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잘 가,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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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잘 가,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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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잘 가, 내 첫사랑.
2022.06.16.
“강승원이 어쩐 일이지?”
근처를 지나가다 배가 고프면 불쑥 찾아오는 일이 있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반갑게 맞이할 수는 없었다.
혜주는 문을 열고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밤늦게 무슨 일이야?”
“족발 먹자.”
승원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였다.
“야밤에 웬 족발?”
“족발을 밤에 먹지 낮에 먹냐.”
혜주가 조금 머뭇거리는 사이 승원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거침없이 안주를 세팅한 그가 상비약을 꺼내듯 아주 자연스럽게 베란다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편한 데 앉아.”
네 집이세요?
혜주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불족발이야?”
“당연한 걸 뭘 물어. 젓가락이나 뜯어줘.”
승원은 국내 유수의 명문대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한 인재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이며 물리에 두각을 나타내 천재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문제는 그 두뇌 능력이 딱 그쪽으로만 뛰어나다는 거다.
“나이가 몇 갠데 아직 젓가락도 못 뜯어. 내가 평생 뜯어줄 수도 없는데 이제 너도 연습해야지.”
나무젓가락을 쪼개면 늘 짝짝이가 되어 버리는 그를 위해 대신 젓가락을 쪼개준 세월이 어언 4년이 넘었다.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진 나무젓가락을 받아들며 승원이 빤히 혜주를 바라보았다.
“일단…… 미안하다.”
평소엔 실없는 소리만 하는 애가 무게를 잡으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만히 고기만 씹고 있는 혜주를 향해 그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형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예전에 스토킹을 심하게 당한 적이 있었거든.”
끄덕끄덕.
“자세히 얘기하긴 그렇지만, 그때 트라우마로 형은 스토킹에 극도로 예민해. 아, 물론 네가 스토커란 얘기는 절대 아니고.”
뭐라 할 말이 없어 혜주는 잠자코 족발만 씹었다.
“아무튼 미안해. 형 대신 사과할게.”
기계적으로 입만 우물거리던 혜주는 소주를 털어 넣고 나서야 겨우 대꾸했다.
“왜 네가 사과를 해. 됐어. 내 실수도 있는걸.”
“참, 그리고 이거 안 챙겨갔더라.”
승원이 주머니 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아지트에 있던 팩트와 립밤이었다.
“어, 고마워.”
혜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주원을 맞닥뜨린 그날 밤,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게 화장품이 아니었다는 걸 승원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려 깊게도 승원은 그날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게 뭐였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노골적인 고백송의 정체에 대해서도.
‘쟨 항상 그랬지.’
생각 없는 듯하면서도 배려심 깊고 허술하면서도 진중하고. 매일 게임에 빠져 사는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많은 애였다.
‘그날 아지트에서 가져간 물건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거야.’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겨우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경찰서 한 번 다녀온 게 뭐 대수라고. 나 괜찮아.”
“그렇담 다행이고.”
그러나 짧은 침묵 후 그가 꺼낸 말에 혜주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할 말 더 있어, 혜주야.”
매사 태평한 승원은 아주 가끔 진지한 얼굴을 하곤 한다. 혜주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낯간지럽게 분위기 잡지 마. 닭살 돋으려고 그래.”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지만 가슴이 꽉 조여왔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 알고 있지?”
그의 질문에 혜주는.
“……그래, 알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승원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다르더라.”
“어떻게 달랐는데?”
“천하의 오혜주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더란 말이지. 우리 연락도 잘 안 받고 단톡방에서 말도 안 하고.”
우리, 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쓰린지 모르겠다.
‘원래 우린 셋이었는데.’
이제는 둘과 하나가 되어버린 관계에서 혜주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축하 안 해줘?”
“야, 내가 왜 축하를 하냐! 술친구를 둘이나 잃었는데!”
“그 말은 좀 섭섭한데. 나랑 다희가 사귄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닌 건 아니잖아.”
“올해는 크리스마스도 같이 못 보낼 거 아니야.”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까짓거 같이 보내면 되지.”
“눈치 없는 애 되긴 싫다. 에잇,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이다!”
너도 곧 남친 생길 거라는 둥, 우리 우정에 변함은 없을 거라는 둥 승원은 없는 말재주로 혜주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가 소주잔에 알코올을 따라줄 때마다 슬픔이 같이 차올라서 혜주는 죽을 맛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축하…… 해 줘야지.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친구 두 사람이 서로를 아낀다는데 죽상을 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혜주는 웃고 또 웃었다.
차곡차곡 적립된 슬픔은 승원이 돌아가고 나서야 터져 나왔다.
“흐윽…….”
불족발의 강렬한 향이 가득한 집 안에서 혜주는 엉엉 울었다.
“왜 이래, 진짜…….”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씰룩여봐도, 코를 막아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을 가리고 히끅거리던 혜주는 결국 침대에 엎어져 엉엉 울고 말았다.
행복해라, 친구들아.
잘 가, 내 첫사랑.
