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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바다 갈래? (8/121)


#8. 바다 갈래?
2022.06.26.



 


“살려달라…….”

혜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주원의 앞으로 나아갔다.

출근 30분 전 루비에게 연락을 받았다. 어제 먹은 굴전이 잘못되었는지 밤새 죽죽 쌌다고, 이 상태론 도저히 출근이 불가능하다는 연락이었다.

루비는 혜주와 같은 사업부 소속으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였다. 오전 업무를 대신 좀 맡아줄 수 있겠냐는 부탁에 흔쾌히 그러겠다 대답했는데, 아뿔싸. 그 오전 업무가 강주원의 버디였다니.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어제 루비가 주원의 버디가 되었다는 얘긴 들었지만 워낙 아웃오브안중이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후 루비에게서 오전 업무를 정리한 문자메시지를 받았고 그때서야 오늘 해야 할 일이 강주원의 버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화를 하려 했으나 병원에라도 갔는지 루비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때문에 혜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파란색 스커트를 입고 출근한 것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혜주는 키보드로 찍어낸 말투로 인사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한시라도 빨리 헤어져야지.’

몹시 다행히도 오늘 수행할 첫 번째 미션은 ‘파란 옷 입고 같이 사진찍기’라 10초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접었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나랑 버디 되려고 용 썼네. 아닌 척하더니 그걸 또 신청했어?”

뭐래, 이 인간이.

거만하게 입술을 말아 올린 주원을 보니 천년 묵은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혜주는 미간에 줄을 새긴 채 대꾸했다.


“신청 안 했습니다. 원래 대표님 버디는 사업부 이루비 씨였어요. 이루비 씨가 부득이 배탈이 나는 바람에 제가 대신 온 겁니다.”

“그래?”

“그렇다니까요.”

“기회 생겼다고 덥석 문 건 팩트네.”

이 인간이 진짜!

혜주는 어금니를 꽉 물고 한 자 한 자 끊어 뱉었다.


“사진이나 찍고 찢어지죠.”

“오늘 미션의 의미가 대충 사진이나 찍고 찢어지란 의미는 아닐 텐데? 버디 프로그램의 취지도 모르나?”

그딴 취지 알고 싶지 않고요.


“회사 짬밥이 몇 년인데 그렇게 안일하게 일하는 거냐고.”

이런 일에 짬밥까지 등장할 일인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회사에서 돈 줘가며 시간 써가며 굳이 버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가 뭘지.”

“저기요.”

스팀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온 혜주가 콧김을 내뿜으며 항변하려 할 때였다.


“첫 번째.”

주원이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반쯤 열렸던 혜주의 입술이 마법의 주문에 직격당한 것처럼 다물렸다.


“같은 색의 옷을 입으라는 건 소속감을 줌과 동시에 선, 후배 간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없애주기 위함이지.”

“……알거든요.”

“사진을 찍으란 건 미션 수행도를 평가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는 서로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서야.”

“…….”

“굳이 비싼 인력을 놀리며 버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건 신규 입사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기존 입사자가 가진 정보로의 접근성을 높여 앞으로의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게 돕자는 의미야. 꼴랑 사진 한 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청산유수처럼 쏟아진 말에 혜주는 멍해졌다.

강주원이 저렇게 말을 잘하는 인간인지 처음 알았다. 그 인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디 무용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 기절초풍했을지도.

끔뻑끔뻑.

눈만 깜빡이던 혜주는 몇 초 후에야 정신을 회복했다.


“네. 대표님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겠고요.”

하늘 같은 대표님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박하기도 뭣하고 사실상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내일부터 이루비 씨가 복귀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좋은 의미는 루비 씨와 찾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주원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냉소를 지었다.


“책임감이 없네.”

“누가. 제가요?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얘깁니다.”

“땜빵이라도 할 일은 제대로 해. 일에 사적 감정 개입하지 말고.”

