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안 받아준다고 누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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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 받아준다고 누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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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 받아준다고 누가 그래
2022.07.03.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승원의 심장박동이 귓가에서 울린다. 감싸 안은 두 팔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 그리고 강아지처럼 부드러운 체취.
‘뭐지? 왜…… 나야?’
혜주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승원의 안경이 들어왔다. 제2의 눈과 다름없는 걸 바닥에 내팽개칠 만큼 급박한 상황에서 승원이 자길 먼저 챙겼다는 것에 혜주는 얼떨떨했다.
‘바로 옆에 있었으니 그런 거겠지. 다희는 좀 떨어져 있었으니까…….’
불길을 보고 놀라 반사적으로 옆 사람을 끌어안은 거라고 애써 가슴을 다독여봐도 한 번 날뛰기 시작한 심장은 가라앉질 않았다.
쿵쿵, 쿵쿵쿵.
그건 승원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심장박동이 거세게 귓가를 때렸다. 다찌 밑에 쭈그려 앉은 채 감싸 안은 두 사람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고요했다.
화르륵 솟구쳤던 불길이 거품처럼 가라앉자 사장이 얼른 사태를 수습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들! 부타바라가 워낙 기름이 많은 부위라 가끔 이래요. 많이 놀라셨죠? 허허!”
진정되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삼겹살 꼬치를 굽다가 기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갑자기 불길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넉살 좋게 해프닝을 수습한 사장이 아직도 부둥켜안고 있는 혜주와 승원에게 두 손을 모아 사죄했다.
“많이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우리 꼬칫집 단골분들인데 이걸 어쩌나. 제가 서비스로 닭날개랑 염통 꼬치 넣어 드릴게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혜주가 얼른 승원을 떼어냈다. 승원도 민망했는지 주섬주섬 안경을 챙기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사장님, 진짜 불난 줄 알았잖아요. 이 정도면 소방차 출동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고, 내가 메뉴에서 삼겹살을 빼든가 해야지, 잊을 만하면 이러니 골치 아프네요. 근데 두 분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예?”
“이런 순간에 여자친구부터 챙기는 사람 별로 없는데 보기 좋네요. 예전부터 붙어 다니시더니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
순간 정적이 흘렀다.
혜주는 누가 정수리 위로 얼음 조각을 퍼부은 줄 알았다. 싸늘한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니 다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서 있었다.
“다희야, 넌 괜찮아?”
뒤늦게 승원이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다희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다희야.”
“정말 너무해…… 너희 둘 다 너무하다고!”
다희가 순식간에 가게를 뛰쳐나갔다. 아차 싶은 승원이 가방을 챙길 겨를도 없이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그제야 말실수를 한 걸 깨달은 사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이걸 어쩌나’를 연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 일어난 일에 혜주는 머리가 띵했다.
“미치겠네, 진짜…….”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꼬칫집에서 네 사람이 맞닥뜨린 것도, 불판에 불이 붙은 것도, 승원이 그녀를 먼저 챙긴 것도 어느 것 하나 혜주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희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위급한 순간 애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가뜩이나 심약하고 소심한 다희에게 이번 일이 큰 상처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자리를 바꿔 앉을 것을 괜히 승원의 옆자리에 앉아 이런 사태를 초래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게 강승원은 별일도 아닌 것에 소란을 피워서는.’
괜스레 승원을 원망해 보았지만 찜찜한 기분은 가라앉질 않았다.
“괜찮냐?”
불쑥 주원이 말을 걸어왔다. 혜주는 아직 열기가 남은 것 같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직 거기 있었어요? 가신 줄 알았네요.”
“어디 가서 존재감 없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 잘했죠?”
“어.”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날아다녔고요?”
“어.”
“그래서 다들 아부하는 거예요. 존재감은 개뿔.”
일부러 퉁퉁거리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주원에겐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첫 단추부터 꼬인 관계라 가슴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쌀쌀맞게 나가버린 말투에 조금 후회했지만 주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떽떽거리는 혜주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본론을 꺼냈다.
“좀 의외네. 그 상황에서 승원이가 너 먼저 챙길 줄은 몰랐다.”
주원은 승원이 혜주를 껴안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동시에 혜주를 향해 몸을 날리던 자신의 모습도.
한발 먼저 뛰어든 승원이 혜주를 감싼 순간, 뭐랄까. 두 사람을 휘감은 거대한 막이 생겨나는 듯했다.
그 모습은 도저히 친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희가 그렇게 화를 내며 나간 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옆자리에 있으니 본능적으로 손부터 뻗은 거죠. 강승원 쓸데없이 오지랖 넓어서 주변 사람 잘 챙기는 거 알잖아요.”
변명하듯 말하는 혜주를 주원이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주원도 승원의 반응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워낙 오지랖 넓고 착한 놈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정작 거슬리는 건 뺨을 발그레 물들인 혜주의 얼굴이었다.
당황해서 그런 건가? 아님 놀라서? 그것도 아니면…….
“그만 일어나요.”
“잠깐.”
일어서는 혜주의 손목을 주원이 붙잡았다.
그답지 않게 충동적이었으나 확인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헷갈렸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맞다고 생각하면 아닌 것 같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맞는 것 같은 지랄 맞은 오혜주의 마음을.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주원의 목소리는 낮고 까칠했다. 그리고 진지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시 묻지. 네가 좋아했던 사람이 나인 건 맞아?”
