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니트와 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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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니트와 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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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니트와 커플링
2022.07.10.
혜주는 오전 내내 멍했다.
일이 잠깐 한가해지면 주원의 목울대와 손등에 바짝 선 힘줄이 떠올랐다. 심장이 자꾸만 뛰어 만져보면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내가 요새 너무 굶어서 그래…….’
연애가 뭐 하는 건가요. 먹는 건가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승원을 짝사랑한 터라 연애는 대학생 때 두 번 해 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사귀는 남친이 족족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군대에 가버린 탓에 제대로 된 연애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먼지만 한 자극에도 가슴이 팔딱팔딱 뛰는 거겠지.
가슴이 뛴 상대가 다름 아닌 강주원이라는 사실에 혜주는 자괴감이 들었다.
“혜주야, 점심 같이 먹자.”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다희가 파티션을 두드렸다. 혜주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승원이는?”
“외근 있다고 오전에 나갔어. 점심 약속 따로 없지?”
“응.”
어제 꼬칫집에서 헤어진 후 따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다희가 울면서 나간 게 신경 쓰였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역효과가 날 것 같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그런데 다희가 먼저 말을 걸어주니 혜주는 고맙기만 했다.
“나 점심 먹고 어디 가봐야 해서 멀리는 못 가는데 괜찮아?”
“구내식당에서 먹어도 돼. 어디 가는데?”
“뭐 살 게 있어서 백화점에 잠깐 들르려고. 일단 나가자.”
두 사람은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러 회사가 밀집된 건물이다 보니 식당은 각양각색의 네임 택을 목에 건 직장인들로 북새통이었다. 두 사람은 그나마 덜 붐비는 중앙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메뉴 대박이네. 떡갈비에 고추 잡채까지 있는데? 오늘 식당 이모님 뭐 좋은 일 있으신가?”
“그래서 사람이 많은가 봐.”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동안 다희에게서 평소와 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혜주는 내심 안도했다. 어제 승원이가 자신을 먼저 구하는 바람에 감정이 많이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이따 백화점엔 뭐 사러 가는 거야? 같이 가줄까?”
다희가 고추 잡채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혜주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니트 하나 사려고. 금방 다녀올 거라 혼자 갔다 와도 돼.”
“갑자기 웬 니트? 너 니트 잘 안 입지 않아?”
“응. 내 거 아니고 남자 거 살 거야.”
“남자아아아아?”
혜주는 주원과 있었던 일을 다희에게 얘기해주었다. 그와 식사를 하다 옷에 선짓국이 튀었고 그걸 가리기 위해 주원에게 옷을 빌렸다는 얘기였다.
하필 수철이 그 옷을 건조기에 돌린 탓에 새로 물어내게 생겼다고 말하며 쇼핑백에 든 ‘아기 니트’를 보여줬더니 다희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와, 이게 강주원 대표님 니트라고? 내가 입어도 맞겠는데?”
“요새 건조기 성능이 참 좋더라.”
“딱 봐도 강 대표님이 입을 사이즈는 아니네. 근데 대표님도 참 어지간하다. 그걸 진짜 물어달래?”
“성격파탄자야.”
“큭큭, 승원이 같았으면 옷 빌려준 사실도 까먹었을 텐데. 형제인데 성격이 정반대네.”
다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반짝.
그 순간 혜주의 눈에 반짝거리는 반지가 들어왔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심플한 반지는 누가 봐도 커플링이었다.
혜주는 왠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거?”
시선을 느낀 다희가 쑥스러운 듯 뺨을 붉혔다.
“우리 커플링 맞췄어.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너무 이른 거 아닌가 했는데 승원이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회사에선 빼고 있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깜빡했네.”
다희가 얼른 손에서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강승원은 이제 천다희 거다, 땅땅땅. 눈곱만큼의 미련조차 버려야 한다고.
“예쁘다, 다희야. 너랑 잘 어울려.”
혜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멀리 가버린 첫사랑을 이젠 정말로 보내줘야 할 때였다.
*
“127만 원입니다.”
“백이십…… 얼마라고요?”
“127만 원이요, 고객님.”
새로 산 니트를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민 혜주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가격표도 보지 않고 덥석 꺼내 온 게 화근이었다.
“이 니트 하나에 127만 원이라고요?”
“네, 고객님.”
니트가 그래 봐야 니트지. 비싸봤자 한 이십만 원 하겠지 생각했던 혜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명품관에 있을 때부터 좀 불길하더니만…… 하아.’
혜주는 눈을 비비며 숍의 간판을 다시 확인했다. 꾸불꾸불한 글자로 뭐라 써 있는데 대충 봐도 영어는 아니었다. 아는 명품이라야 루이뷔똥, 버버뤼가 전부인 혜주에겐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계산해 드릴까요, 고객님?”
카드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차라리 죄송하다고 석고대죄를 할까? 아니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석 달 열흘간 도시락이라도 싸다 바칠까? 그것도 아니면…….
“고객님?”
하아.
“계산…… 해주세요.”
찌직, 찌지직. 영수증 뽑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혜주는 거의 울먹이는 눈으로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찍힌 1,270,000이라는 숫자에 머리에서 저절로 계산기가 돌아간다.
저 돈이면 꼬칫집을 일 년 내내 다닐 수 있는데…… 저 돈이면 옷이 몇 벌이야? 대체 월세가 몇 달 치냐고!
오장육부가 아깝다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혜주는 빳빳한 쇼핑백을 와락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강주원,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사치남이네. 이 불경기에 니트 하나에 백만 원을 넘게 주고 사 입다니.”
