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금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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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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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지어
2022.07.17.
아, 그건 오타였는데요. 회식 아니고 회신이요. 그러니까 회식은 굳이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똑부러지게 말했어야 했다.
“둘이서만……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냐.”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하다가 주원에게 코가 꿰인 혜주는 어느새 막창집에 와 있었다.
“사장님, 여기 불막창 2인분에 소주 한 병이요!”
어디 그뿐인가. 자리에 앉으니 홀린 듯 주문까지 하고 말았다.
모든 건 다 이 불막창 때문이다. 매운 거라면 환장을 하는 식성을 어찌 딱 알고 회식 장소를 정한 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주문을 마친 후에야 팔짱을 끼고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머쓱해진 혜주는 테이블에 깔린 마카로니를 괜히 들었다 놨다 하며 분주한 척을 했다.
“메일 봤어.”
혜주는 의미 없는 젓가락질을 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네, 보셨겠죠.”
“잘했어.”
혜주가 멈칫했다.
강주원에게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리 거창하지 않은 담백한 한마디지만, 그래서 더욱 강주원다운 칭찬이었다.
“태양식품과 계약이 성사되면 올해 목표실적 120퍼센트 이상 달성할 수 있겠더군. 연간 계약이라 잘만 하면 그 이상도 가능하겠어.”
“그렇죠? 제가 그것까지 다 예상하고 컨택한 거라니까요.”
“태양식품에 제안서를 넣을 생각은 어떻게 했지?”
“저희 아빠가 항상 도시락을 싸줬거든요. 그때 늘 태양 파래김을 도시락에 넣어주셨는데.”
혜주가 마카로니를 꿀꺽하며 말을 이었다.
“서울 와서 종종 그 맛이 생각나서 몇 번이나 사려고 했는데 마트에 잘 없더라고요. 물어보면 몇 해 전까진 납품했는데 매출이 저조해 철수했다고 하더라고요. 구내식당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고요.”
“해외 수출 1위의 조미김 업체지만 의외로 국내에선 먹히지 않는다는 반증이겠지.”
“네! 저도 그 점을 지목하고 싶었어요.”
혜주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죠. 모르겠더라고요. 맛도 있고 포장도 깔끔하고 인지도도 있고. 차라리 맛이 없는 거면 이해를 하겠는데 제 입맛엔 업계 1위의 파래김보다 훨씬 맛있거든요.”
“음.”
“이유를 알 수 없는 매출 부진. 어쩌면 태양식품에서도 이유를 모르지 않을까. 어쩌면 제일 궁금해하는 사람이 그쪽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주원은 팔짱을 낀 채 집중하여 혜주의 얘기를 들었다. 평소엔 나무늘보처럼 허술해 보이는 애가 이렇게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열정엔 전염성이 있다더니, 정말 그런 걸까.
“이유는 소비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합리적이잖아요. 그러니 한번 물어보자고 제안한 거죠. 우리 데이터스 코리아와 함께!”
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나름대로 파이팅은 있는데 그 와중에 주먹이 작아서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주원은 웃음이 날 뻔한 것을 꾹 눌러 담은 채 괜히 핀잔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용케 한 건 했네.”
주원의 뇌리로 입사 후 검토했던 직원들의 업무평가서가 떠올랐다.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는 회사의 성장세에 맞춰 대부분의 직원이 좋은 평가를 얻었으나, 혜주의 업무 실적은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입사 후 4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A등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되는군.’
새삼스럽게도 덜렁이 오혜주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굼벵이라니요. 거 말씀이 심하시네. 우리 아부지 들으시면 뒷목 잡고 쓰러져요.”
“아버지 표 도시락 김이 큰일 했으니 계약 성사되면 인센티브는 아버지께 쏴드린다고 전해드려.”
“오, 그럼 쓰러졌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두둑이 주실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혜주가 꿈을 꾸듯 두 손을 모았다.
“계약까지 무사히 갔으면 좋겠다. 그쪽에선 우선 미팅을 해 보고 결정한다고 하더라고요.”
“내일 당장 미팅 일정부터 잡을게.”
“대표님이 직접요?”