지금 사적인 감정은 누가 개입하고 있는데!

만난 김에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지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질질 끄냔 말이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고요.”

“나가서 찍자. 예쁘게.”

“굳이요?”

“홍보 책자에 쓰이잖아. 사내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구인 사이트에 올라갈 수도 있지. 데이터스 코리아만의 자유분방한 사내 분위기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기회라고.”

말빨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좋아요.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바다 갈래?”

“미친……! 헙.”

필터 없이 튀어나온 리액션에 혜주가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주원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짙은 눈썹을 힐끗 한 번 올리는 게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업무 장소와 너무 동떨어진 곳은 지양하는 게 좋겠습니다. 곧 회사로 복귀해야 하니까요.”

“옷 콘셉트가 그런 쪽이라 해 본 말이야. 밥이나 먹자.”

“지금 아침 아홉 시인데요.”

“해장이 필요해. 어제 과음해서.”

결국 회사 프로그램을 빌미로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거군.


‘대표가 이래도 돼?’

혜주는 구시렁대면서 얼른 휴대폰을 들었다.

본능적으로 회사 근처의 해장국 맛집을 검색하는 제 모습에서 월급쟁이의 비애가 느껴졌다.

*

혜주가 선택한 곳은 회사에서 5분 거리의 해장국 집이었다. 선짓국을 기가 막히게 한다는 맛집인데 아침 댓바람이라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선짓국 드시죠?”

“없어서 못 먹지.”

타임스퀘어에서 브런치 먹게 생겨선 식성이 의외였다. 혜주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주문을 했다.


“그럼 메뉴 통일할게요. 이모님! 여기 선짓국 두 개요.”

그 모습을 주원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부담스러워 혜주는 애꿎은 메뉴판만 이리저리 뒤적였다.

선짓국이 나오기까지 3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한술 뜨기도 전에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사진 먼저 찍을까.”

다행히 주원이 정적을 깨주었다.


“아…… 네, 좋아요.”

“네 휴대폰으로 찍어.”

“네.”

혜주가 얼른 휴대폰을 들어 셀카 모드로 장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혜주는 미션을 완료하는 게 밥보다 급했다.


“안쪽으로 좀 들어와요. 얼굴 안 나오잖아요.”

워낙 테이블이 넓어서 그런지 팔을 최대치로 뻗어도 두 사람의 얼굴이 잡히지 않았다. 파란색 옷으로 맞춰 입은 것까지 보이게 하려면 좀 붙어서 찍어야 하는데 강주원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기는 싫었다.


“몸을 안쪽으로 기울여 보라고요. 셀카 찍을 줄 몰라요?”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가며 낑낑대는 혜주를 주원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네 팔이 짜리몽땅한 걸 왜 내 탓을 해.”

“짜리몽땅 하다니요? 저 나름 비율 좋거든요?”

“퍽이나.”

발끈한 혜주가 홱 노려보았다. 주원은 비웃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리 줘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밀자 주원이 팔을 쭉 뻗어 사진을 찍었다.

찰칵.


 
두 사람의 상반신 전체가 담긴 사진이 1초 만에 완성되었다.

저 인간 팔이 긴 게 왜 이렇게 억울하냐. 그 와중에 눈을 반쯤 감아서 더 억울했다.


“다시 찍어요.”

“됐어. 그걸로 해.”

“나 눈 감았잖아요! 혼자만 잘 나오면 끝이에요?”

“원판 불변의 법칙이야.”

이거 싸우자는 건가.

파이터 본능이 드글드글 끓었다.


“선짓국 두 개 나왔습니다!”

때마침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팔을 걷어붙이고 한 판 떴을지도 모른다.

혜주는 열 받은 만큼 고춧가루를 팍팍 뿌렸다. 그러곤 뚝배기에 얼굴을 처박고 먹기 시작했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던데 또 시비 걸진 않겠지.’

