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꼬칫집에서 생긴 일 (9/121)


#9. 꼬칫집에서 생긴 일
2022.06.30.



 


“이걸 왜 절 주세요……?”

이거 설마 호의인가. 강주원이 나한테 그런 걸 베풀 리가 없는데.


“그 상태로 거리 활보하면 어디 가서 쥐여 터지고 온 줄 알 거 아니야.”

……그럼 그렇지.

호의인 듯 호의 아닌 호의 같은 말에 혜주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혜주는 선짓국이 튄 블라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핏자국 같긴 했다.


“감사합니다.”

끄덕.

주원이 시크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혜주는 주섬주섬 블라우스 위에 니트를 걸쳤다. 파란색 스커트에 파란색 니트. 난생처음 입어보는 패션에 순식간에 자신감을 잃은 그녀의 귓가로 비웃음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크레파스 같네.”

픽 웃음 지은 주원이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혜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같은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조카 크레파스 확 발라버릴라. 아오.”

당장 벗어던질까 하다가 꾹 참았다.

덕분에 엉망이 된 블라우스는 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긴 했다.

강주원에게, 처음으로.

*



“그래서 아침 댓바람부터 생난리를 쳤다니까. 크레파스 패션으로 강남대로 활보하는데 진짜 얼굴이 화끈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

“쿡쿡, 크레파스 패션이라니 생각만 해도 웃기다.”

“웃을 일이 아니야. 진심 땅으로 꺼지고 싶었어.”

퇴근 후 혜주는 다희를 만나 오늘 있었던 일을 푸념하는 중이었다. 매주 함께하던 꼬칫집에서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떠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 그 옷은 어디 있어?”

“가방에. 다행히 회사에 여벌 옷이 있어서 바로 갈아입었어. 세탁해서 돌려줘야지.”

“아깝네. 오혜주 크레파스 패션 볼 기회였는데.”

“됐어. 눈 버려.”

다희가 키득키득 웃으며 앞접시에 어묵꼬치를 덜어주었다. 혜주는 다희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그나저나 강주원 대표님 의외다. 버디 프로그램 같은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되게 적극적이네?”

“적극적이다 못해 완전 신봉자 납셨어. 버디 프로그램의 취지와 필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라.”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푸흡!”

혜주의 목구멍에 반쯤 먹던 어묵이 탁 걸렸다.


“왜 얘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

“그렇잖아. 캐릭터에 안 맞게 버디 프로그램에 적극적인 데다가 사진만 찍고 헤어지면 될 걸 굳이 식당까지 데려갔다면서? 게다가 옷도 벗어줬다며.”

“대표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으니 회사 문화에 적응하려는 거겠지. 식당에 데려간 건 해장이 필요해서고. 너 같으면 좋아하는 여자랑 선짓국 먹으러 가겠냐.”

“음,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다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넌 어땠어?”

“나 뭐.”

“좋아하는 남자랑 버디 돼서 좋았겠네? 아니야?”

“별로.”

다희 앞에서 주원을 좋아한다고 폭탄 발언을 한 사실조차 잊고 있던 혜주가 뜨끔해서 덧붙였다.


“나 이제 마음 접었다니까. 그러니까 이제 강주원 대표님이랑 엮지 마.”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래. 말 꺼내는 것도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그러게. 이게 무슨 감정일까.

혜주는 어묵을 뒤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원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을 들킨 기분이랄까.

아마도 다희에게 주원을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싫은 게 아니라 불편해서 그래. 강주원 대표님 앞에서 자꾸 흑역사를 생성하게 되니 그것도 불편하고.”

일리가 있다는 듯 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 일을 얘기했다.

팀은 달랐지만 그렇게 큰 규모의 기업이 아니다 보니 서로의 팀원이나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편이었다.

원래 주원의 버디로 당첨됐던 루비가 배탈이 났다는 얘기에 다희가 무심코 픽 웃었다.


“배탈이 꽤 심하게 났나 보네. 쌤통이다.”

“쌤통?”

혜주가 조금 놀라 되물었다. 다희가 뜨끔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평소에 하는 행실이 좀 그렇잖아. 너는 못 느꼈어?”

“어떤 거?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루비 씨 되게 쾌활하고 긍정적이라 좋게 봤는데, 난?”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눈빛이 왜?”

“세상 혼자 사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하잖아. 완전 공주병이야. 주위에서 예쁘다고 떠받들어 주니까 자기가 진짜 공주인 줄 안다니까.”

다희가 누구 뒷담화를 한 건 처음이라 혜주는 조금 얼떨떨했다. 그것도 그 상대가 다름 아닌 사업부에서 혜주와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 루비다.

무턱대고 맞장구칠 수도 없고 따박따박 반론했다간 다희가 서운해할 게 뻔해서 혜주는 대충 말을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꼬칫집 나무 문을 열고 승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미리 약속된 게 아니었는지 다희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그건 혜주도 마찬가지였다.


“강승원이 여기 웬일이야?”

“몰라. 나 오늘 여기 온다고 말 안 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정체였다.


“뭐야. 오늘 회식이야?”

살짝 흩뿌리기 시작한 비를 툭툭 털며 들어선 사람은 바로 강주원이었다.

*

저녁 8시.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사무실은 썰렁했다. 대표실에 홀로 앉은 주원은 뚫어져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백억짜리 계약서를 검토하는 듯 진지한 표정이었으나 실상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아침에 혜주와 함께 찍은 버디 사진이었다.


