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빨간 우산, 까만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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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빨간 우산, 까만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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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빨간 우산, 까만 코트
2022.06.12.
“형한테 묻긴 좀 껄끄러운 얘기야. 남의 얘길 엿들은 거 같아서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승원이 경직된 눈으로 말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그게.”
머뭇거리는 승원을 보며 주원은 속으로 한탄했다.
‘설마하니 그 턱도 없는 거짓말을 믿는 거야? 와, 이거 생각보다 순진한 놈이네.’
주원은 혜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승원이라는 얘기가 진심일 거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승원과 그다지 비슷하게 생긴 얼굴도 아닌데 사람을 착각하고 빼빼로를 건네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치 기다린 것처럼 귀국하는 날에 딱 맞춰 나타난 것도 그렇고. 게다가 그 낯뜨거운 고백송은 뭐야. 오랫동안 널 지켜봤다는 둥,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사랑했다는 둥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누가 봐도 강주원 저격송이 아닌가.
그 뻔한 거짓말을 승원이 듣고 오해라도 한다면…….
‘곤란하네.’
단단한 착각에 빠진 주원은 받아 줄 수 없는 혜주의 마음이 애석할 뿐이었다. 또한 골치가 아팠다. 아까 오혜지가 둘러댄 말 같지도 않은 변명 때문에 승원이 착각이라도 하게 되는 날엔 괜히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어진 승원의 질문은 바삐 돌아가는 주원의 계산을 완전히 빗나갔다.
“형, 진짜 혜주를 경찰에 신고했어? 제정신이야?”
아. 아까 들었다는 얘기가 이거였나.
“얼핏 듣고는 내 귀를 의심했어. 형 정말 미쳤어?”
승원이 들었다는 얘기가 경찰서 건이라는 사실에 주원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데 승원의 반응이 예상보다 거칠다.
“동생 베프를 경찰에 신고하는 또라이가 어디 있어?”
“뭐, 인마?”
“내 친구잖아! 형 보러 온 거 아니고 우리 집에 놓고 간 게 있어서 온 거라고! 혜주가 대체 뭘 훔쳤는데? 뭐 얼마나 귀한 걸 훔쳤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
“너는 알 거 없어.”
걔도 나름 프라이버시란 게 있는데 입던 팬티를 훔쳤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주원은 손을 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떽떽대고 게임이나 마저 해.”
“형!”
주원은 깨끗한 수건에 손을 닦고 돌아섰다. 그러나 승원은 놓아주지 않았다.
“진짜 혜주가 스토커라고 생각해?”
“꺼지라고 했다.”
“대답해줘. 형의 그 얼토당토않은 망상이 혜주에 관한 거라면 나한테도 알 권리가 있어.”
“알 권리?”
“친구니까.”
하아.
주원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솔직히 정말 혜주를 스토커라고 생각했다면 경찰에 도난 신고가 아니라 스토킹 신고를 했을 거다.
주원이 혜주를 경찰에 신고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주원은 그 이유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스토커라고 생각 안 해. 됐지?”
“그런데 왜 신고했어?”
“야, 강승원.”
“대답해.”
승원은 물러나지 않았다.
순둥순둥한 동생 놈은 가끔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럴 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도 말릴 수 없다는 걸 주원은 알고 있었다. 웬일로 요새 좀 고분고분하다 했지. 응?
“그래. 대답해줄게.”
주원이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승원을 쏘아보았다.
“집에서 없어진 물건이 있었는데 오해가 좀 있었어.”
“무슨 물건인데? 그래봐야 내 물건일 거 아니야.”
“내 물건이었어.”
“그러니까 별것도 아닌 물건 때문에 내 친구를 신고했다는 거네?”
“오해가 있었다고 하잖아. 귀찮으니 진짜 적당히 해. 정 궁금하면 오혜지한테 물어보든가. 베프라며?”
주원이 빈정거리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러나 이쯤 하면 대충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정말 그 물건 때문에 신고한 거 맞아?”
뒤에서 들려온 가시 돋친 한마디에 주원의 미간이 꿈틀했다.
“형 상처 모르는 거 아니야. 혜주를 왜 경찰에 신고한 건지도 짐작은 가.”
“나가.”
“10년 전 그 사건 때문이지?”
“……한마디만 더해라. 뒤지고 싶으면.”
착 가라앉은 음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승원은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개처럼 처맞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어. 형이 스토킹이라면 치를 떠는 거 알아. 혜주를 정말 스토커라고 생각했다면 형이 이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고. 하지만 혜주 그런 애 아니야. 사과해줬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지껄여.”
“다시는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경고하려고 그런 거잖아! 아님, 엿 돼보라고 그런 건가? 그것도 아니면 신고 기록이라도 남겨두고 싶었어? 어떤 쪽이든 10년 전처럼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피하고 싶었겠지!”
터질 것처럼 이글거리던 주원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새카만 심연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둑했다.
“귀찮은 일이라.”
피식. 반듯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한때 사귀던 여자가 죽어서 내가 의심을 받았지. 경찰에 몇 번 스토킹으로 신고한 기록이 있어서 누명을 벗었고.”
주원은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집 앞에 찾아왔던 날 내가 경찰에 신고했었더라면 그 여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거.”
10년 전 악몽 같았던 그날. 짧게나마 마음을 주었던 여자가 목을 매단 날.
