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 고백 오빠가 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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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고백 오빠가 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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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고백 오빠가 깠잖아!
2022.06.19.
직원이 100명이 넘는 회사다 보니 간혹 있는 회식은 각 부서별로 소박하게 진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최근 강주원 대표가 막혔던 계약 건을 뻥 뚫어주면서 그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던 사업부와 개발부가 함께 회식을 하게 되었다.
사업부 소속의 혜주와 다희, 개발부 소속의 승원, 그리고 이번 계약의 히어로 강주원 대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자자! 우리 대표님 오시고 따로 환영회도 하지 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서 축하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이쪽에 앉으세요!”
술자리에서 분위기 띄우는데 각별한 사명감이 있는 사업부 유명환이 총대를 메고 사회자로 나섰다. 스무 명의 의욕 충만한 젊은이들은 오랜만의 회식에 모두 식도를 열었고, 각 테이블 위엔 초장부터 소주가 인당 한 병씩 깔렸다.
혜주는 업무가 늦어져 거의 마지막에 고깃집에 도착했다. 하필이면 남은 자리가 승원의 옆자리였다.
“왔어?”
승원이 작게 속삭이며 방석을 깔아주었다. 혜주는 살짝 미소를 지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이제 다 모였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봅시다. 우선 우리 데이터스 코리아의 새 얼굴! 이분 들어오고 나서 여직원들 출근 시간이 30분은 빨라졌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다들 숨어서 힐끗거리지 말고 이참에 마음껏 감상합시다. 우리 강주원 대표님을 모십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반짝거리는 시선들이 민망할 법도 한데 주원은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데이터스 코리아의 보석 같은 인재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가 뭐라고 건배사를 시작했으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혜주의 신경은 온통 옆자리에 앉은 승원에게 쏠려 있었다.
“데이터스 코리아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주원이 당당한 자세로 건배사를 외치는 걸 보며 혜주는 젓가락을 뜯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승원에게 내밀었다.
“여기.”
순간 승원이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테이블을 보니 예쁘게 쪼개진 나무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 미안. 이미 준비했네.”
“아냐, 뭘. 조금 전에 다희가 해주고 갔어. 처음에 내가 뜯은 게 반 토막이 나버려서.”
그의 말마따나 예쁜 젓가락 옆에 짝짝이 나무젓가락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혜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타박했다.
“으이구, 이 똥손아. 그 정도면 나무젓가락 사다 놓고 쪼개는 연습이라도 해.”
주원의 건배사와 함께 모두가 잔을 부딪쳤다. 혜주는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안주를 집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음?’
반사적으로 돌아본 혜주의 눈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다희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다희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순간적으로 느껴진 적의에 혜주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
*
갈 사람은 모두 가고 열 명 남짓이 남은 2차 자리.
술자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이라 혜주는 숙취해소제를 사기 위해 잠깐 술집을 나섰다.
11시가 넘어 어둠이 짙게 깔린 길 위에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이 비쳤다. 회사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한적한 골목이라 사방은 조용했다.
“오늘 엄청 달렸네, 후우.”
혜주는 뜨거운 뺨을 꾹꾹 누르며 숙취해소제를 마셨다. 아직 자리에 남은 사람들을 위한 숙취해소제를 야무지게 챙겨서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킷을 어깨에 걸친 다희였다.
“쩐다, 왜 나와 있어?”
쩐다는 평소 혜주가 다희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밖에서 오래 기다렸는지 다희의 코끝이 빨갰다.
“물어볼 게 있어서 기다렸어, 혜주야.”
“나한테?”
“응.”
눈만 마주쳐도 사르르 웃는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이었다.
‘아까 느낀 그 눈빛이 착각이 아니었나 보네.’
혜주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마도 술자리에서 승원에게 젓가락을 뜯어준 일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제 승원의 여자친구는 다희니까.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니겠지만 여자친구 입장에선 자기 애인을 남이 챙기는 게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
“아까 그 일은…….”
생각을 정리한 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허리를 딱 잘라내며 다희가 던진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때 승원이 집에서 가지고 나간 거 뭐야?”
공격 같은 질문에 혜주는 잠시 멍해졌다.
“간단한 소지품이었어.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
“혜주야, 내가 널 몰라?”
“……무슨 뜻이야?”
“돼지우리에 네 물건 굴러다니는 거 싫다고 네 물건들은 항상 챙겨 다녔잖아. 나는 운동복이며 뭐며 다 아지트에 놓고 다니는데 넌 항상 커뮤니티 클럽 락커에 넣어놨었고. 심지어 아지트에 있던 네 화장품도 내가 빌렸다가 실수로 놓고 온 거잖아.”
다희의 음성이 점점 격앙되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다희의 시선이, 날카롭게 따져 묻는 목소리가 혜주의 뇌리에 경광등을 울렸다.
“그날 네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게 화장품이 아니란 건 나도 승원이도 알아. 그러니까 솔직히 얘기해줘.”
“뭐야, 쩐다. 내가 강승원 오피스텔에서 뭐라도 훔쳤을까 봐 이래?”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
다희가 빽 소리를 질렀다.