“눈을 아주 대차게 감았네.”

오후에 혜주가 올린 버디 미션 보고서였다. 인사팀을 거쳐 그에게 최종 보고가 들어와 퇴근 전 확인하는 중이었다.

주원은 턱을 괴고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못생긴 게.”

주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말로는 못생겼다고 하면서 정작 그의 표정은 아주 귀여운 여동생을 보는 듯 포근했다.

혜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티스푼 하나만큼 귀여운 것도 같고.

십 년 전 덥석 떠안기듯 빼빼로를 주고 갈 때도 그랬지만 참 엉뚱한 구석이 많은 아이였다. 불탄 고구마 같은 얼굴로 빼빼로를 선물할 땐 언제고 정작 멍석 깔아주니 내빼질 않나.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그에게 다짜고짜 고백을 하질 않나.


-제가 오빠 좋아한 건 맞는데요. 이제 마음 접었다고요.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마음을 접었단다. 그것도 완전 깨끗하게, 무지 깔끔하게.

대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사귀자고 고백을 한 거면 확실히 거절이라도 할 텐데, 지금 오혜주 하는 꼴을 보면 도대체가 상식 밖이란 말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태도 치곤 너무 밍숭맹숭하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 마음을 접어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그렇다. 고백받은 사람이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도마뱀 꼬리 자르듯 내빼는 법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이건 뭐, 설렘은커녕 망치로 대가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문제는 제 마음이었다. 관심도 없던 애가 마음을 접었다는데 그게 왜 아쉽냐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주니 고마워해야 마땅한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불쌍해서 그런가……?’

복잡한 심경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주원이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오래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니 혼술이나 해야지 생각하곤 사무실 불을 끄려는 순간이었다.

부스럭부스럭.

안쪽 파티션 뒤에서 불쑥 올라오는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아직 퇴근 안 했냐?”

“아, 형.”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난 건 승원이었다. 업무가 꽤 많았는지 다소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이제 퇴근하려고. 형도 지금 끝난 거야?”

“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릴 땐 장난도 곧잘 치곤 했는데 머리 굵은 후 형제들이 으레 그렇듯 두 사람 사이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전광판의 바뀌는 숫자만 말없이 응시하던 주원이 입을 열었다.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갈래?”

“형이 사는 거야?”

“아직 첫 월급 받기도 전인데 삥 뜯을 궁리부터 하네.”

“싫으면 관둬. 나 지난달에 게임 아이템 왕창 사서 지금 개털이야.”

“도둑놈.”

주원이 피식 웃으며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 버튼을 껐다. 1층을 다시 누른 그가 승원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가자.”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꼬칫집이었다. 혜주와 다희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두 사람 모두 조금 놀랐다.


“이쪽으로 와. 대표님도 여기 앉으세요.”

먼저 정신을 차린 다희가 상냥하게 자리를 양보했다. 앞접시를 들고 이동하려는 그녀를 승원이 만류했다.


“그냥 앉아 있어. 우리가 알아서 앉을게.”

“……그럴래?”

꼬칫집은 어묵이 담겨 있는 커다란 냄비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좌석이 있는 다찌 형태의 소규모 매장이었다.

둥글게 휘어진 코너에 다희와 혜주가 앉아 있었는데 다희의 왼쪽 자리엔 손님이 있었고 혜주의 오른쪽은 비어 있었다.

막 들어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혜주의 오른쪽에 착석했다.


“뭐 먹고 있었어?”

“우리 소금구이랑 염통 꼬치!”

“그럼 난 갈비맛으로 시켜야지. 사장님, 여기 주문이요!”

승원이 주문을 하는 동안 주원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메뉴판만 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곁눈질로 혜주를 살피고 있었다. 중간에 승원이 앉아 있어 보이는 거라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베이지색 외투뿐이었다.


‘오혜주 옷 갈아입었네.’

아침에 건네준 파란색 니트 대신 베이지색 외투를 걸쳐 입은 게 왠지 빈정이 상했다. 그래서 주원은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승원아! 어떻게 대표님이랑 같이 왔어? 나 여기 있는지 알고 온 거야? 아, 대표님 계시니 존댓말 써야 하나?”

남자친구가 와서 신이 난 다희가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댔다.


“편하게 하세요. 동생이랑 술 마시러 온 겁니다.”

주원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봐도 어색한 네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로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다희였고 맞장구치는 쪽은 승원이었다.

혜주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분명 자신이 들어서기 전까진 하이텐션을 유지하던 그녀가 갑작스레 말이 없어지니 주원도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지금 바로 옆자리에 있는 승원을 의식하고 있으며, 다희와 자리를 바꿔 앉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원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우리 이렇게 모였는데 건배라도 한번 해요. 물론 대표님이긴 하지만 제 남자친구의 형이기도 하니까요! 참, 아시죠? 저랑 승원이 사귀는 거요.”

사르르 눈꼬리를 접는 다희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혜주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지는 걸 주원은 알 수 있었다.

……왜지?


“건배사 해요. 회식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연장자이니 대표님이 하실래요?”

물정 모르는 다희가 싱글거리며 잔을 채웠다.


“네, 그럼.”

주원이 마지못해 잔을 든 순간이었다.

화르륵!

다찌에서 바로 보이는 주방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화끈, 순식간에 열기가 밀려들었다. 꼬치를 굽던 불판에서 치솟은 새빨간 불길에 네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피해!”

그 순간 승원이 바로 옆의 혜주를 감싸 안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