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뭘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접고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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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뭘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접고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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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뭘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접고 그러냐
2022.06.23.
회식이 끝난 후.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실은 주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제가 오빠 좋아한 건 맞는데요.
-제가 오빠 좋아한 건 맞는데요.
-제가 오빠 좋아한 건 맞는데요.
조금 전 혜주가 외친 한마디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돈의 도가니였다. 한국 들어오자마자 팬티를 훔치질 않나, 그래놓고 절대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발뺌하지 않나. 며칠 전엔 사실 승원을 좋아했다고 헛소릴 남발하더니, 이제 와서 또 자길 좋아한 게 맞다고?
“뭐야, 진짜.”
미친X 널뛰듯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니 도대체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더더욱 아리송한 건 마지막에 혜주가 뱉은 말이었다.
-그날 내 고백 오빠가 깠잖아!
그날이 언제지? 10년 전을 말하는 건가, 며칠 전을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 오혜지를 깐 적이 있던가?
주원은 차창으로 시선을 둔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10년 전, 혜주가 사람 키만 한 빼빼로를 품에 던지고 간 날이었다. 으레 그렇듯 집 앞은 산처럼 쌓여 있는 선물과 편지들로 정신이 사나웠다. 주원은 팔짱은 낀 채 방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빼빼로 더미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오혜지라고 했던가? 승원이 친구?’
예전에 집 앞에서 마주쳤을 때 대충 소개받은 기억이 있었다.
요새 애답지 않게 치마도 안 줄였네. 요즘 칼단발 보기 힘든데 단정하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딱 두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을 정도로 감흥 없는 만남이었다.
‘걔가 날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강주원 좋아하는 여학생이야 줄 세우면 운동장을 반쯤 채울 정도로 많았지만 혜주는 조금 의외였다.
처음 소개받을 때 부끄럼도 타지 않고 낭랑하게 제 이름을 말하던 모습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는 여자가 하도 많은 통에 주원은 그쪽 방면으론 남들보다 기민했다. 그가 봤을 때 혜주의 깨끗한 눈동자엔 사심 따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별일이네.”
주원은 픽 웃으며 빼빼로를 방구석으로 밀어놓았다.
며칠 후 길거리에서 혜주를 마주쳤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오빠, 그날은 죄송했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한 걸까. 먹지도 않는 빼빼로를 던져주고 간 거? 그게 그렇게 미안할 일인가.
고개도 못 들고 파르르 떠는 게 불쌍해서 그냥 좋게 대꾸해줬다.
-맛있더라. 아몬드 그거.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실은 제가 오빠를 좋…….
떼구르르.
어디선가 농구공 하나가 굴러왔다. 주원은 반사적으로 공을 잡아 던져준 후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내빼는 혜주를 보며 주원이 피식 웃었다.
“빼빼로도 줘놓고 뭘 저렇게 부끄러워하냐. 미안하게.”
뒤에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오빠를 좋아해요’가 아니라 ‘오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요.’ 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주원은 순수한 혜주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된 건데 둘은 의외로 마주칠 일이 많았다. 승원과 친하다 보니 집 근처에서 보기도 했고 학년은 달랐지만 같은 학원을 다녀 종종 복도에서 부딪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혜주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고 주원은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수능을 마치고 곧장 유학을 떠나기까지 그렇게 몇 번의 마주침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많지는 않으나 대체로 혜주가 피하는 쪽이었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난다.
“내 쪽에서 확실히 거절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흐음.”
그러니 혜주가 말하는 ‘고백을 깠다는’ 의미는 최근의 일일 것이다.
가물가물한 10년 전 일을 곱씹던 주원의 기억이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귀국한 직후 집에서 혜주를 마주친 날이었다.
-친구를 사귀려거든 좀 가려서 사귀어. 스토커도 아니고 이게 뭐냐?
