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가자, 회식하러 (13/121)


#13. 가자, 회식하러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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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네 표정이 되게 즐거워 보여서.”

높낮이 없는 승원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다희는 그의 눈동자 안에 숨겨진 날카로운 기운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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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혜주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즐거울 게 뭐 있어?”

저녁 식사 내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승원의 관심을 돌려보려고 온갖 말을 조잘대던 다희였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승원의 주의를 끈 건 오혜주 세 글자였다.

승원 자신은 모르겠지만 다희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가슴에 스멀스멀 불쾌감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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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보니 조금 서운하다. 내가 친구의 불행에 희희낙락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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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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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이.”

다희는 입술을 쭉 내밀며 삐진 척을 했다.

평소 같으면 곧장 뺨을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말했을 승원은 어쩐지 아무 말이 없었다. 참기 힘든 불안함 속에서 초조하게 손톱 끝만 뜯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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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야. 우리 커플링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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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내가 링크 보내준 거 다 봤어?”

승원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에 다희가 반색했다. 얼마 전부터 커플링을 맞추자고 여러 번 얘길 했는데 이제야 답을 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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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지 정했어? 첫 번째 숍이 제일 나은 거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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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당분간 안 맞추는 게 나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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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슴이 쿵 떨어졌다. 승원은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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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끼고 다니면 소문이 많아질 거야. 가뜩이나 너랑 나랑 얽혀 있는 사업도 많은데 괜히 뒷말 나와 좋을 거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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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말 나올 게 뭐가 있어. 미혼남녀가 눈 맞아 사귀는 게 나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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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이라는 게 아니야.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지. 너랑 나 사귄 지도 얼마 안 됐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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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아닌 거야, 아님 나라서 안 되는 거야?”

다희가 쥐어짜듯 물었다.

이미 대답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승원의 입으로 진심을 들을 수 없을 거란 것도 알았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제 마음 하나 들여다보지 못한 멍청이가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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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줘.”

대답이 없는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희가 다람쥐처럼 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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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언제나처럼 승원은 팔을 뻗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나 그 손길에 더이상 따스함은 묻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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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넌 날 밀어내지 않잖아. 여전히 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 그렇지, 승원아?’

울컥 솟구치는 슬픔을 달래며 다희는 주머니 속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커플링이랍시고 혜주에게 내보였던 그 반지였다. 혜주를 속였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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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런 식이니 내가 독해질 수밖에 없잖아.’

성의 없이 등을 토닥이는 승원의 품에서 다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감촉이 차가웠다.

*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주원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관계로 혜주는 나름 순탄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피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니트 사건 이후 혜주는 주원을 만나기 무척 껄끄러워졌다.

비싼 돈 주고 옷을 물어준 게 억울해서라거나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대표실에서 봤던 그의 복근이 떠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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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수양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그거 잠깐 봤다고 인생에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아른거리는지 모르겠다. 혜주는 그것이 전적으로 제 정신 상태의 문제라고 여겼다.

연애를 쉰 지 너무 오래됐지. 게다가 최근엔 열렬한 짝사랑도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그깟 남자의 몸 따위에 현혹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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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같긴 했어…….’

훠이훠이 머릿속에서 밀어내면 어느새 쫙 갈라진 육 쪽 복근이 눈앞에 떠오른다. 물방울이 흐르면 굽이굽이 쉬어갈 것 같은 굴곡진 몸. 그런 몸은 TV에서만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본의 아니게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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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호사는 무슨! 안구 테러야, 안구 테러!”

혜주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내렸다.

모니터엔 그녀가 한창 작업 중인 보고서가 열려 있었다. 업계의 동향과 고객 선호도, 기타 시장 조사를 해 보고 싶다며 최근 연락을 해온 한 수산물 업체였다.

[태양식품]이란 이름의 업체는 조미김을 주로 판매하는 곳으로 해양수산부로부터 수출 공로탑을 받기도 한 강소 기업이었다. 가족기업으로 시작해 규모는 작지만 어마어마한 수출 실적에 힘입어 매출액이 연 1천억 원에 달하는 알짜배기 업체였다.

데이터스 코리아는 전형적인 B2B기업이었다. 기업과 기업 간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리서치를 필요로 하는 기업이 데이터스 코리아에 의뢰를 하고, 데이터스 코리아는 자체의 분석 모듈을 활용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시스템이었다.

각 기업의 니즈를 분석하고 그것을 자극할 만한 계획을 세우는 게 마케팅 부서가 하는 일이라면 사업팀은 그것을 바탕으로 신규 거래처를 뚫는 일을 했다.

즉, 실제 고객을 타겟팅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건 오로지 사업팀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다.

혜주는 마케팅 부서에서 넘어온 자료를 바탕으로 몇 개의 기업에 제안서를 보냈다. 그 중 태양식품도 있었다.

[조미김 선택에 있어 고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및 수출국 선호도 조사]에 관한 리서치 제안이었다. 보통 제안서를 보내도 읽씹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태양식품에서 회신이 왔다.

그것도 무려 연간 계약에 대해 문의하는 것이었다!