“실무 감각 익혀야지.”
그럼 앞으로 태양식품 건은 쭉 같이하잔 소린가? 대표 전결이면 업무에 속도가 붙긴 하겠지만, 단둘이 맡는 건 좀…….
“그런데 갑자기 왜 회식하자고 한 거예요? 아까 그 메일 오타인 거 아시잖아요.”
부담스럽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혜주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편한 사이여도 일개 직원이 대표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원의 대답은 의외였다.
“미안해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원을 바라보았다.
“맞춰 봐.”
주원이 비스듬히 턱을 괴며 미소를 지었다.
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수많은 별을 품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살짝 눈꺼풀 사이로 감춰지고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혜주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어…… 그게…….”
“맞추면 선물 줄게.”
선물이고 나발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런 웃음. 저런 얼굴.
강주원이 내 앞에서 웃은 게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왜 내 심장은 난생처음 마주한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쿵쿵대는가.
*
몇 시간 전.
커피 한잔하기 딱 좋은 오후에 승원이 대표실을 찾아왔다.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손에 바닐라라떼를 들고 들어서는 그를 보며 주원이 드물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웬일로 예쁜 짓을 다 하네. 앉아.”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라 주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캐리어에서 쏙 빼서 자리에 앉았다. 승원은 자연스럽게 바닐라라떼를 꺼내어 앞에 두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형제가 이렇게 마주 앉은 건 처음이었다. 개발팀과 회의가 있을 땐 주로 대회의실을 이용하기 때문에 승원이 굳이 찾아오지 않는 한 대표실에서 볼 일이 없었다. 처음 본 형의 방이 신기한지 승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전하곤 인테리어가 좀 바뀌었네. 따로 공사는 안 한 거 같은데 분위기가 완전 다른데?”
“그래? 이전엔 어땠는데.”
“지금보단 덜 삭막했지.”
예전보다 깔끔해졌다는 반응을 기대한 건 역시나 헛된 바람이었나.
사람 키만 한 화분이며 조잡한 그림이며, 이전 대표가 남겨놓은 잡동사니를 치우느라 노동력을 얼마나 갖다 바쳤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그러지 말고 화분이나 그림 같은 거 좀 갖다 놓으면 어때? 지금은 무슨 모델하우스 같아.”
갖다 버린 걸 다시 가져다 놓으라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이냐.
“됐어. 이것저것 늘어놔 봐야 정신만 사나워.”
“그래도…….”
“내 방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고. 커피 주러 온 거야?”
주원은 형편없는 승원의 안목에 개탄스러워하며 혀를 쯧쯧 찼다. 승원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니트 말인데.”
주원은 반사적으로 혜주를 떠올렸다.
“파란색 니트?”
“어. 혜주가 실수로 건조기에 돌렸다며. 그래서 새 옷으로 다시 사다 줬다고 들었어.”
“그랬지.”
“그거 꼭 받았어야 했어?”
생각지 못한 물음에 주원은 조금 놀랐다.
그 니트를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혜주가 그러겠다 하기에 건성으로 오케이한 거지, 사실 그 니트를 돌려주지 않았더라도 개의치 않았을 거다. 혜주가 찾아왔을 때 업무로 정신이 없기도 했고.
“꼭 돌려달라고 말한 적 없어. 내가 언제 옷 욕심 내디?”
“형이 옷에 별로 관심 없는 거 알아. 엄마가 보내준 옷 아니면 직접 쇼핑도 잘 안 하잖아. 그래서 하는 얘기야.”
“오혜주가 뭐라고 해?”
“혜주는 아무 말 안 했어. 내가 속상해서 그래.”
오혜주 일에 왜 네 속이 상하냐. 괜히 거슬리는 말에 주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승원은 바닐라라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형은 잘 모르겠지만 혜주 형편이 그렇게 넉넉지 않아. 월급 뻔한데 월세 내고 생활비 쓰고 하면 남는 것도 별로 없다고.”
“…….”
“아니, 굳이 혜주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은 니트 한 장에 백만 원이 넘을 거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한다고. 형이 새 니트를 받은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으면 그냥 넘어가 줬으면 좋았겠다, 지금 그 얘길 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승원이 지적하자 주원은 고심이 깊어졌다.
