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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늘 자고 갈래? (17/121)


#17. 오늘 자고 갈래?
2022.07.28.


승원은 표정의 동요 없이 대꾸했다.


“당연히 나겠지.”

“아닌데? 나도 너 안 뽑았어.”

조금 놀라주길 바랐나 보다. 혜주가 주원을 뽑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충격받은 얼굴로 이유를 물어주길.

그러나 승원의 반응은 잠자는 바다처럼 고요했다.


“왜?”

승원은 가식은 떨래야 떨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속에 없는 말도 못 하고 인사치레는 더더욱 못하는 스타일.

그렇기에 다희는 지금 그가 보여준 반응이 가슴에서 우러나온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비참했다.


“그냥 회사에서 티 내기도 싫고…… 요새 너 좀 미워서.”

그제야 승원은 축 가라앉은 다희의 분위기를 눈치챘다. 요새 생각이 많아 다희에게 너무 소홀하긴 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승원이 밥상을 물리고 다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내가 요새 많이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했지.”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되게 말도 안 되는 얘긴 거 아닌데 승원아, 나 혜주 신경 쓰여.”

“혜주 왜?”

“솔직히 얘기하면 나보단 너희 둘이 더 친했잖아. 그러다 보니 연락도 더 자주 하고.”

또 혜주 얘기다. 지난번 꼬칫집 사건 이후로 엄청 조심했는데 다희의 입에서 또다시 그녀 얘기가 나오고 말았다.

승원은 다희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밥 말아 먹을 눈치도 없는 편인 그가 혜주와 다희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알 리 없었다.


“요샌 거의 연락 안 해.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나도 노력하고 있어. 너 없이 따로 보는 일도 없고 회사에서도 인사 정도만 하는걸.”

“그런 것조차 노력해야 한다는 게 싫어.”

“다희야.”

“지금도 봐. 내가 너 안 뽑은 것보다 혜주가 안 뽑은 거에 더 신경 쓰고 있잖아.”

승원은 아차 싶었다.


“미안. 그런 줄 몰랐어.”

“미안하단 말 들으려고 꺼낸 얘기 아니야.”

“그래도 미안해.”

승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퍽퍽했다. 요새 자주 느끼는 증상이었다. 어딘가 답답하고 무언가를 놓친 듯 불안했다. 단순한 게 최고라 평소 잡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데 요새는 종종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했다.

회사, 게임, 술.

강승원을 설명할 단어는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뭔가 빠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승원아.”

다희의 떨리는 목소리에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응?”

“부탁이 있어.”

다희는 머뭇머뭇 입술을 붙였다 뗐다.

승원은 채근하지 않고 기다렸다. 얌전히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잘하는 그였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자고 갈래?”

 

*

다희가 혜주를 알게 된 건 스무 살 초봄 무렵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개강총회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터에 참여하지 않은 바람에 다희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낯선 얼굴들로 북적북적한 강의실. 어색한 기분으로 강의실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앞으로의 대학 생활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대학교는 서른 명이 한 반에서 부대끼며 자연스레 친해지는 고등학생 때와는 달랐다. 학부생을 모두 합하면 사백 명. 그 안에 과가 나뉘어 있고, 반도 따로 있었다.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들기 힘든 구조였다.


‘학기 내내 혼자 수업을 듣게 되면 어떡하지?’

다희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말을 걸어온 게 혜주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번에 입학하셨어요?”

“아, 네.”

“만나서 반가워! 나도 신입생이야. 아, 혹시 재수한 거 아니지? 덥석 말부터 놔버렸네.”

“으응. 나 현역이야. 천다희라고 해.”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매.


‘엄청 붙임성이 좋은 애네.’

혜주의 첫인상은 그랬다.

혜주는 아주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녀의 주위엔 항상 사람이 넘쳐났고, 그녀를 좋아하는 남학생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 혜주를 보고 누군가는 ‘마성의 오혜주’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혜주는 “마성은 개뿔, 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래.” 하며 스스로를 낮추기 바빴다.

다희는 그런 혜주가 좋았다. 밝지만 오버스럽지 않고, 유쾌한 만큼 가끔 덜렁대고, 잘난 구석이 있어도 으스대지 않고.

무엇보다 외톨이였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둘 모두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동질감도 있었다.

1학년 첫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혜주야, 기말도 끝났는데 이제 뭐 할 거야? 고향 내려가?”