혜주는 거의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릴 뻔했다. 태양식품과 연간 계약을 따내면 올해 사업팀 할당량의 10퍼센트를 한방에 해치우는 셈이었다. 그만큼 중요하고 큰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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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디어 입질이 왔어! 나이스!”

혜주는 신이 나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굵직한 신규 계약 건은 빠르게 진행하는 편이 좋기 때문에 대표 직통 라인으로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신인은 주원이었다.

[㈜태양식품 신규 계약 건에 관해 보고드립니다.]

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태양식품에 관련한 제반적인 사항과 향후 기획안을 첨부했다. 태양식품에서 조만간 미팅을 원한다는 얘기를 끝으로 원활한 계약 진행을 위해 가급적 빠른 회신을 부탁드린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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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좋았어!”

빛의 속도로 메일을 전송한 혜주가 손을 탁탁 털고 기지개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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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일을 받으면 강주원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역시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하겠지? 이 정도 계약을 물어왔으면 인센티브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두 발로 직접 뛰어 만들어낸 성과에 몹시 만족한 혜주는 한동안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옆자리 동료들 역시 무척 기뻐하며 계약 성사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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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을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혜주는 메일함을 클릭했다.

[읽음]

주원에게 보낸 메일이 ‘수신확인’ 된 것을 보고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메일을 봤으니 곧 호출이 올 것이다. 자잘한 계약도 아니고 무려 연간 계약이니 대표로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지.

뿌듯한 마음으로 보낸 메일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던 혜주의 눈이 일순간 한 곳에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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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메일에서 괴리감이 느껴진다.

뭔가 이상한데.

혜주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메일을 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가로 경악이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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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억!’

야심차게 작성한 메일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양식품과의 미팅에 앞서 논의할 부분이 있으니 가급적 빠른 회식을 부탁드립니다.]

……회‘식’이라니!

식이라니!

고구마 한 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 턱 숨이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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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어엉…….”

혜주는 울상이 되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공적인 메일에서 이런 실수를 한 건 입사 4년 차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이건 실수가 아니라 대형 사고다. 메일을 확인한 강주원의 비웃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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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강주원에게 으스댈 수 있는 기회였는데, 왜 하필 오타가 난 거야…… 왜 하필 저렇게 없어 보이는 오타냐고!’

혜주는 책상 밑으로 발을 동동거렸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발밑으로 번져나갔다.

*

퇴근 시간.

예상과 달리 주원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회식’이라 적긴 했지만 문맥상 ‘회신’이 분명한데 따로 답신이 오지도 않았다. 언제 메일이 올까 노심초사하며 메일함을 바라보던 혜주는 여섯 시 땡 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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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도망가야지. 이게 웬 쪽이야.’

회식 아니라 회신이라고 따로 메시지를 보낼까, 대표실을 찾아가 볼까 다각도로 고민을 해봤지만 이 상황에서는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강주원 성격을 고려해보면 십중팔구는 놀릴 게 뻔했다. 면전에다 대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문맥상 알아듣게 쓰기는 했으니 때가 되면 연락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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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보겠습니다!”

혜주는 아직 업무 중인 동료들에게 인사를 한 후 가방을 챙겨 나왔다. 혹시나 엘리베이터 근처에 주원이 있을까 봐 이리저리 사방을 살피는 모습이 흡사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후에야 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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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겨우 빠져나왔네.”

사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면서도 회의감이 들기는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그깟 오타가 뭐라고 회사에서 도망까지 쳐야 하냔 말이다.

답은 혜주 자신이 알고 있었다. 상대가 강주원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주원의 앞에서 몇 번이나 흑역사를 생성한 혜주다. 빼빼로에서 시작된 유구한 역사는 입던 팬티와 니트로 연결됐다.

따지고 보면 모두 자신의 실수가 맞기는 했지만 그냥 묻힐 법한 실수도 주원과 엮이는 순간 ‘사고’가 되어버렸다. 일종의 촉매제라고나 할까. 마치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일이 커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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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혜주는 거듭 다짐하며 조용히 로비를 빠져나왔다.

유리문을 열자 상쾌한 바깥공기가 밀려들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퇴근 후의 해방감이 몰려왔다.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한껏 공기를 들이마신 혜주가 밖을 향해 한발 내디뎠다.

그리고 두 발.

어디선가 형체가 있는 듯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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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거야. 분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건 나뿐이었는데…….’

어쩐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혜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잔뜩 웅크린 시선에 누군가의 구두가 보인다.

타박. 타박.

먼지 한 톨 없는 새카만 구두가 한 발 한 발 땅을 내디뎠다. 얼핏 봐도 두 다리가 길쭉했다. 혜주는 못 본 척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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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내빼?”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정확히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 웃음기 섞인 낮은 음성에 혜주의 고개가 딸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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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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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 땡 치자마자 나왔네. 어지간히 급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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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긴 누가요. 설마 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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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하자며.”

까딱까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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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가급적 빨리.”

혜주는 주원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법인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주원의 머리칼이 살짝 흩날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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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회식하러.”

그가 미소를 지었다.

쿵.

심장이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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