그러다 보니 현타가 온다.
사실 그 낭비벽이라는 게 강주원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란 걸 혜주는 알고 있었다.
강주원의 집안은 대대로 내로라하는 땅 부자로 지금도 강남에만 고층 건물을 몇 개나 소유한 부유층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니트 한 장에 백만 원이면 검소한 편인지도.
“하이고, 의미 없다…….”
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매장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한 혜주는 무소의 뿔처럼 대표실을 밀고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라 주원은 업무에 한창이었다.
“대표님, 오혜주입니다.”
“무슨 일이야?”
“망가트린 니트요. 새 걸로 사 왔습니다.”
노트북 너머로 힐끗 혜주를 확인한 주원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거기 둬.”
누군 두 달 치 월세에 맞먹는 막대한 출혈을 감수했는데 백 원짜리 눈깔사탕을 대하듯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안 입어봐요?”
“알아서 입어볼게. 나가 봐.”
“……네, 그럼.”
혜주는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대표실과 혜주의 자리는 같은 층에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던 혜주의 뇌리로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내가 방금 새 옷을 사줬잖아. 그럼 작아진 니트는 내가 가져도 되는 거 아니야?’
누군 127만 원짜리 니트를 새것으로 받았는데, 누군 빈털터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하다. 쓸 데가 있든 없든 강주원이 니트 두 개를 다 갖는 것은 계산에 맞지 않다.
“그래! 새 물건으로 보상할 땐 헌 제품부터 수거하는 게 원칙이라 이거야. 살 쫙 빼서 내가 입으면 되는 거 아니야?”
곧 죽어도 강주원 좋은 일은 시키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혜주는 가던 발걸음을 홱 돌려 대표실로 향했다.
어디서 보니 줄어든 니트를 린스 물에 담가두면 좀 늘어난다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써먹어야지.
똑똑똑.
“대표님, 오혜주입니다.”
“어.”
혜주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생각해 보니 말인데요. 아까 그 니트…….”
대뜸 쇼핑백을 찾던 혜주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건 찬란하게 쪼개진 여섯 개의 복근이었다.
“!”
난데없이 맞닥뜨린 황홀경에 혜주의 턱이 벌어졌다. 선명하게 잘 다듬어진 복근은 대낮에 보기엔 황송할 정도로 완벽했다.
“아, 미안. 네가 준 옷 입어보고 있었어.”
주원은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해 니트를 벗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속에 입은 와이셔츠가 딸려 올라가 복근이 훤히 드러났다.
“잘 맞네.”
니트를 완전히 벗은 주원이 탁탁 와이셔츠를 털었다. 질서정연한 근육들이 순식간에 옷 속으로 사라졌다.
“왜.”
“아, 그게…….”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던 혜주가 즉시 용건을 떠올렸다.
“아까 제가 두고 간 니트 말입니다. 그거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가져가도 돼. 네가 입게?”
“네. 어차피 대표님에겐 맞지 않으니까 저라도 입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해.”
주원이 책상 아래 놓아둔 쇼핑백을 건넸다.
웬일로 저렇게 선선히 내어주지? 혜주는 의아해하며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그럼 잘 입겠습니다.”
“그래.”
혜주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 사라졌다.
주원은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어깨에 두르며 그녀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그의 입가가 이내 말려 올라갔다.
“귀엽네.”
굳이 다시 찾아와 맞지도 않을 니트를 챙겨간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설마 쟤, 나랑 커플티 입고 싶은 건가?”
이러면 평소에 입고 다니기 껄끄러워지는데.
“흐음.”
주원은 턱을 쓰다듬으며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새 옷이라 그런가 전보다 더 쨍해 보이는 파란색이 마음에 들었다.
*
동상이몽이 한창인 가운데 승원 역시 혼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 꼬칫집에서 혜주를 감싸 안았던 날의 기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안도감, 따뜻하게 코끝을 간지럽히던 그녀의 머리카락과 작은 어깨.
오혜주가 그렇게 작은지 그때 알았다. 항상 쾌활하고 화통한 성격의 그녀이기에 누나처럼 의지하기만 했지, 지켜줄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술 먹고 길거리에 뻗어도 아무도 안 업어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그때 처음 느꼈다.
어쩌면……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오혜주는 작고 여렸다. 처음 안아본 그녀의 어깨는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랬고 웅크린 등판은 고양이 같았다.
지켜줘야 할 것 같고, 지켜주고 싶고.
그런 기분은 난생처음 느껴본 것이었다. 같은 상황이 다시 닥치더라도 혜주를 먼저 챙길 것 같았다.
‘왜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엄연히 여자친구가 있는 몸이었다. 그런 주제에 마음이 왜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식도 어딘가가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가슴이 아렸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뭐가 문제인지 조금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 얘기 듣고 있어?”
“아아, 응.”
다희는 한창 혜주가 니트를 물어낸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혜주가 백만 원 넘는 거금을 물어냈다는 거 아니야.”
“백만 원이나?”
“정확히는 백이십칠만 원이래. 대박이지?”
딴생각에 잠겨 있던 승원은 문득 다희의 표정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그건 꽤 찜찜한 느낌이었다.
혜주의 두어 달 치 월세가 한 방에 날아갔다는데 다희가 웃는다. 혜주의 불행이 마치 완벽한 타인의 것인 것처럼.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혜주는 절대 웃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승원은 새로 산 신상 게임기를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웃고 있지?
“즐거워?”
“응? 무슨 뜻이야?”
다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