“형…….”
살짝 흐릿하던 하늘, 공기에 섞여 있던 비 냄새, 아스팔트에 깔린 어둑한 그림자. 어느 것 하나도 잊히지가 않는데.
“살릴 수 있었어.”
그런데 네가 뭘 안다고 까불어. 보드랍게 뺨에 와닿았던 입술이 새파랗게 말라붙은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어땠는지 상상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이제 말해봐.”
주원이 눈만 들어 승원을 쳐다보았다.
“내가 오혜지를 왜 경찰에 신고했을 거 같아?”
섬뜩하리만치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치 공허처럼 건조했다.
*
11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주원은 서울대에 재학 중인 여대생에게 논술 과외를 받았었다.
여리여리한 체격에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 1년여 정도 매주 두 번씩 얼굴을 보며 둘 사이에 남모를 감정이 싹튼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긴 주원은 당시에도 소문난 훈남이었다. 인근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 그의 얼굴 한 번 보려고 수십 분을 빙 돌아 등교를 할 정도였다.
발렌타인데이며 빼빼로데이에는 집 앞에 선물이 가득 쌓여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예인이 사는 집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원혜림.
그녀는 여자에게 관심이 조금도 없던 주원의 가슴에 처음으로 불을 지핀 상대였다. 혈기왕성한 시절의 풋사랑이었다.
과외 시간에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어려운 문제를 맞추면 다정스레 볼을 쓰다듬어주던 그녀에게 주원은 꽤 마음을 주었었다.
그러나 혜림이 품은 마음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3 진학을 앞두고 학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주원에게 그녀는 점점 많은 것을 요구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길 원했고 하루 종일 연락을 해주길 바랐다. 과외 시간에도 수업을 하는 대신 애정을 갈구했고 연락이 되지 않는 날엔 무작정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을 기함하게 하기도 했다.
마침내 주원이 그녀를 완전히 밀어낸 순간 스토킹이 시작됐다.
혜림은 밤이고 낮이고 집 앞에 서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엔 빨간 우산을 들고, 바람이 부는 날엔 까만 코트를 입고서.
경찰에 몇 번이나 신고를 했으나 상대가 연약한 여자인 데다 명문대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가 되지 않았다. 경찰이 올 때마다 간단한 주의를 받고 돌아서길 여러 번. 그 사이 주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녀가 와서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주원이 있는 이층 방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주원을 마주치면 제발 내려와달라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일. 그러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에 주원은 날이 갈수록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잠을 설쳐 모의고사를 망친 주원은 집 앞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 말았다.
-막말로 내가 누나랑 뭘 했다고 이래?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구냐고.
-키스…… 했잖아.
-그래, 꼴랑 키스. 장난처럼 했던 키스 한 번.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니?
-키스 한 번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재주다. 겨우 한 달 사귄 걸로 이 정도로 집착하는 거 정신병이라고. 알아?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모진 말을 했다. 바로 그날 그녀가 목을 맬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퍼붓진 않았을 텐데.
바람이 눅눅하던 수요일. 그녀가 원룸에서 목을 맸다. 흔들리는 발밑엔 주원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형은 설마 혜주가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그 일이 주원에게 어떠한 상처로 남았는지, 승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일을 혜주와 연관시키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혜주가 왜 죽어? 오혜주가 얼마나 즐겁게 사는 앤데! 내 친구 중에서도 제일 씩씩한 애라고!”
“알아.”
“아는데 왜!”
“원혜림도 그랬으니까!”
밝고, 잘 웃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한순간에 그런 선택을 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죽은 원혜림과 혜주를 엮어서 생각하는 게 과대망상이란 건 주원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숨통이 조였다. 그날 본 혜주의 얼굴은 원혜림을 꼭 닮아 있었으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한 상실감이 서린 얼굴이었다.
물론 경찰을 불러서 문을 따야겠다고 생각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혜주와 계속 연락이 안 된다고, 집으로 찾아갔는데도 대답이 없다는 승원의 말에 십 년 전 악몽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혜림과 똑같은 눈빛을 한 그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알아. 과대망상인 거.”
주원이 씁쓸히 읊조렸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승원은 아무 말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욕을 하고 싶은 얼굴인데 차마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 후에야 승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혜주 그렇게 나약한 애 아니야. 스토커는 더더욱 아니고!”
주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
같은 날 저녁.
혜주는 원룸 침대에 누워 이불 킥을 하고 있었다.
“으아, 짜증 나! 이걸 또 들고 와 버리다니!”
펄럭거리는 이불 사이로 구석에 팽개쳐둔 까만 비닐봉지가 보였다. 아까 갑작스럽게 승원이 등장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또다시 들고 와 버린 주원의 속옷이었다.
‘내 저걸 기필코 처단하고 말리라.’
찢어 버릴까, 그냥 버릴까 하다가 친히 화형식을 해주기로 작정했다. 아까 강주원이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은 걸 보면 딱히 중요한 물건 같지도 않으니 마음대로 처분해도 상관없겠지.
어디 적당한 드럼통 없나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혜주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설마 또 경찰 아니야?’
경찰서에 다녀온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덜컥 그 걱정부터 들었다. 혜주는 비닐봉지를 발끝으로 밀어 베란다에 넣어두고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