인상 팍 쓰고 무지막지하게 몰아세운 기억이 난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날 주원도 무척 당황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만 달랑 걸치고 나왔는데 집 한가운데 떡하니 여자가 들어와 있으니 놀랄 수밖에.
당황한 나머지 스토커라고 몰아세운 것을 아무래도 거절의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게다가 팬티 도난 신고로 경찰도 불렀지. 어디까지나 혜주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10년 전 트라우마를 알 리 없는 혜주의 입장에선 충분히 당황스러웠을 거다.
‘음…… 그 정도면 거절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네.’
고백을 까여서 마음을 접었다는 혜주의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그래, 뭐. 어차피 받아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냐.
마음을 접었다는, 그것도 아주 깨끗하고 깔끔하게 접었다는 혜주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윙윙댔다.
“뭘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접고 그러냐. 재미없게.”
주원은 시트에 깊게 몸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자꾸만 가슴이 북적거렸다.
*
아침부터 회사가 소란스러웠다.
탕비실에 모인 여직원들이 삼삼오오 오늘 인트라넷에 올라온 공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인트라넷 봤어? 이번에 버디 대상자 두 명이더라.”
“그중 한 명이 강주원 대표님이래! 꺄악!”
이름하여 [버디 프로그램].
버디 프로그램은 신규 입사자 교육의 일환으로 데이터스 코리아가 도입한 고유의 시스템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의 경우 신규 입사자를 한 데 모아놓고 인사부나 교육팀에서 단체 교육을 진행하지만, 데이터스 코리아와 같은 스타트업의 경우 직원 수가 적은 데다 인사부 인력에 한계가 있어 자체적으로 교육 시스템을 마련한다.
그게 바로 버디 프로그램이었다.
버디 프로그램은 먼저 입사한 선배 직원이 신규 입사자를 대상으로 회사의 문화와 조직도, 기타 전반적인 사안에 대해 2주간 가르치는 것이었다.
업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인수인계와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버디 프로그램은 신규 입사자가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사내 헬스클럽에 사람이 적은 시간대를 알려준다든가, 지각했을 때 탈 없이 보고하는 꿀팁을 알려준다든가, 회사 근처 맛집을 알려준다든가 하는.
2주간 회사에서 제공한 법인카드로 실컷 맛있는 걸 사 먹을 수 있고 신규 입사자를 교육한다는 핑계로 외부 활동도 할 수 있어 지원자가 많았다. 한마디로 ‘꿀 빠는’ 업무인 것이다.
특히 이번 버디 프로그램은 여느 때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지난주에 입사한 강주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혜주야, 인트라넷 공지 봤지? 버디 프로그램 신청했어?”
탕비실에서 다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회식 때 혜주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예전의 관계로 돌아온 그녀였다.
“물론 안 했지.”
“왜……?”
“응?”
“너 강주원 대표님 좋아한다면서.”
혜주는 커피를 내리며 시크하게 대꾸했다.
“좋아했. 었. 지. 지금은 현재완료형, 아니, 완전 과거완료형이야.”
“사람 마음이 그렇게 무 자르듯 간단한 거야?”
“그렇게 대단할 정도의 감정도 아니었어. 왜, 무슨 얘길 하고 싶은데.”
다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아니,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강주원 대표님한테 고백하려고 한 게 불과 한 달 전이잖아. 듣자 하니 너 고등학교 때도 강주원 대표님한테 고백한 적 있다면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해서.”
“걱정 붙들어 매셔. 나 진짜 괜찮아.”
하여간 천다희 마음 약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혜주는 씨익 웃으며 다희를 안심시켰다. 다희가 다람쥐처럼 찰싹 팔에 달라붙으며 속닥거렸다.
“근데 난 왜 몰랐지? 너랑 나 사이에 비밀 없잖아. 강주원 대표님이랑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 왜 얘기 안 했어?”
“나도 너랑 강승원 사귀는 거 몰랐잖아.”
“그건……!”