혜주는 붙잡힌 손목에서 열이 번지는 느낌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 일렁이는 주원의 눈동자는 형체가 있는 듯 강렬했다.
순간적으로 왜 가슴이 떨린 건지 혜주는 알지 못했다. 잘생긴 남자가 덥석 손목을 잡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의 모습에서 얼핏 승원이 보인 탓인지.
“좋아했든 아니든 바뀌는 것도 없잖아요. 어차피 대표님은 저한테 관심 없고,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받아주지도 않을 거잖아. 도끼병도 아니고 뭘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해요?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혜주는 그에게서 손목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손은 예상보다 더 단단했고 바라보는 눈빛은 옭아매듯 강렬했다. 오해 없게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끔히 정리한 물건이 우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놔주세요.”
혜주가 손목을 비틀어 주원에게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손아귀에 주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꾸 이렇게 나오니 오기 생기네.’
이게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가. 네가 마음에 두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단 한마디면 되는데.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던 문제가 이제 와서 이토록 궁금하다. 주원은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혜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었다.
“안 받아준다고 누가 그래.”
일순 혜주의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그 틈을 타 주원이 쐐기를 박았다.
“내가 너한테 관심 없다고 말한 적 있었나?”
낮은 음색이 귓가에 스몄다.
“단 한 번이라도.”
쿵.
심장이 진동했다.
*
“다희야, 기다려! 잠시만 나랑 얘기 좀 해.”
꼬칫집에서 나온 다희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가 없었다.
“흐윽…… 흑…….”
불판에 불이 붙은 순간 승원이 혜주를 감싸는 모습이 뇌리에 콕 박혔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한다. 가까이 있었으니 그랬겠지. 오랜 친구 사이니까 반사적으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승원이 혜주를 먼저 구한 게 단순히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일까?’
다희는 그걸 자신할 수 없었다.
승원과 사귄 이후 항상 불안했다. 입사한 후에야 승원을 만난 자신과 달리 혜주와 승원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보아 온 세월이 기니 당연히 둘은 서로에 대해 잘 알았고,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승원이 혜주를 바라볼 때의 눈빛. 언제나 혜주를 향하던 손길. 짓궂은 장난에 섞인 진심들.
뻔히 보이는 마음을 서로만 모르는 바보들.
승원의 마음을 알기에 고백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승원이 혜주에 대한 제 마음을 자각하기 전에, 더 깊어지기 전에 끊어내고 싶었으니까.
‘그래. 난 알고 있었어. 승원이가 혜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혜주가 고백하려던 사람이 승원이란 것도 진즉에 알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할까 한다며 설레하던 혜주의 집에서 조립 중이던 건담을 본 것이다. 건담은 승원이 가장 좋아하는 프라모델이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다희는 모른 척 했다. 굳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혜주에게 따져 물었던 건 그렇게 해서라도 선을 긋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승원은 내 남자라고. 네 입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말했으니 그 말에 책임지라고.
“다희야, 잠깐만!”
곧바로 뒤쫓아온 승원이 다희를 붙잡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다희의 얼굴을 보고 승원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울어?”
꼬칫집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에 아차 하긴 했지만 다희가 이 정도로 상처를 받은 줄은 몰랐던 승원은 무척 당황했다.
“왜 울어…… 내가 잘못했어, 다희야.”
“뭘 잘못했는데?”
“그 상황에서 혜주 먼저 챙긴 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무의식적으로 그런 건데…….”
“그러니까 그 무의식이란 게 왜 혜주만 챙기는 거냐고! 사실 무의식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 아니야? 그 상황에서 네가 제일 걱정한 게 혜주 아니었냐고!”
다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원을 쏘아보았다. 사귀는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둑이 터지듯 쏟아졌다.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좋은 거 있으면 혜주한테 주고 힘든 일 있으면 혜주한테 먼저 털어놓고! 그럴 거면 혜주랑 사귀지, 왜 나랑 사귀어?”
다희가 불같이 화를 내자 승원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애교 많고 쾌활한 다희가 이렇게 격앙된 모습은 처음이었다. 승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알잖아. 혜주랑 나는 그저 친구인 거. 고등학생 때부터 봐와서 가족처럼 친한 애야. 옆에 있어서 먼저 챙겼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
“다희야, 왜 그래…….”
“나 너무 비참해…… 흐윽…….”
다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뜨겁게 쏟아진 눈물에 승원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혜주에 대한 다희의 뿌리 깊은 열등감을 알지 못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금이 간 안경을 추켜올리며 서성이던 그가 엉거주춤 다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흐윽…….”
한동안 진정되지 않던 울음이 승원의 품에 안기자 잦아들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다정한 손길에 다희는 안도감을 느꼈다.
“승원아. 너 내 거 맞지?”
“응.”
“네가 좋아하는 건 나잖아. 혜주랑 더 오래 알았어도 네가 여자로 느끼는 건 나뿐이잖아. 그런 거 맞지?”
“으응.”
“앞으론 나만 봐. 나만 챙기고 나만 구해줘. 알았지?”
“노력할게…….”
토닥이는 손길 한 번에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다희는 승원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끝을 흐리는 승원의 말투에 불안해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