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못…… 입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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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못…… 입으시겠죠?
2022.07.07.
“안 받아준다고 누가 그래.”
“내가 너한테 관심 없다고 말한 적 있었나? 단 한 번이라도.”
훅 들어온 주원의 한마디에 혜주는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깜빡였다. 때마침 사장님이 서비스 안주를 내오지 않았더라면 진짜 분위기 엄했을 뻔 했다.
“서비스 안주 나왔습니다! 아이고, 다른 분들은 먼저 가셨어요? 두분이서 드시기엔 양이 많을 텐데, 아이고.”
습관적으로 ‘아이고’를 덧붙이는 사장의 너스레에 대화의 맥이 탁 끊긴 것은 어쩌면 신이 내린 기회였다.
타이밍은 이때다 싶어 혜주는 냉큼 가방과 쇼핑백을 들고 일어났다.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대표님.”
도망치듯 꼬칫집을 나선 혜주는 곧장 버스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 지나 한산한 버스 안, 창가에 기대어 앉은 혜주의 뇌리로 조금 전 주원의 말이 왱왱 맴돌았다.
“왜 저래, 진짜.”
그의 말은 마치 고백을 하면 받아주겠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스토커 취급하며 경찰에 신고까지 한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 사이 마음이 생길 만큼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없던 동정심이라도 생겼나?’
십 년이나 자길 좋아했다고 하니 뒤늦게 미안한 감정이 든 거라면 그나마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아무리 골몰해도 강주원이 그렇게 착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혜주는 주원의 심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나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진짜 그런 거라면 어떻게 응징하지.
대표와 대리 나부랭이라는 하늘과 땅끝인 직급 차이, 베프의 형이라는 우월적 지위. 심지어 나이에서도 밀린다.
‘욕도 강주원이 더 잘하게 생겼어…….’
즉, 뭘로 비교해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이 입가를 맴돌았다. 혜주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생각에 골몰했다.
다희를 따라 가게를 뛰쳐나간 승원의 모습이 어느새 뇌리에서 말끔히 지워진 것도 모르고.
*
집에 도착하니 수철이 와 있었다.
“아빠,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이제 오냐? 서울 들른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왔어.”
“아빠가 서울 올 일이 뭐가 있다고.”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아빠 서울에 친구 많아.”
수철은 혜주의 아빠로 세상이 알아주는 딸바보였다. 혜주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아내가 세상을 뜬 후로 낮에는 국밥집을 운영하고 밤에는 혜주를 돌보았다.
아이를 맡아줄 곳이 없어 가게에 혜주를 데리고 다니며 심심하다고 칭얼대는 어린 딸에게 짜증 한 번 낸 적 없는 아빠였다.
“딱 보니 오늘도 술 한잔했구만. 회식했냐?”
“아, 몰라. 피곤해.”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수철이지만 그의 눈에 혜주는 여전히 다섯 살 어린 딸이었다. 아침에 마구 벗어두고 간 옷가지가 말끔히 개켜져 있는 걸 보고 혜주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냥 두지. 내가 나중에 치우려고 했는데.”
손발은 씻고 누우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수철은 못 본 새 부쩍 마른 것 같은 딸의 모습에 모른 척 걸레질을 계속했다.
“일이 많이 힘드냐?”
“일이 다 그렇지, 뭐.”
어릴 적 쉼 없이 재잘대던 딸은 어느새 부쩍 자라 예쁜 아가씨가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틱틱대는 딸의 마음을 알기에 수철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아빠는 연락도 없이 왜 왔어? 괜히 자취방 와서 우렁각시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아빠 일도 힘든데 뭐하러 매번 서울까지 올라와.”
“힘들긴, 뭘. 늘상 하는 일이라 상관없다.”
“저녁은?”
“먹었지. 갈비찜이랑 소고깃국 냉동실에 넣어두었으니 내일 아침에 꺼내 먹어.”
“나 알아서 잘 먹고 다니니까 아빠 건강이나 잘 챙겨.”
그 사이에도 수철은 설거지 그릇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바삐 움직이는 거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주가 물었다.
“미옥 아줌마는 잘 계셔?”
