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재차 반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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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재차 반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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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재차 반했냐?
2022.07.21.
‘금지어가 강승원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제시어에 혜주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보통 이럴 땐 ‘외래어 금지, 감탄사 금지’ 이런 거 하지 않나?
‘내가 강승원 얘기를 너무 많이 했나……?’
혜주는 조금 반성했다.
그렇다고 해도 금지어로 지정할 정도로 듣기가 싫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 얘기잖아. 게다가 험담도 아닌데, 왜?
“너는?”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남들보다 선이 분명하고 깊은 눈동자. 일명 우수에 찬 눈빛이랄까. 술이 한잔 들어가니 더욱 깊어진 눈매에 혜주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강주원한테 가슴이 뛰어? 내가……?’
이 와중에 두근거리는 게 자존심이 상한 혜주는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이 나오긴 했다.
‘오혜주, 술이 약해졌네. 취해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거지, 암.’
요새 너무 절주를 한 탓이다. 단둘이, 술자리에서, 저 정도 생긴 남자가 빤히 쳐다보면 누구라도 긴장할 만하잖아. 안 그래?
“뭘 그렇게 쳐다봐. 재차 반했냐?”
“반하긴 누가요? 하, 지나가는 똥개가 웃겠네.”
“미리 말해두는데 너 술 사준다 했지, 멋대로 반하라고 판 깔아준 거 아니다.”
“이보세요, 도끼병 아저씨.”
“제시어나 말해.”
아놔, 이 남자 말 끊기 스킬이 장난이 아니다.
혜주는 혼자 씩씩대다가 이윽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오늘 죽어봐라.
“저는 의문문 금지요.”
“!”
여태껏 금지어 게임에서 이걸로 져본 적이 없다. 역시나 예상을 못 했는지 주원의 눈매가 작게 진동했다.
“그건 너무 포괄적인 거 아닌가.”
“지금 물음표로 끝난 거죠?”
“아니?”
“방금 또 그런 거 같은데?”
……낚였다.
나 강주원, 술자리 게임으론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남자.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혜주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마셔요.”
혜주가 표면 장력을 이용한 술잔을 척 내밀었다.
“애정이 넘치네, 아주.”
“그럼요. 애정만큼 꽉꽉 담아드릴 겁니다.”
주원은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쓰디쓴 첫 잔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
두 시간 후.
무르익은 술자리처럼 혜주의 뺨도 달아올랐다.
의문문 금지로 주원에게 연거푸 술을 먹이다가 목이 말라 안 되겠다며 한 잔씩 들이켜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술자리 게임도 잊고 자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한껏 흥이 오른 그녀는 노래방에 가자며 주원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노래방 가요, 노래방! 이 근처에 에코 죽여주는 노래방 있단 말이에요, 네?”
물론 주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써 고기 먹여놨더니 왜 배를 꺼트려. 됐어.”
“양껏 먹었으니 소화 시키려고 가는 거죠. 2차는 내가 쏜다아!”
“안 가.”
“왜에, 게임에서 졌잖아! 노래방 가자, 노래방!”
“미쳤나, 이게.”
아예 팔짱까지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고 주원이 진땀을 흘렸다.
노래방이라면 질색이었다. 신은 그에게 ‘메이드 인 동굴’ 표 완벽한 목소리를 주었지만 음정은 주지 아니하셨다. 더불어 박자 감각도 주다 말아서, 처음 시작할 땐 제대로 맞던 박자가 1절이 넘어가면 완전히 꼬여버리기 일쑤였다.
좋은 목소리만 듣고 잔뜩 기대에 찼던 눈빛들이 노래를 시작한 후 경악으로 물드는 걸 보며 주원은 다짐했다.
이생에선 결코 제 발로 노래방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고.
“노래방 가고 싶으면 혼자 가. 그 앞까진 데려다줄 테니까.”
“노래방을 혼자 무슨 재미로 가요!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사기꾼이네. 게임에서 진 사람이 2차 장소 고르기로 했잖아요! 이제 와서 왜 약속 어겨요?”
“2차에 노래방은 불포함이야.”
“그걸 왜 오빠 마음대로 정해요? 완전 치사하다!”
팔짱을 낀 채 흘겨보는 얼굴이 귀여워서 잠깐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치사고 나발이고 노래방은 절대 안 돼.’