*
승원과 다희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짝사랑이 끝나 억울하거나 승원을 빼앗겼다는 불순한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을 들키면 우리 셋 절대 예전처럼은 지낼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늘 혜주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불쑥불쑥 치솟는 부러움과 아주 조금의 원망.
사무실에서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볼 때,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단톡방이 조용할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둘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떠오를 때…… 셋 중 하나에서 순식간에 떨어져나온 느낌이었다.
다희는 혜주를 더욱 잘 챙겨 주려고 노력했다. 퇴근 후엔 꼭 같이 밥을 먹으려 했고 주말에도 셋이 평양냉면이나 먹으러 가자고 설득했다.
에둘러 거절할 때마다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해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두어 번 밥을 먹기는 했으나, 그때마다 은근히 주고받는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 혜주는 날이 갈수록 살이 쭉쭉 빠졌다.
‘이러다 진짜 말라 죽겠다.’
신경을 분산시켜줄 뭔가 획기적인 이벤트가 필요했지만 일상은 쳇바퀴처럼 반복되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두 사람을 흘끔대는 스스로의 모습에 질려갈 무렵, 강주원이 입사했다.
강주원의 입사는 단조롭던 회사에 돌풍을 일으켰다.
“새로 온 대표님 봤어? 와, 저 앞에서 걸어오는데 아주 빛이 나더라.”
“미국에서 유학했다더니 피지컬이 남다르긴 하더라. 아까 엘리베이터 같이 탔는데 옆에 서니까 내가 쪼꼬미가 된 기분이었어.”
“개발팀 강승원 씨 친형이라며? 어쩜 그 집은 형제가 다 우월 유전자를 타고났대?”
그의 인기는 가히 신드롬 급이었다. 작은 회사라 소문이 빠른 것도 있지만 전 직원이 마흔 미만이라 새로 온 미혼 대표님에 더욱 관심이 쏠린 면도 있었다.
봉봉 리서치는 총직원 수가 100명 정도인 스타트업이었다. 출범했을 때 열다섯 명이던 직원이 100명까지 불어나면서 회사의 규모가 커지자 미국의 거대 모바일 분석 플랫폼인 데이터스가 회사를 인수했다. 그로 인해 임원진이 싹 물갈이되었고 ‘데이터스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강주원 대표는 미국 데이터스 본사에서 COO(최고운영책임자)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아이비리그를 초고속으로 졸업 후 곧장 데이터스에 입사. 회사를 다니며 MBA를 동시에 이수해 데이터스에서도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을 이뤄냈다.
아무리 젊은 피가 주류인 미국의 벤처 회사라고 할지라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COO까지 올라간 건 그가 매우 유능한 인재라는 뜻이었다.
“강주원입니다. 모바일, 데이터, 리서치 모두 미래 가치를 내포한 단어들이죠. 전화 혹은 인터넷 등의 방식을 사용하는 기존 리서치 업체와 달리 우리 데이터스는 모바일에 기반한 서베이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진화한 리서치의 미래,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입사 첫날 그가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직원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미국에서 날아온 핫한 경영자, 그의 카리스마에 직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강주원 대표님, 아직 서른도 안 됐다고 했지? 능력 대박이다, 진짜.”
“아이비리그에서도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수재라잖아.”
“승원 씨랑 아이큐 합치면 300은 되는 거 아니야? 저 집 형제는 누가 데려가려나 몰라. 벌써부터 부럽네.”
데이터스는 스타트업 특유의 수평적이고 자유분방한 조직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100여 명의 직원이 빌딩 3개 층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는데 따로 직급을 부여하지 않아 뭐뭐씨라고 서로를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임원진이라고 해서 비서를 두지도 않았고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도 않았다. 즉 ‘대표’의 자격으로 데이터스 코리아에 입사했어도 실무진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개중 미국 본사에서 낙하산처럼 꽂힌 주원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봉봉 리서치의 창립 멤버 중 몇몇이었다. 그들의 눈에 강주원은 수년간 함께 해온 임원진을 밀어내고 대표 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입사 첫날부터 불만을 쏟아 냈다.
“글쎄, 이력이 화려하다고 해서 일도 잘할지는 두고 봐야지. 실무는 또 다르거든.”
그러나 정확히 일주일 후, 그들의 입은 쑥 들어갔다. 실무에 투입된 강주원이 일주일간 보여준 성과가 실로 놀라웠던 것이다.
주원은 육 개월간 지지부진하던 계약 건을 단 한 번의 미팅으로 성사시켰고 개발팀에서 한 달이나 풀지 못했던 기술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대담한 추진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 처리 속도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단 일주일.
데이터스 코리아가 국내 1위의 데이터 분석 플랫폼으로 거듭날 거라는 믿음을 모두에게 심어주는 데 강주원이 소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회사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동안 혜주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회사가 인수 합병되며 조직개편이 있었던 터라 할 일이 끝도 없이 많았다.
차라리 그건 혜주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회사에서 주원을 대할 때마다 곤란할 거라 생각했는데, 서로 바빠 얼굴을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드디어 새로운 대표님이 회식 자리에 등장한 것이다.
바로 오늘, 하필이면 사업부와 개발부가 함께 한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