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게 누구더러 속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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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게 누구더러 속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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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게 누구더러 속되대
2022.06.05.
혜주는 차마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손아귀를 꽉 쥐었다.
‘어쩌지?’
아마도 바닥에 떨어트린 선물을 주우면서 팬티까지 같이 주운 모양이었다. 그것도 강주원이 벗어놓은 팬티를!
‘아니, 그러게 누가 팬티를 저렇게 무방비하게 벗어놓냐고!’
승원의 집은 워낙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생이 느긋한 인간이라 일주일에 한 번 가사도우미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늘 돼지우리였다. 점조직처럼 흩어진 잡동사니를 밟지 않으려면 겅중겅중 뛰어야 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팬티가 널브러져 있는지 뜯다 남은 족발이 뒹굴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왜 하필 강주원 팬티야……..’
태연한 척해봐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기요, 그게…….”
“게다가 그게 오혜지 너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아?”
오혜지 아니고 오혜주라고요.
서슬 퍼런 그의 음성에 그런 지적은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주원이 팔짱을 낀 채로 혜주를 내려다보았다.
“나 한국 들어오는 거 알고 있었지?”
혜주는 시선 둘 곳이 없어 끔뻑끔뻑 그의 발끝만 쳐다보았다.
“대답.”
“……네.”
“이 집이 내 집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네.”
“너 아직도 마음 정리 못 했냐?”
이런 망할!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딴 오해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혜주는 순한 양처럼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치켜 들었다.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요.”
“얘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는 너 자신이 제일 잘 알겠지.”
하아.
“너 나 좋아했잖아. 10년쯤 됐지, 아마?”
저 자신감은 정말 칭찬해 줄 만한데, 당하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었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주제에 10년도 더 지난 일을 잘도 입에 올리네. 주먹이 운다, 울어.
‘아오, 진짜.’
뇌리로 먼먼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고1 빼빼로데이. 승원에게 고백하러 갔다가 엉뚱하게 주원에게 빼빼로를 주고 와 버린 기막힌 그날.
하트 모양으로 키만큼 쌓아 올린 빼빼로를 들고 낑낑대며 언덕을 타던 내 모습과, 밤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승원을 기다리던 시간, 달이 기운 후에야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승원의 곁에 우리 학교 최고의 떠버리가 붙어 있던 기억…….
자칫하다간 내 짝사랑이 전교에 쫙 깔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온다는 게 하필 강주원의 품이었다. 그때 혜주는 어렸고 뒷일보단 발등에 붙은 불을 끄는 게 더 시급했으니까.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주원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론 연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내가 아직도 자길 좋아한다고 믿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10년 만에 만났는데 웬 헛소리세요. 그쪽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요?”
“오해라기엔 증거가 너무 충분한데.”
“무슨 증거요?”
“네 손에 들린 그거.”
“이건 저한테 중요한 물건이라서 찾으러 온 것뿐…… 아, 그러니까 팬티가 중요한 게 아니라요! 팬티 안에 든 물건이요!”
팬티 안에 든 물건……?
강주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쫙 벌어진 제 가슴골을 타고 쓰윽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시선에 혜주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속된 의미의 물건이 아니고요!”
“이게 누구더러 속되대.”
“그쪽 물건한테 한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저로서도 되게 억울한 상황인데요. 사실 어떻게 된 거냐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였다.
틱. 틱틱틱틱. 틱틱. 딩동댕.
도어록 비밀번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혜주, 한참 찾았잖아.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집에 있었…… 어어, 형?”
승원이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옆엔 다희도 함께였다.
‘미치겠네. 왜 하필 지금 들어와!’
혜주는 황급히 손에 든 물건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헐벗은 주원과 시뻘게진 혜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승원이 잠시 멍한 눈빛을 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었다.
“어…… 음, 둘이 같이 있는 줄은 몰랐네. 뭐부터 얘기해야 하지? 형, 혜주 알지? 나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내 집에서 살림 차렸냐? 얘 비번 치고 들어오던데.”
“살림은 무슨! 혜주랑 나랑 그런 사이 아니야. 완전 순도 100퍼센트 친구라니까. 그나저나 형은 왜 이렇게 빨리 귀국했어? 아, 일단 옷부터 입어, 좀.”
발갛게 달아오른 다희를 눈치챈 승원이 바닥에 있는 옷가지를 주워 주원에게 던졌다. 주원이 회색 바람막이를 한 손으로 받으며 대꾸했다.
“오늘 들어온다고 메시지 했잖아.”
“어? 그랬어?”
“사흘 전에.”
“아…… 새 아이템 나온 날이네.”
승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그는 종종 밤을 새울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거의 좀비 상태로 출근하곤 했다.
아마 그날도 밤새 게임을 하느라 비몽사몽 간에 메시지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집에 친구들 들락날락하게 해서 미안해. 형 귀국하기 전엔 다 치워놓으려고 했어. 그런데 오혜주, 너 왜 여기 있어? 술 먹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한참 찾았잖아.”
갑자기 쏠린 시선에 혜주는 주머니 속 선물 상자를 꽉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물을 들킬 수는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희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강주원 대표님.”
머릿속을 정리한 혜주는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폈다.
“다다음 주부터 출근이시니 대표님이라 부르는 게 맞겠죠? 대표님 집에 무단으로 들어온 건 죄송합니다만 오늘 제 목적은 대표님이 아니었습니다. 이 집에 놓고 간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온 거예요.”
제발 좀 받아줘라. 어지간하면 이쯤에서 정리하자고!
“맞다. 우리 집에 뭐 놓고 온 거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화장품이었나?”
영문 모르는 승원이 열심히 지원 사격을 해댔지만.
“놓고 간 물건이라.”