“12시 정각에 네 주머니에서 울려 퍼지던 그 노래, 내가 알려준 거잖아.”
“다희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곧 고백할 거라며? 그때 쓰라고 내가 알려준 고백송이잖아!”
다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혜주를 노려보았다.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 혹시 승원이니?”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초라해질까 봐, 너희가 미안해할까 봐, 그래서 끝내 너희 둘 모두 잃게 될까 봐 끝끝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걔랑 나랑 친구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애써 변명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승원이랑 친구였잖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생각해.”
혜주의 변명을 일축한 다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생각해보니 이상하잖아. 나랑 승원이랑 사귄다는 거 알게 된 이후로 연락도 잘 안 되고 약속 잡는 것도 계속 피하고.”
“야, 그건 불편해서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껴서 닭 되면 책임질 거야?”
“네 앞에서 딱히 애정행각을 한 적도 없는데 너무 과민반응 아니야? 나한테 친구는 너뿐이었는데…….”
흐느낌이 짙어졌다.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꼭 죄지은 것처럼 느껴져. 마치 내가 네 남자를 빼앗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혜주는 당황스러운 손길로 울먹이는 다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로 그냥 어색해서 그랬어. 앞으로 안 그럴게.”
“그럼 증명해줘.”
“뭘.”
“그 고백송, 누굴 위한 거였는지 말이야. 승원이는 절대 자기는 아니래.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강주원 대표님을 좋아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몇 년이나 미국에 있던 사람을 어떻게 좋아해?”
“…….”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줘. 혜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막다른 골목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느냐 거짓으로 둘러대느냐, 선택지는 딱 두 개뿐이었다.
‘그냥 말해버릴까?’
그러나 솔직해진다고 해서 혜주가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어색한 친구 사이는 더 어색해질 테고 회사 생활은 지옥이 될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쪽팔렸다. 제일 친하다고 자부하던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워지는 동안 혼자 삽질만 하고 있었다는 게.
‘대충 적당히 둘러대는 편이 낫겠어.’
다희는 꽤 집요한 스타일이었다. 누군가를 콕 찍어 얘기하면 어디서 만났냐, 사진 보여달라, 성화를 부려댈 게 뻔했다. 해서 혜주는 더욱 신중해져야만 했다.
‘누구라고 둘러대지?’
기억에 저장된 온갖 남자를 끄집어내 두뇌를 풀가동하던 그때였다.
“여어, 스토커.”
지하 계단 위로 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마셔댔는데도 붉은 기 하나 없는 피부가 대리석처럼 매끈했다.
그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단 아래에 숨겨져 있던 부분이 차츰차츰 드러났다. 얼굴에서 가슴으로, 허리에서 종아리로. 마지막으로 한 걸음을 디뎠을 때 완전히 드러난 그의 기럭지는 후미진 골목조차 런웨이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렬했다.
“옆에서 마시다 말고 어디로 샜어? 스토커의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네.”
뚜벅뚜벅 걸어온 주원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혜주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지난번에 알아듣게 설명했는데 왜 저래?’
세상 사람 모두가 몰라도 그는 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승원이라는 걸.
그런 사람이 왜 또 저런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그쪽 스토커냐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혜주의 뇌리를 스쳤다.
‘그냥 강주원이라고 해버려?’
그날 고백송을 들은 사람은 모두 넷.
그중 자신의 진심을 들은 사람은 오직 주원뿐이다. 한데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주원은 아직도 혜주가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무척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도끼병이 고맙다.
‘이건 기회야, 오혜주.’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이 상황을 끝내는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혜주는 굳게 마음을 먹고 주원을 마주 보았다.
“왜 자꾸 스토커라고 그러세요? 자기한테 관심 없는 사람 좋아하면 다 스토커인가요?”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주원이 멈칫했다. 지금껏 내내 발뺌하던 사람이 급발진을 하니 저런 목석도 당황이란 걸 하나 보다.
이거 은근히 쫄깃한데.
“딸꾹!”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다희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지진 난 듯 흔들리는 다희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혜주는 허리에 손을 착 얹으며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사석이니까 편하게 말할게요, 오빠.”
오. 빠……?
낯선 호칭에 주원의 입술이 벌어졌다.
“사람 마음 가지고 그렇게 놀리면 기분 좋아요?”
“……놀리긴 누가.”
“자꾸 스토커 스토커 하니 기분 나쁘잖아요.”
주원의 눈동자가 좌우로 진동했다. 긴가민가 사람 헷갈리게 하던 애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좋아. 이제 다 왔어.’
완전히 설득당한 두 사람을 보며 혜주는 안심했다. 짝사랑에 실패한 것도 서러운데 그 마음을 숨기기까지 해야 한다니 조금 서글프긴 하지만…….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마음을 희생양 삼아 친구를 지킬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인 거잖아. 안 그래?’
혜주는 심호흡을 한 채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속으로 열 번쯤 새긴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내질렀다.
“제가 오빠 좋아한 건 맞는데요. 이제 마음 접었다고요. 완전 깨끗하게, 무지 깔끔하게요!”
“어…… 그래?”
“그날 내 고백 오빠가 깠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