이지.”
혜주는 픽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올해 스물일곱, 체력 만땅, 지갑도 두둑. 무엇보다 셋 모두 솔로.
매주 금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만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이유다. 회사 근처에서 1차를 하고 승원의 오피스텔 근처 꼬칫집에서 2차를 한 후, 승원의 집에서 술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근 1년여 동안 이어져 온 코스다.
“승원아. 넌 진짜 좋겠다. 이제 형이 회사 대표로 오게 되었으니 꽃길 쫙 펼쳐지겠네.”
다희가 얼굴에 꽃받침을 한 채 헤실헤실 웃었다. 아담한 키에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가녀린 체구, 가끔 민증 검사를 받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꽃길은 개뿔. 네가 아직 우리 형을 몰라서 그래. 꽃 깔린 줄 알고 즈려밟다가 꽥 고꾸라지는 수가 있다고.”
“왜?”
“꽃길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맥락 없는 술주정을 다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강주원 대표님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좋은 형이야.”
“무서운 사람은 아니구나?”
“사람은 착해…….”
“되게 무서운 사람이구나.”
다희의 눈썹이 축 처졌다.
최근 세 사람이 다니는 회사 봉봉 리서치는 데이터스에 합병됐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초대형 데이터 분석 플랫폼 데이터스가 봉봉 리서치의 주식을 100퍼센트 흡수하며 인수한 것이다.
즉, 회사의 임원진이 싹 물갈이된다는 얘기였다. 그 회사의 대표가 승원의 형, 강주원이라는 사실은 직원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참, 그러고 보니 너 이제 이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아지트, 원래 너희 형 집이었다며.”
혜주의 질문에 승원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지. 귀찮아 죽겠어.”
“네 집 정리하려면 사흘 밤낮으로도 부족할 텐데.”
“내 말이! 이삿짐 쌀 생각하니까 벌써 토 나와.”
“그럼 아지트에 있는 우리 물건부터 정리해야겠네.”
“물건 뭐. 어차피 운동복밖에 없지 않아?”
“팩트랑 립밤 두고 왔어. 지난번에 보니까 다희 속옷도 한 개 굴러다니던데. 강주원 대표님은 언제 들어온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혜주의 신경은 오로지 ‘아지트’에 쏠려 있었다.
강승원, 천다희, 오혜주. 세 사람이 밥 먹듯이 드나드는 곳 아지트.
그곳은 승원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고급 주거용 오피스텔이라 피트니스 센터가 잘 되어 있어서 회원권을 빌려 쓰다 보니 어느새 제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아지트에 모여 1박 2일 내내 먹고 마시는, 일명 돼지 캠프를 한 지도 어느새 1년이 넘었다. 하지만 혜주가 이토록 ‘아지트’를 신경 쓰는 건 단순히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다음 주부터 출근이니까 늦어도 다음 주 안엔 들어오지 않을까? 원래 형이랑 시시콜콜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그렇구나. 아, 나 잠시 화장실 좀.”
혜주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꼬칫집 화장실은 야외에 있었다. 외투를 여미며 화장실에 도착한 그녀는 부리나케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거의 지워진 립스틱도 다시 바르고 목덜미에 칙칙 향수도 뿌렸다.
‘……결전의 날이다.’
혜주가 거울을 보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녀는 오늘 승원에게 고백할 작정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으로 만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담았다. 고백 한 번이 그렇게 어려워서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해보고 흘려버린 시간이 강물처럼 많았다.
풋풋했던 첫사랑을 회사에서 다시 만났을 때 운명이라 생각했었지.
그러니까 오늘은 반드시 말해야지. 널 좋아한다고,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좋아해, 승원아.”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막상 그와 단둘이 있게 되면 입술이 얼어버릴까 봐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이다.
오래된 친구에게 고백하는 것만큼 잃을 게 많은 장사가 있을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순간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고르고 고른 날이 오늘이었다.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만우절이니까.’
떨리는 눈동자에 손목시계의 바늘이 비쳤다.
오늘 아침 피트니스 센터를 다녀오며 승원의 방에 잠깐 들렀었다. 아무렇게나 말려 있는 이불을 정돈한 후 준비한 선물을 놓고 오는 길이 얼마나 긴장되던지 무슨 첩보 영화를 찍는 것 같았다.
계획은 완벽했다. 12시 땡 하면 침대 위에 놓인 선물 박스에서 건담이 튀어나올 거다. 곧이어 건담의 가슴팍에 장착한 오디오에서 고백송이 흘러나오겠지. 노래가 끝나면 내가 뿅 나타나서 고백하는 거다.
“좋아해, 승원아.”
수십 번 연습한 그 말을.
승원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놀라겠지? 십중팔구는 어이없어할 테고, 술 잘 처먹고 웬 헛소리냐며 놀릴지도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만우절’이란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되도록 그럴 일은 없길 바랐다. 오늘을 위해 취미에도 없는 조립을 하고, 기계치 주제에 프라모델에 오디오까지 장착한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려해주길.
‘기회는 오늘뿐이야. 오혜주, 아자아자 파이팅!’
혜주는 11시 5분을 가리키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화장실을 나섰다.
“혜주한테는 언제 말할까?”
계단을 막 올라왔을 때 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주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평소 같으면 ‘둘이 나 모르게 비밀 만들었지!’ 하며 갈궜을 텐데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어떤 불길한 직감이었다.