대표로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결단코 사수해야 하는 비밀이었다.
툭, 투둑. 때마침 봄비가 내렸다.
강주원이 이 좋은 핑곗거리를 놓칠 리가 없다.
“비가 와서 오늘은 집에 가야겠군.”
“비 와요?”
가게를 나서자마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혜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예전엔 몰랐는데 도톰하고 예쁜 입술이다.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이 자꾸 입술로 향했다.
“비 오는 날 노래방 가면 목소리 잘 나오는데.”
물론 그 입술에서 노래방 소리가 나오는 건 지긋지긋하지만.
“과학적 근거 없는 얘기는 하지 말고.”
“과학적 근거가 왜 없어요? 비 오는 날은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서 노래 잘 나온다고요. 목구멍에 기름칠 안 해봤어요?”
“H2O랑 글리세리드랑 같냐.”
“와…… 방금 되게 정떨어진 거 알아요?”
“바라던 바다.”
주원은 간단히 대꾸하곤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집에나 가. 데려다줄게.”
봄비에 섞여 은은한 샴푸 냄새가 났다. 주원은 이 계절이 꼭 혜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리고 따뜻하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조차 향기로운 계절.
“됐어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렇게 젖어서 택시 타는 거 민폐야.”
“대표님 차가 더 비쌀 텐데요. 그게 더 민폐일 거 같은데.”
그리하여 한없이 걸어도 행복할 것만 같은 밤.
“누가 내 차 태워준대?”
주원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걸어가자.”
“두 정거장을요?”
혜주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걷기 좋은 날씨잖아.”
주원은 가게 근처에 주차해둔 차에서 우산을 꺼내 내밀었다. 커다란 까만색 장우산이 어깨 위에 드리웠다.
혜주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노래방 못 갈 거 같으면 이참에 걷는 것도 소화에 좋을 것 같았다.
“걷자.”
주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네.”
혜주는 냉큼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오른쪽 팔과 혜주의 왼쪽 어깨가 닿았다. 옷 위로 닿아도 단단한 팔이 느껴지니 괜스레 뺨에 열기가 올랐다.
‘너무 붙었나?’
혜주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괜히 비 맞지 말고 옆에 붙어. 안 잡아먹으니까.”
주원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혜주의 어깨에 우산 든 팔을 걸쳤다. 한참이나 키가 큰 데다 팔까지 길다 보니 본의 아니게 혜주는 그에게 반쯤 안기게 되었다.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주원에게 매달려가던 혜주는 어느 순간부터 제게는 빗방울이 하나도 튀지 않은 것을 알았다.
후두둑, 후두둑.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데도.
*
루비가 복귀했다.
굴전 먹고 배탈이 나서 일주일이 넘게 골골댔다더니 과연 양 볼이 홀쭉하게 말라 있었다.
루비는 쾌활한 성격에 하루 종일 지치지 않는 체력이 트레이드 마크인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이 하루에 100의 에너지를 쓴다면 그녀는 120쯤? 아니, 200쯤 되는 텐션을 유지하는 인간이었다.
아들만 줄줄이 셋인 집안의 막내딸이라 그런지 사랑만 받고 자란 스타일에 살짝 통통한 게 매력 포인트. 작년에 입사한 이후 혜주와 쭉 같은 팀에서 일했다.
루비가 복귀한 후 혜주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버디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업무를 떠맡아준 게 고맙다며 자진해서 일을 가져간 것으로도 모자라 일주일간 밥과 커피를 책임진다고 하니 어찌 예쁘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가 복귀한 후 사무실이 한결 밝아졌으니 비타민 수혈이 따로 없었다.
“오오, 박빙이네요, 완전 초박빙! 현재 3대 3 동점입니다! 흥미진진하네요.”
점심시간이 끝난 후 탕비실에선 한창 인기남 투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루비였다.
“사업팀과 개발부 여직원이 총 열한 명이니 동점은 안 나오겠네요. 과연 데이터스 코리아의 의자왕은 누가 될 것인가, 두구두구두구!”
“잠깐만.”
그때 욱 팀장이 가만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녀는 사업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직원으로 성격이 불같아 ‘욱 팀장’이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인물이었다.
“루비 씨 원래 강주원파 아니었어? 완전 자기 스타일이라고 버디 프로그램도 제일 먼저 지원했었잖아.”