“세상에 비밀 없는 사이는 없단다. 오구오구, 순진한 우리 쩐다. 이제 세상의 때가 묻을 때도 되지 않았니?”
노인네 같은 말에 다희가 배시시 웃었다.
“몰라. 난 앞으로도 너랑은 비밀 안 만들고 싶어.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서로서로 얘기하기다? 응? 우리 베프잖아.”
“너 하는 거 봐서.”
“너무해!”
그때 누군가 달려왔다.
“강주원 대표님 버디 정해졌대요!”
탕비실에 모여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홱 돌아갔다. 이제나저제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눈망울을 빛내며 물었다.
“누군데요?”
“사업팀 루비 씨요. 지금 완전 신나서 커피 쏘고 있어요. 얼른 가서 받으세요!”
캡슐 커피를 내리던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몇몇은 아쉬움에 한숨을 흘렸고 몇몇은 공짜 커피에 기뻐했다.
혜주는 물론 후자 쪽이었다.
*
버디 첫날 아침이었다.
주원은 아침 샤워를 마친 후 머리를 툭툭 털며 옷장 앞에 섰다.
데이터스 코리아의 복장 규정은 캐주얼한 편이라 굳이 슈트를 입지 않아도 됐지만 빳빳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입을 때의 감촉이 좋아 주원은 와이셔츠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휘리릭.
주름 하나 없는 하얀색 와이셔츠가 탄력 있는 몸에 착 감겼다. 단추를 하나씩 잠그고 마지막으로 커프스 버튼을 채운 주원이 팔짱을 낀 채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파란색 옷이라. 별 귀찮은 걸 다 시키는군.”
평소 같으면 이대로 나갔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미션이 있었다.
[버디 프로그램 1일 차 미션.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서로의 버디가 누군지 확인하기.]
주말 제외 총 열흘 동안의 버디 프로그램엔 다섯 개의 미션이 있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회사 근처 맛집에서 같이 밥 먹기, 인사팀에서 배부한 책자 함께 공부하기, 사내를 돌아다니며 각 팀의 업무와 구성원을 소개하고 도장 받기 등등 자질구레한 미션이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것으로, 버디와 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사진 찍어 오기였다.
“소꿉놀이도 아니고 이딴 걸 왜 하는 거야.”
신규 입사자의 원활한 회사 적응을 위해 일대일 과외 선생을 붙여준 셈인데 주원은 이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표로 입사하면서 그 정도 공부도 안 했을까 봐?’
입사하기 전 두 달 이상을 코피 터지게 공부한 자신이 우스워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주원은 아직 자신의 버디가 누군지도 몰랐다. 사업팀 누구라고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너무 바빠서 흘려들었다. 아예 까먹을 뻔했는데 그나마 아침에 파란 옷을 기억해낸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대표된 지 석 달만 지났어도 이깟 거 확 폐지해버리는 건데.”
주원은 구시렁거리며 파란색 니트를 숄처럼 어깨에 걸쳤다.
회사에 도착한 주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출근 시각 10분 전. 아직 로비엔 파란색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기왕이면 남자 직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또 쟤야?”
멀리서 파란색 스커트를 입은 혜주가 보였다.
흰 블라우스와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색감을 뽐내는 펜슬 스커트. 구불거리는 긴 머리는 돌돌 말아 높이 묶었다. 발랄한 옷차림과 달리 얼굴은 온통 우거지상이다.
왜 오혜지가 여기서 나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어제 들은 이름은 그 이름이 아니었다. 사업부 소속 누구라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참, 오혜지도 사업부였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잠깐 생각하던 주원은 이내 답을 찾아냈다.
주원의 버디로 당첨된 건 사업부 소속의 모 직원. 아마도 같은 사업부이니 혜주와는 친분이 있을 것이다. 버디를 바꿔 달라고 조르기라도 한 건가?
‘저거 아직 마음 못 접은 거 맞네.’
그럼 그렇지.
주원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