피식. 강주원의 입꼬리가 올라간 순간 혜주는 상황이 결코 녹록지 않게 흘러갈 것임을 직감했다.
“아까 보니 화장품 아니던데.”
“응? 화장품 아니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승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혜주, 아까 팩튼가 립밤인가 놓고 갔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게…….”
유구무언이란 지금 상황을 두고 만들어진 말인가.
대답다운 대답을 하지 못하는 혜주로 인해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열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공기 속에서 승원의 등 뒤에 서 있던 다희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혜주야. 대표님이 널 좀 오해하시는 것 같아. 아무래도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있어서 놀라신 것 같은데 네가 가지러 온 게 뭔지 그냥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괜한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속 시원히 해명하는 게 낫잖아.”
망할, 천다희. 차라리 홀딱 벗고 인디언 춤을 추라고 그래. 내 주머니에 든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보여줄 수가 없단 말이다. 이건…… 이건……!
“친구를 사귀려거든 좀 가려서 사귀어. 스토커도 아니고 이게 뭐냐?”
피로함을 느낀 주원이 낮게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차라리 그건 혜주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이쯤에서 정리했으니 됐어. 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가면 되는 거야. 상황 설명은 나중에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
“스토커라니! 내 친구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승원이 역성을 내던 그때였다.
빰빠라밤! 빰빰빠빰빠라밤!
주머니 속에서 팡파레가 터졌다. 혜주는 멍하니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정각이다.
‘하나님, 그냥 절 죽여주세요.’
주머니에 욱여넣은 상자가 벌컥 열린다. 불룩해진 주머니 안에서 건담이 씰룩쌜룩 춤을 춘다. 달콤한 노래가 흐른다. 혜주의 가슴에선 절망이 흐른다.
오랫동안 널 지켜봤어
네가 곁에 없을 때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내 눈은 오직 너를 향해 있었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반짝이는 네 눈빛이 입술에 닿기를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너무 멀리 돌아온 우리
이제는 날 받아줄래?
가사는 왜 또 이렇게 절묘한 건데.
“오혜주…… 너 진짜 형 스토커야?”
몹시 당황한 승원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혜주는 넋을 놓은 채로 세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경악한 승원과 입을 틀어막은 다희. 봤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젖히고 선 강주원까지.
변명하기엔 늦었다. 승원에 대한 마음을 들키지 않고서 자신을 변호할 방법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놀란 토끼 눈을 한 다희를 한 번 바라보곤 주원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신고하려면 하세요.”
탁.
돌아선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애절한 고백송에 맞춰 건담이 요란하게 쌜룩거렸다.
*
4월 1일, 만우절.
지금껏 만우절 이벤트라고 해봤자 수업 시간에 반 바꾸어 앉기나 교복 거꾸로 입기 정도였던 혜주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일 리 없어.’
휴대폰 시계는 4월 1일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내내 다희와 승원에게서 불티나게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사귄다고……?’
어젯밤의 굴욕보다 더 충격적인 건 애교스러운 미소로 승원에게 안겨 있던 다희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승원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을 떠올리니 왼쪽 가슴이 욱신하게 아려왔다.
‘나한테는 미리 말해줬어도 되잖아. 그랬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벤트는 준비하지 않았을 텐데…….’
원망스러운 마음조차 미안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혜주는 휴대폰을 끄고 원룸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활짝 열린 선물 상자 안에 고백송을 마치고 장렬히 전사한 건담이 널브러져 있다. 그 옆엔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팬티가.
“오혜주 미쳤어, 진짜…….”
강주원의 집에서 무려 ‘입던 팬티’를 들고 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선물과 함께 주머니에 욱여넣은 것을 꺼낼 타이밍도, 그럴 상황도 아니었기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것뿐이었다. 상식적으로 그걸 어디다 써먹겠냐고.
“돌아버리겠네. 이 망할 놈의 팬티를 어떻게 하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혜주는 그 팬티가 강주원의 분신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남의 물건을 가지고 나왔으니 돌려주긴 해야 할 텐데 당장 강주원의 연락처를 몰랐다. 승원을 통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겠으나 얼굴 볼 자신이 없어 휴대폰도 꺼둔 마당에 연락하기도 곤란하고.
‘그냥 버릴까?’
강주원이 돈이 없어 팬티를 못살 인간도 아니고, 이깟 팬티 한 장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가며 애지중지할 또라이도 아닐 테니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언제 빠진 건지 모르겠다고 둘러대도 되고.
“그런데 이건 뭐야?”
한데 막상 버리려고 보니 밴드 쪽에 작게 수가 놓여 있다. 손끝에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작게 새겨진 글씨였다.
“뭐지?”
한자 같기는 한데 아무리 인상을 쓰고 봐도 모르겠다. 원래 있는 글자는 아닌 거 같고 브랜드 이름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강주원이 설마 남의 팬티를 주워 입은 건 아닐 테니 선물한 사람이 남긴 시그니처라도 되려나?
‘이러면 버리기 찜찜해지는데.’
소중한 의미가 담긴 물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 난감했다. 처치 곤란한 물건을 두고 한참 고심하다 나중에 회사에서 돌려줘야겠다 결심한 순간이었다.
딩동! 딩동!
현관벨이 울렸다.
‘다희 아니면 승원이겠지.’
혜주는 반응하지 않았다. 오전에도 한 번씩 다녀갔으나 집에 없는 척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두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제 술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진 일에 대해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으니까.
‘그냥 가주라, 제발…….’
무시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찰나였다.
“오혜주 씨 계십니까?”
굵은 남자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렸다.
쿵쿵쿵!
하도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통에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혜주는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들어 인터폰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오혜주 씨 되시죠?”
“네, 제가 오혜주인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화면에 비친 경찰 제복에 의아해하던 그녀의 귓가로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입던 팬티를 도난당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잠시 나와주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