강 씨 고집이 보통 아니라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주원은 반성과 사려를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혜주와 마주 앉아 불막창을 굽고 있는 거고.
“결국 승원이한테 한 소리 들은 거네요?”
주원의 얘기를 들은 혜주가 실소를 흘렸다. 누군 두 달 치 월세를 훌쩍 넘는 거금을 지출하며 팥죽처럼 속을 끓였는데, 누군 저렇게나 천하태평이었다니.
평범한 것에 만족할 줄 알기에 타인의 삶을 부러워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돈에 대한 강주원의 저 무심함이 부럽기는 하다.
“걔가 백 마디를 했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거야.”
낮게 침잠한 주원의 눈동자가 혜주를 향했다.
“나나 승원이나 자신 외엔 관심이 없는 놈들이야. 삶의 기준이 다양하지 않은 편이지.”
“강 씨 집안 내력인가요?”
“아니라곤 못 하겠네.”
주원이 피식 웃으며 잔을 매만졌다.
“생각을 좀 해봤어.”
“뭘요?”
“그 돈, 돌려주면 받을 건가?”
혜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삥 뜯긴 것도 아닌데.”
“그럴 거 같더라.”
“아하, 이제 알았다. 미안하니까 술 사주려고 부른 거네요? 에이, 127만 원에 술 한 잔은 너무 적게 쓰셨다.”
“누가 한 잔만 산대?”
“그럼……?”
“127만 원어치 사줄게.”
그의 제안에 혜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술자리라면 마다하지 않는 그녀다. 특히 맛있는 안주와 함께라면 언제든 콜.
“오늘 다 써야 해요?”
머릿속으로 열심히 짱구를 굴리는 그녀를 향해 주원이 빙그레 웃었다.
“유효기간 1년 줄게.”
“진짜죠? 시간 없다고 빼고, 바쁘다고 빼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알죠?”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무조건 지갑 연다.”
“그럼 1년 내내 잘 얻어먹겠습니다. 미리 감사해요.”
주원은 생글생글 웃는 혜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숯불의 열기로 발그레 익은 두 뺨이 복숭아처럼 예뻤다.
혜주는 잘 구워진 막창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불막창 보니 강승원 생각나네요. 걔도 매운 거 킬러거든요.”
이 와중에 강승원 생각을 왜 하냐.
별거 아닌 말이 모래알처럼 까슬거린다.
주원은 깨끗한 제 앞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사실 매운 걸 잘 못 먹었다. 혜주의 추천으로 여기 들어왔을 뿐이었다.
쟤는 내가 안주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려나.
“강승원 아직 퇴근 안 했을까요? 아직 회사에 있으면 한번 불러볼까요?”
“됐어.”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이잖아요. 다희도 같이 오라고 하면 바로 올 거 같은데요? 이 가게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막창집이거든요.”
“됐다고.”
기분이 이상하다. 무슨 얘기를 해도 기승전 ‘강승원’.
시시콜콜 할 말 많은 사이는 아니어도 다른 주제를 얘기하자면 끝도 없었다. 불막창과 그냥 막창 중 뭘 더 좋아하는가부터 소주파냐 맥주파냐, 하다못해 회사 얘기도 있고.
그런데 오혜주는 왜 강승원 얘기만 하는 걸까.
“게임 하나 하자.”
이상하리만치 거북한 감정이 드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혜주의 입에서 다른 남자 얘기가 나오는 게 싫었다. 설사 그게 자신의 동생이라도.
“술자리 게임이요? 좋아요. 뭐 할까요?”
“금지어 게임.”
“아, 서로 금지어 지정해주고 그 말 나올 때마다 술 마시는 게임이죠?”
“맞아.”
나 강주원. 특전사 갈 뻔한 남자.
‘안 되면 되게 하라’를 잠꼬대로도 수십 번 외친 남자.
“내가 먼저 제시할게.”
주원은 기대에 찬 혜주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강승원.”
“……강승원이요?”
생각지 못한 제시어에 혜주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