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전 강아지상이 취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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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 강아지상이 취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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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 강아지상이 취향입니다
2022.07.24.
“죄송합니다, 대표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혜주가 소매로 주원의 가슴팍을 벅벅 닦았다. 그런다고 옷에 묻은 립스틱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아이쿠, 이를 어째. 벗어주시면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무실에 여벌 옷 있으세요?”
주원은 그 소란에도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반면 혜주는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손 아래에서 단단한 가슴팍이 선연히 느껴졌다.
이렇게 힘을 주는데도 왜 안 밀리는 건데. 여기 굴곡은 왜 있는데.
손을 댈수록 립스틱이 번지는 바람에 그의 가슴을 주물럭대고 있었다는 건 한참 후에야 알았다.
“오혜주 씨.”
“네?”
주원의 시선이 정수리 위로 따갑게 쏟아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만 좀 만지작거리지?’
혜주는 뜨끔하여 물러섰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주원의 옷에 또 사고를 쳐버린 혜주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저 와이셔츠는 또 얼마일까. 설마 물어달라고 하진 않겠……지?’
혜주는 곁눈질로 루비를 째려보았다. 뜨끔한 루비가 시선을 회피했다.
이 난리에도 주원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구겨진 와이셔츠를 툭 한 번 턴 게 전부였다.
“동생 이겨 먹은 기쁜 날이니 커피는 내가 쏘도록 하죠. 각자 자리로 배달시킬 테니 자리로 돌아가 오후 업무 준비하세요.”
“오오! 역시 우리 대표님 너그럽기도 하시지. 최고!”
뭐라고 한 소리를 들을까 긴장하고 있던 직원들이 환호했다. 주원은 팬 서비스용 미소로 간단히 응수한 후 혜주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오혜주 씨는 나 좀 보죠.”
“저를, 왜요?”
기어이 날 죽이려는 것인가. 혜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태양식품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진짜요?”
혜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다리던 연락이 드디어 온 모양이었다. 1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것도 잊고 혜주는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네, 바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
대표실로 돌아온 주원이 와이셔츠를 갈아입었다.
흰 와이셔츠를 자주 입는 터라 사무실엔 항상 두어 벌 여벌 옷을 준비해 두는데 대낮에 갈아입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여간 오혜주.”
벗어둔 와이셔츠에 선명히 찍힌 립스틱 자국이 보였다. 붉은색인가? 아니, 그보단 조금 주황빛이 도는 색이다.
주원은 가만히 와이셔츠를 들어보았다.
돼지우리에서 생활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 승원과 달리 그는 매우 깔끔한 성격이었다. 옷이며 화장품이며 늘 있던 자리에 각을 잡아놓아야 마음이 편안하고 휴일이면 눈 뜨자마자 이불 세탁부터 하는 게 루틴이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체액은 끔찍해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혜주의 입술이 찍힌 이 옷은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오혜주가 아니지.”
피식 웃은 주원이 와이셔츠를 접어 쇼핑백에 넣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오겠다던 혜주는 아직이었다. 저 문이 언제 열릴까 기대하며 주원은 턱을 괴고 앉았다.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오혜주가 나를 뽑아?’
그의 뇌리로 조금 전 인기투표 현장이 떠올랐다.
그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탕비실 밖에서 혜주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길게 느껴졌다.
혜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순간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기쁠 일인가 아리송하지만, 뭐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똑똑똑.
“들어와.”
혜주가 들어섰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왔는지 입가가 촉촉하다. 코랄색 립스틱을 덧바른 입술에 자꾸만 쏠리는 시선을 주원이 애써 끊어냈다.
“여직원들끼리 재미있게 놀더라?”
주원이 책상에 걸터앉은 채 물었다.
태양식품 일로 불러놓고 다른 얘길 꺼내다니! 그냥 모른 척 넘어 가주면 안 되나? 혜주는 그가 치사하게 느껴져 불퉁하게 대꾸했다.
“아까 그 대답은 신경 쓰지 마세요. 진심 아니거든요.”
“뭘 또 그렇게 정색해.”
“정색할 만하니까 하죠.”
“아무튼 회사에선 티 내지 마. 네 마음까진 어쩔 수 없지만.”
헐!
그 타이밍에 딱 강주원이 들어선 순간부터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이 남자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혜주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요?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다희랑 승원이랑 사귀는 사이잖아요. 그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다희 앞에서 승원이를 뽑을 수가 있겠어요?”
“사실은 강승원한테 투표하려고 했었다?”
“당연하죠. 전 강아지상이 취향입니다.”
“주는 대로 먹고 가자는 대로 가고 틈만 나면 안아달라 낑낑대는 스타일?”
“노래방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오는 것 포함이요.”
“은근히 뒤끝 있는 스타일이네.”
“대놓고 그런 편입니다.”
“알았어. 다음번엔 고려해보지.”
습관적으로 “네”라고 대답하려던 혜주가 멈칫했다.
지금 강주원이 내 취향에 부합하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한 건가?
……왜?
순간적으로 헷갈릴 뻔했으나 상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제 일 얘기 좀 하자.”
주원이 노트북을 가져왔다. 혜주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았다.
“태양식품에서 회신한 내용부터 볼 수 있을까요?”
“응.”
대표실엔 응접실 테이블이 길게 놓여 있었다. 혜주는 주원이 맞은편에 앉을 거라 생각했으나 주원이 선택한 건 혜주의 옆자리였다.
털썩. 소파에 느껴지는 무게감,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수 냄새. 살짝 맞닿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절로 긴장이 됐다.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봐.”
주원은 노트북을 켜 혜주가 잘 보이게 화면을 돌려주었다. 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쪽에서 먼저 미팅을 요청했네요. 우와, 대박!”