뭔 말만 하면 계속 지는 기분이라 차라리 아무 말 없이 밥 먹는 데만 열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걱우걱.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쉼 없이 숟가락을 놀리던 그때였다.


“야, 오혜지.”

“왜요.”

“왜 대답해? 너 오혜지 아니잖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주원이 손을 뻗어 혜주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잡아당겼다.


“오혜지 아니고 오혜주였네. 왜 말 안 했어?”

“아, 그거요?”

혜주가 밥알을 씹으며 대꾸했다.


“상관없어서요.”

“뭐가.”

“대표님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서 그랬다고요.”

단호박 저리 가라 할 만큼 냉정한 말투에 주원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상관이 없어? 왜 없어?”

“사실 정정할 틈이 없기도 했고요. 그렇잖아요. 승원이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상황이 좀…… 그리고 회사에서 대표님이 제 이름 부를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주원의 안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상관이 없다, 라.’

주원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쟤 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좋아하는 사람이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데 기분이 나쁘지도 않나? 왜 상관이 없지? 왜? 왜?

그의 마음에 일어난 소용돌이를 알지 못한 혜주는 선짓국을 뜨며 건성으로 말했다.


“제 사원증 좀 놔주시겠어요?”

“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원이 사원증을 놓았다. 팽팽하게 사원증을 잡아당기고 있던 혜주는 순간적인 힘의 공백에 그만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리고, 풍덩!


“우왁!”

허공으로 떠오른 사원증이 정확히 선짓국으로 골인했다.


“!”

네모난 플라스틱이 선짓국에 골인한 순간 새빨간 선짓국이 파바밧 튀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선짓국이 점점이 얼룩졌다. 밥 먹다 봉변을 당한 혜주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망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손에서 힘을 빼면 어떡해요? 그러게 내가 로비에서 사진이나 찍고 찢어지자고 했잖아요! 전생에 원수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요?”

“누가 할 소릴.”

으스스한 주원의 음성에 혜주가 고개를 들었다.

티슈로 옷을 닦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주원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이내 숨길 수 없는 승리의 미소가 그녀의 만면에 떠올랐다.


“크흐흐흐흡!”

선짓국 테러를 당한 건 비단 혜주만이 아니었다.

주원의 상황은 더욱 개판이었다. 혜주가 다급하게 사원증을 건져내며 튄 선짓국이 주원을 맹공격하는 바람에 그 잘난 얼굴이 시뻘건 국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특히 인중에 정확히 튄 한 방울이 인상적이었다. 코피처럼 주륵 흘러내리는 광경에 혜주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 대표님 얼굴……!”

“……웃냐?”

도리도리.

혜주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원은 티슈를 뽑아 얼굴을 정비하며 말없이 혜주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암흑의 기운이 흘렀다.


“죄송해요. 제가 웃으려고 한 게 아니고…… 끄읍…… 선짓국이 꼭 코피 터진 것처럼 튀어서 웃음이…… 끄읍……!”

“적당히 해라.”

“네엡. 끄흣…….”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주원이 법인카드를 탁 내려놓고 일어났다.


“수습하고 복귀해.”

“가시게요?”

“그럼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냐?”

인상을 구기며 일어서는 주원을 보고 혜주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내가 너무했나? 명색이 대표님인데 선짓국 테러를 한 걸로 모자라 가열차게 비웃기까지 했으니…… 이러다가 내일 당장 책상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 그렇게 치사한 인간은 아니겠지…….”

그 순간 주원이 홱 돌아섰다. 혼잣말을 하던 혜주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곧추 폈다.


‘헉, 들었나? 저 표정 뭐야. 설마 한 대 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성큼성큼.

그의 걸음이 다가올 때마다 혜주의 등허리가 위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펴졌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코앞으로 주원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혜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으나 예상했던 참사는 없었다. 대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입든가.”

툭.

혜주의 무릎 위로 떨어진 것은 주원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파란색 니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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