미옥은 수철이 만나고 있는 오십 중반의 여자였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혜주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오롯이 홀로 키워온 수철이 느지막이 만난 연인으로, 수철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미옥은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사람이었으나 혜주는 그녀가 새어머니가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아들 때문이었다.
중학생일 때부터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대학에 간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래퍼가 되겠다고 설치고 다녔다. 좋게 말하면 낙천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을러터졌고.
넉넉지 않은 미옥의 형편을 알면서도 용돈 벌이는커녕 매번 돈을 뜯어내려 궁리하는 모습에 없던 정도 떨어졌다.
“늘 똑같지, 뭐. 탈 없이 잘 지낸다.”
그걸 알기에 수철은 혜주 앞에서 미옥의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한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며 거의 부부처럼 지내면서도 혜주에게 엄마 대접을 바라지 않는 건 혜주의 그런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천안 내려가면 한번 인사드릴게.”
“그럴래?”
“못 뵌 지 꽤 됐잖아. 나도 아주머니 보고 싶네.”
“네 얘기 들으면 좋아할 거다.”
반색하는 수철을 보자 혜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피곤해. 나 잘래.”
혜주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누웠다. 따뜻한 데 쏙 들어가니 솔솔 잠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수철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느새 눈이 감겼다.
“버스 시간 다 돼서 좀 이따 내려갈 거야. 세탁기 돌릴 거 없어? 이것만 돌리면 돼?”
“웅…….”
혜주는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오전 내내 빨아둔 이불에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늘 같은 이불이 오늘따라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
화르륵!
불판에 불이 붙은 순간, 단단한 손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체향과 태산같이 굳건한 팔뚝.
설령 저 불길이 용암처럼 덮쳐 올지라도 기꺼이 막아줄 수 있을 것처럼 든든한 품이었다.
‘아…….’
꿈인 걸 알면서도 행복했다. 이젠 바라볼 수도 없게 되어버린 사람이 기꺼이 내어준 품이라 그런지 달콤하기도 했다.
현실에선 구해줘서 고맙단 말을 하기도 전에 부리나케 밀어내야 했던 사람. 좋은 걸 느낄 새도 없이 다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어 죄스러웠던 그때 그 순간.
‘이래서 꿈이 좋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도 없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 혜주는 승원의 아늑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이게 웬 떡이야.’
다희와 승원의 관계를 알게 된 후 마음을 끊어내려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처럼 쉽진 않았지만 습관처럼 비우려 애쓰니 어느 정도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꿈이라니.
아무래도 마음에도 관성이 붙는 모양이다. 머리가 굵은 후 대부분의 시간을 그를 생각하는데 써버려 완벽히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강승원 팔뚝이 이렇게 굵었던가……?’
혜주는 제 몸을 감싼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소 승원은 운동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죽지 않기 위해 겨우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 헬스클럽에 가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게임 근육?’
그럴 수도 있지. 하루 종일 키보드를 눌러대니 팔뚝이 이렇게 우람할 수밖에.
‘자세히 보니 손등에 힘줄도 있네? 마디마디 길쭉한 손가락은 왜 이렇게 예쁜 건데.’
손등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남자다우면서도 섬세한 손이었다.
‘강승원 손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네. 오냐, 꿈에서나마 내가 예뻐해 주마, 우쭈쭈.’
혜주는 승원의 손을 들어 강아지처럼 볼을 비볐다.
그때였다. 정수리 위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미쳤냐?”
“헉!”
우르릉, 쾅!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혜주는 떨리는 눈동자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마를 스치는 살벌한 숨결, 누구 하나 죽일 기세로 쏘아보는 눈빛.
그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꿈인 걸 알면서도 오금이 저렸다.
“대표……님?”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따악!
주원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그 순간 혜주는 꿈에서 깨어났다.
“아야…….”
혜주는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떴다. 어찌나 생생한지 꿈에서 맞은 건데도 이마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씨, 뭐야. 개꿈이잖아!”
에잉, 좋다 말았네.
아무래도 다희의 남친인 걸 알면서도 마음을 끊어내지 못해 벌을 받나 보다.
“하필 그 순간에 강주원으로 바뀔 건 뭐람?”