“네 제안서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 당장 다음 주에 미팅을 했으면 하더군.”
“빠르면 상반기 안에 계약 딸 수 있겠어요.”
“이 계약 성사되면 올해 데이터스 코리아의 제일 중요한 사업이 될 거야. 이번 미팅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지.”
톡톡. 주원이 모니터 화면을 두드렸다.
“미팅 장소는 그쪽에서 제안했어. 태양식품 본사야.”
“신월도면……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아니에요?”
“연간 계약이면 아무래도 큰돈이 오가니 간단히 결정할 문제는 아니겠지. 그쪽 임원진 몇 명이 함께 움직이긴 번거로우니 우리 쪽에서 움직이는 게 나을 거야.”
주원이 스케줄러를 꺼내 들었다.
“11일 괜찮아?”
“네.”
스케줄러를 확인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혜주가 멈칫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왜 저랑 대표님이 같이 맞추고 있는 거죠?
뭔가 위험한 직감이 엄습했다. 콕 찍어 말할 순 없지만 그 섬에 들어가면 짐승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만 같은…….
“설마 우리 둘이 가는 거예요?”
“왜, 뭐 문제 있어?”
머릿속에 떠다니는 문제는 수십 개쯤 되는데 직장인 DNA가 장착된 입술은 정반대의 말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문제없습니다.”
주원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럼 나가 봐.”
*
초복을 맞아 승원과 다희는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
원체 자기 몸 챙기는 걸 귀찮아하는 승원을 위해 종종 다희는 요리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특별히 솜씨를 더 발휘했다. 튼실한 닭에 인삼과 대추, 각종 한약재를 넣고 푹 고아 한방삼계탕을 만들었는데 맛을 보니 간이 딱 맞았다.
“맛있어?”
첫술을 뜬 승원의 반응을 기대하며 다희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요새 통 입맛이 없다며 저녁을 자주 거르던 승원은 다희의 정성에 고마워했다.
“응, 맛있네. 국물이 아니라 보약 같다.”
그간 서로 일이 바빠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친구일 땐 매주 금요일마다 회포를 풀었는데 사귄 후로는 시간을 통 내지 못했다.
개발팀 일이 갑자기 왜 승원에게만 몰리는지 다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투정도 해보고 몇 번 화를 내기도 했지만 매번 미안하다는 승원에게 더 이상 보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의 데이트라 할 얘기가 많았다. 다희는 지난주에 여직원끼리 했던 인기투표 얘기를 하며 승원의 앞접시에 닭다리를 하나 얹어주었다.
“인기투표?”
깨작깨작 고기를 뜯던 승원의 눈동자에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런 걸 했단 말이야? 재미있네.”
그의 반응에 힘입어 다희는 한층 신나게 떠들어댔다.
“사업팀이랑 개발팀 여직원이 딱 열한 명이더라고. 그렇게 다 모일 일이 없는데 어쩐지 그날은 죄다 탕비실에 모여 있었어.”
“그래서 누가 이겼어?”
“오, 승부욕 발동하는 거야? 글쎄, 네가 맞춰 봐.”
“너랑 혜주는 나 뽑았을 거고, 욱 팀장님과도 사이좋으니 최소 3표는 내가 확보한 거 같은데?”
무려 강주원과의 대결에서 이 정도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 남자는 승원밖에 없을 거다.
주원이 칼날같이 서늘하다면 승원은 봄처럼 따뜻한 남자였다. 베일 듯한 선을 가진 주원에 비해 승원은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굳이 누가 잘생겼다고 따질 수 없는 경지라 그들에 대한 평가는 대개 취향의 차이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강주원과 맞짱 떠도 꿇리지 않는 남자란 말이지.’
그런 남자가 제 남자친구인 것에 다희는 깊게 만족했다.
“자신감이 과한 거 아니야? 물론 내 눈엔 네가 멋있지만 강주원 대표님 입사했을 때 여직원들 반응 장난 아니었어.”
“그러니까 누가 이겼는데? 내가 최소 세 명 확보했으니까 나머지가 관건인데, 흐음.”
“혜주는 너 안 뽑았는데?”
승원의 젓가락질이 딱 멈추었다. 매사 태평한 승원의 낯빛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광경을 다희는 처음 보았다.
“진짜야?”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은 승원을 보고 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심 짐작하고 있던 승원의 속마음을 표정으로, 행동으로 다시금 확인한 순간이었다.
“응, 정말이야. 혜주는 강 대표님 뽑았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나 안 뽑았지?”
다희는 무너질 것 같은 가슴을 추스르며 태연히 수저를 놀렸다.
“혜주가 다른 남자를 뽑았다는 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너희 둘 친구잖아. 서로에게 애인이 생겨도 아무렇지 않아야 할, 그냥 친구.”
“……그거야 그렇지.”
“아무튼 혜주는 강 대표님 뽑았어. 버디 프로그램 때문에 며칠 붙어 있더니 정분이라도 난 거 아니야?”
승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에이, 주원이 형은 절대 오혜주 스타일 아니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혜주 대학교 다닐 때 사귄 남친들 사진 본 적 있거든. 죄다 샌님이더라고.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할 것 같은 이미지 있지? 찹쌀떡처럼 하얗고 좀 얄쌍한 느낌 있잖아. 아, 대학교 때 두 명 다 안경도 썼던 거 같다.”
너처럼?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달았지만 다희는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혜주의 취향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면서 정작 마음은 보지 못하는 바보. 눈에 뻔히 보이는 마음을 십 년이나 알아채지 못한 멍청이.
그런 그에게 혜주 역시 너를 좋아한다는, 그 대단한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넌 내 거니까.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내가 누구 뽑았는지는 안 궁금해?”
다희가 짐짓 애교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