“난 하루라도 빨리 얘기하는 게 맞지 싶어. 우리 사귀는 거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아직 만우절 안 됐는데?
“글쎄. 시간을 좀 두는 게 어떨까. 대뜸 우리 사귄다고 하면 좀 뜬금없지 않아?”
다희의 맞은편에 앉은 승원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걸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요새 분위기 보니 혜주도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 같더라. 남자 선물 고른다고 나한테 몇 번 물어봤었거든. 이참에 우리 사이도 확 까발리고 더블데이트하면 재밌을 거 같아. 그냥 얘기하면 안 돼?”
“며칠 두고 보자.”
“왜에, 나는 혜주한테 비밀 만들기 싫은데.”
……아.
모퉁이 뒤에서 고개만 빼서 바라보니 승원의 팔에 기댄 다희의 모습이 보였다.
동그란 눈은 사랑스러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오밀조밀한 입술은 행복으로 반짝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승원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해서 굳이 진짜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 둘, 서로 좋아하는구나. 그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쿵쿵대던 심장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친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
“하아, 하아.”
무슨 정신으로 아지트까지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꼬칫집에서 아지트까지는 걸어서 10분. 그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구두를 신은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는 것도, 두 눈에서 흐른 눈물이 뺨을 적신 것도 몰랐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승원의 침대 위에 놓아둔 선물이었다.
‘일단 선물부터 회수해야 해.’
오랜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승원에게, 혜주가.] 박스 위에 정성스레 붙인 포스트잇과 12시 정각에 흘러나오게 세팅한 고백송.
들키면 꼴이 우스워질 게 뻔했다.
절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인데 나만 몰랐다.
다희야. 네가 승원이와 사귀는 것도 모르고 너한테 고민 상담을 했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승원이란 걸 말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눈물이 차올랐으나 훔칠 새도 없었다. 혜주는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승원의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아침에 두고 간 선물은 침대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꼭 그녀의 신세처럼 초라하게, 덩그러니 외롭게.
“후우, 아직 안 들켰네.”
그간 한 번도 내보이지 못한 오랜 짝사랑. 끝내 들키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금의 상황이 참 처량하다.
‘그래도…… 고백하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니까.’
혜주는 애써 위안하며 선물을 갈무리했다. 어제 먹은 술병을 치우지 않아 지저분한 바닥을 징검다리 뛰듯 지나 현관으로 가려는데, 불현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불을 켜고 들어온 건가? 원래부터 켜져 있던 것 같은 기분은 뭐지…….’
워낙 경황이 없어 부지불식간에 켜고 들어왔나보다 생각하고 다시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달칵. 욕실 문이 열렸다.
“엄마얏!”
소스라치게 놀란 혜주는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쿵쿵, 심장이 몸 밖에서 뛰는 것처럼 울렸다.
‘뭐, 뭐지?’
저벅저벅 다가오던 걸음이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야, 도둑고양이.”
“!”
산뜻한 바디워시 향기와 함께 수증기가 밀려들었다. 슬그머니 뜬 실눈 틈으로 촉촉이 젖은 맨발이 보였다. 탄탄하게 발목을 타고 올라간 종아리와 무릎 위에서 간당거리는 순백의 샤워가운.
그리고…… 얼핏 봐도 살색이 완연한 거대한 실루엣.
“너 뭐냐.”
낮고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묵직한 음성에 몸이 굳었다.
“강주원……씨?”
“씨 같은 소리 하네. 한국 들어와서 제일 먼저 보게 된 얼굴이 너일 줄은 몰랐는데.”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불편한 남자였다.
“오혜지. 오랜만이다?”
하도 당당해서 그가 이름을 잘못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샤워가운만 걸친 건장한 남자 앞에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르겠고, 저 인간이 왜 이 집에 있는 건지는 더더욱 모르겠고.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그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 같은데. 내 집엔 무슨 일이지?”
잠깐 까먹었다. 여기가 강주원의 집이란 걸.
주원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승원에게 이 집을 주고 갔다고 했다. 몇 시간 전까지 아지트 비워줘야 한단 얘기를 해놓고 막상 집주인 앞에서 적반하장으로 굴어버린 것이다. 혜주는 서둘러 변명을 급조했다.
“아, 그게. 제가 놓고 간 물건이 있어서요. 자초지종을 다 말하기는 좀 복잡하고요. 승원이한테 물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좀…… 너무 헐벗고 계셔서.”
혜주는 아까 주저앉으면서 떨어트린 선물을 주우려고 바닥을 더듬거렸다. 대충 물건을 찾은 그녀는 행여 들킬세라 얼른 등 뒤에 숨기며 일어섰다.
“그럼 챙길 거 챙겼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 때였다.
“동작 그만.”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혜주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저벅저벅.
그의 걸음이 다가올 때마다 수명이 배터리처럼 닳는 기분이었다.
“다 좋다 이거야. 내가 없는 동안 내 집에 몇 번을 드나들었든, 집주인도 아닌 게 멋대로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오든 상관없다고.”
상관없으면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요.
“그런데 그 손에 들린 게 내 팬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팬티는 뭔…….”
반사적으로 손아귀를 움켜쥐니 선물 포장 위에 한 겹 덧입혀진 천 조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도 입던 팬티를.”
“!”
어쩐지 포장지가 유달리 부드럽다 싶더라니.
내가 황천길을 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