루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번 겪어보니 아니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정이 없어. 남자란 자고로 강승원 대리처럼 사근사근하고 귀여운 맛이 있어야죠. 강 대표님은 너무 딱딱하더라고요.”
“우리 대표님이 좀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이긴 하지.”
“버디 프로그램 중에 버디랑 맛집 찍고 오는 미션 있잖아요. 나머진 혜주 언니가 대신 해줘서 그 미션 딱 하나 남았는데, 완전.”
“완전?”
“최악이었어요.”
뭘 어떻게 했기에 최악 소리가 나오는 거지? 마침 탕비실에 입장하던 혜주의 귀가 쫑긋 열렸다.
“저 전날부터 완전 설렜거든요. 물론! 남자친구가 있는 몸으로 다른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요. 병원에서 일주일 내내 미음만 먹고 살아서 그날만 기다렸다고요.”
“루비 씨 같은 미식가가 오죽했겠어.”
“그런데 강 대표님이 어쨌는지 알아요? 제가 맛집 리스트 쫙 뽑아갔더니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제일 가까운 데로 가” 한마디 하는데, 와 진짜, 상사만 아니었으면 정강이 한 대 걷어찰 뻔!”
강주원이 강주원 했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혜주만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래서 전 강승원파로 회귀했어요. 혜주 언니는요?”
혜주가 탕비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혜주는 관심 없는 척 시크하게 대꾸했다.
“후보가 왜 둘뿐이에요?”
“쓸 만한 남자가 둘밖에 없으니 그렇죠. 유부남 빼고, 짠돌이 빼고, 성격파탄자 빼고, 차 떼고 포 떼다 보니 둘밖에 안 남았어요.”
아, 우리 회사에 인물이 그렇게 없었구나.
새삼스레 주원과 승원이 얼마나 하드캐리 중인지 확 와닿는다.
“투표 안 한 사람 혜주 언니밖에 없어요. 지금 완전 팽팽하거든요. 언니의 한 표로 승패가 갈린단 말씀!”
“뭐 상품 같은 거 걸렸어요?”
“진 쪽에 투표한 사람들이 돈 모아서 커피 쏘기예요.”
그러면서 루비가 은근히 속삭였다.
“강승원 씨 뽑을 거죠? 두 분 완전 친한 친구 사이라면서요.”
혜주는 반사적으로 다희를 슬쩍 보았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컵을 씻고 있지만 귀가 이쪽을 향해 쫑긋하게 열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혜주는 일부러 들으란 듯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강주원 대표님이요.”
“에엑? 정말?”
“왜 그렇게 놀라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하는 루비를 향해 혜주가 쐐기를 박았다.
“강주원 대표님 괜찮잖아요. 얼굴 넘사벽에 피지컬 훌륭하고 돈도 잘 벌고. 그 정도면 성격 정도는 커버할 만하지 않나?”
“혜주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얼빠네.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왜 강주원이야아아아!”
벌컥. 탕비실 유리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뜯어먹을 게 얼굴만 있다고 누가 그럽니까?”
“헉, 대표님!”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들어서는 주원을 보고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주원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탕비실을 쓱 둘러보더니 탄산수 한 병을 꺼냈다.
“잘 찾아봐요. 얼굴이 유독 특출난 거지, 찾아보면 오만 데가 다 쓸 만할 테니까.”
재수 없는데 묘하게 납득이 되네.
순식간에 수긍해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 혜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쭈르르 선 직원들의 표정을 살핀 후에야 깨달았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느긋하게 냉장고 문을 닫는 주원을 보며 직원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대표라는 직책을 떼고 생각하더라도 주원에겐 특유의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루비가 혜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우리 중엔 그나마 언니가 대표님이랑 친하잖아요.”
“하나도 안 친한데요.”
“그래도 버디잖아요.”
“원래 버디는 루비 씨잖아.”
“버디라고 다 친한가요?”
“아깐 버디라서 친하다면서……!”
으악, 밀지 마. 밀지 마요!
혜주는 최대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으나 루비는 가차 없었다. 버티던 힘에 미는 힘이 더해져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린 혜주가 주원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리고.
“……억!”
단단한 무언가가 사정없이 입술에 와닿았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와이셔츠에 선명히 찍힌 립스틱을 발견한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나 지금 떨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