혜주는 투덜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철은 이미 돌아갔는지 집엔 아무도 없었다. 아침과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을 보니 괜히 마음이 울적했다. 다 큰 딸내미 혼자서 살림도 못할까 봐 매번 이렇게 수고롭게 오가는 아빠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했다.
디링디링디리링!
때마침 세탁 건조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혜주는 뻣뻣한 몸을 이끌고 세탁실로 갔다. 건조기에 켜켜이 쌓인 옷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하나씩 정리를 하기 시작하는데, 못 보던 옷이 하나 들어 있다.
“누구 옷이지?”
혜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끝으로 옷을 들어보았다.
사이즈를 보아하니 수철의 옷은 아닌 것 같고 혜주가 입기에도 조금 작은 듯했다.
“파란색이네.”
중얼거리던 혜주의 안색이 이내 파랗게 식었다.
파란색…… 파란색……?
강주원 니트!!!!!
“맙소사!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니트를 든 혜주의 손이 달달 떨렸다. 건조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수철이 무심코 다른 빨래와 같이 니트를 돌려버린 것이다.
확 줄어버린 니트를 보며 혜주가 절규했다.
“아빠아아아아아!”
*
“못…… 입으시겠죠?”
다음 날, 혜주는 사망 선고를 받은 니트를 들고 대표실을 찾아갔다.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주원이 힐끗 눈썹을 올렸다.
“뭔데, 그건?”
“어제 대표님이 빌려주신 니트요…….”
“가져와 봐.”
딱 봐도 두어 사이즈는 줄어든 니트를 그가 가슴팍에 댔다.
혜주는 절망했다. 파란 니트 뒤로 주원의 건장한 몸이 사방으로 보였다. 팔목까지 내려오던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벨트를 덮던 기장은 배꼽까지 줄어 있었다.
“너 같으면 입겠냐.”
툭. 주원이 니트를 혜주에게 건넸다. 혜주는 두 손으로 니트를 받아들곤 울상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새 걸로 사드릴게요.”
“그러든지.”
보통 이럴 때는 괜찮다고 한 번쯤은 사양하는 게 국룰 아닌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주원을 보며 혜주는 이를 갈았다.
‘이 자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모르긴 몰라도 강주원이 동대문에서 파는 이만 원짜리 니트를 입고 다니진 않을 것 같다. 벌써부터 지갑이 가벼워지는 기분에 혜주는 절망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어젠 잘 들어갔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혜주의 귓가로 주원이 툭 던진 말이 날아들었다. 혜주는 어정쩡하게 돌아선 채 대답했다.
“네.”
“어디 아파?”
“아니요.”
“얼굴이 빨간데.”
그건 열 받아서 그럽니다. 그쪽 옷 물어주려니 천불이 나서요.
혜주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원래 빨갛습니다. 집안 내력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열나는 거 아니야?”
“열은 없……!”
……는데.
불시에 들이닥친 커다란 손에 뒷말이 쑥 들어갔다. 혜주는 제 이마에 손을 올려 체온을 비교해보는 주원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열은 없네.”
꿀꺽.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꿈에서 느꼈던 것처럼.
‘아…….’
가까이 다가선 그에게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반쯤 날아간 향수 냄새와 섞여 오히려 꿈에서보다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체취였다.
흐르듯 내려간 시선이 주원의 손에 닿았다. 강인하게 솟아오른 힘줄을 보는 순간 꿈에서 그의 품에 안겼던 게 떠올랐다. 강인하고 단단했던 가슴과 부드럽게 어깨를 어루만져주던 손길이.
“멀쩡하네. 그만 나가 봐.”
머리 위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음성과 함께 목젖이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들어왔다.
혜주는 멍하니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꿈에서 맡았던 향기와 꿈에서 느꼈던 단단한 손아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건 무척이나 생경한 경험이었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감각은 혜주를 자꾸만 헷갈리게 했다.
그 품에 다시 한번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열없는 거 확인했으니 농땡이 피울 생각 하지 말고.”
“농땡이 안 피우거든요? 갑니다, 가!”
듣는 사람 빡치게 하는 특유의 말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혜주는 후다닥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자책했다.
‘미쳤어, 오혜주! 거기서 설레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밀려드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 왜 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