“응. 아빠 집에 일주일쯤 다녀오려고.”

“아빠 집……?”

보통은 본가 또는 부모님 댁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굳이 콕 찍어 ‘아빠 집’이라고 하는 게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더니 혜주가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아! 나 엄마 안 계시거든. 아빠 혼자 살고 계셔서 아빠 집이라고 한 거야.”

그때 다희가 느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혜주와 달리 엄마만 있는 집이었다. 그녀는 학창시절 내내 한부모 가정이란 걸 부끄러워했고 가족 얘기를 극도로 꺼렸다.

한데 혜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뭘 두려워했던 걸까?’

남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길까 봐 숨겼고, 만만하게 볼까 봐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혜주를 보니 틀린 것 같았다. 외려 저렇게 당당히 말하니 아무것도 아닌 문제처럼 느껴졌다.

동경, 그리고 애정.

시작은 분명히 그랬다.

다희는 혜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다희는 달랐다. 혜주처럼 소중한 친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란 걸 확신했다.

좋아해서 따라 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뭐든 같이 하고 싶고.

혜주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였다. 그래서 혜주가 산 옷과 같은 옷을 사고, 혜주의 헤어 스타일을 따라 하고, 혜주가 즐겨 듣는 음악을 함께 들었다.

그러면서 다희는 점차 혜주를 닮아갔다. 친구들이 ‘오혜주 짝퉁’이라고 뒤에서 수군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혜주만 자신을 욕하지 않으면 그딴 이방인들의 뒷담화 따위 아무 상관없었으니까.

그렇게 7년이 흘렀다.

다희는 여전히 ‘오혜주 짝퉁’이었다. 혜주가 다니는 회사에 나란히 입사를 하고, 그녀의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혜주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다희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다희는 혜주를 위해서라면 정말이지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동경이 질투를 낳고, 애정이 결핍이란 감정을 피워 내기에 충분한 시간.

혜주를 좋아하던 마음은 그녀와 비슷해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질되었고, 더 나아가 그녀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심으로 바뀌었다. 혜주와 같은 옷을 사고, 같은 머리를 하는 것으론 이제 만족이 되지 않았다.

무조건 혜주보다 더 좋은 것, 좋은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다희의 눈에 승원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혜주가…… 승원이를 좋아해?’

습관적으로 혜주를 살피다 보니 그녀의 시선이 자꾸 머무르는 곳에 승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확신한 건 아니었지만 때로 여자의 직감은 귀신처럼 날카로울 때가 있는 법이다.


‘강승원 어디가 좋은 걸까? 쉬는 날엔 집에 틀어박혀 게임이나 하는 샌님이 뭐가 좋다고.’

처음엔 궁금해서 보았고, 다음엔 귀엽다 생각했고, 자꾸 생각하다 보니 나중엔 좋아졌다.


-나 너를 좋아해, 승원아.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나누었던 키스. 그리고 함께 보낸 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혜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희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 이젠 오혜주 짝퉁 아니잖아. 혜주가 좋아한 남자라 좋아 보이는 게 아니야. 그리고 혜주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하지도 않은걸.’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아.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안 그래, 혜주야?


 

*

다희는 텅 빈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마지막 질문에 몹시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는 승원을 보고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술에 취한 밤, 내 입술을 거절하지 않았던 그날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구나.

오랜 갈증에 허덕인 사람처럼 뜨겁게 서로에게 얽혔던 밤.

……넌 대체 누굴 보고 있었니.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백기를 든 건 다희였다.


-아, 맞다. 너 오늘 새 아이템 나오는 날이라고 했지? 내가 잊고 있었네. 얼른 집에 가봐.

-그래도…… 돼?

-응, 나 괜찮아.

 
그 말에 망설이지도 않고 사라지는 승원의 뒷모습은 다희를 절망하게 했다.

그 모습이 왜 꼭 내게서 도망치는 것 같은지.

다희와 하룻밤을 보낸 후 승원은 두 번 다시 그녀를 안지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했던 야근이 매일같이 생기고, 평소엔 잡지도 않던 약속이 줄줄이 생겼다. 그놈의 새 아이템은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 건지.

술에 취해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승원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떻게든 수습을 하겠다고, 네가 원하면 사과를 할 수도 있고, 내 얼굴 보는 게 거북하다면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다고.

그러나 다희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 너랑 연애하고 싶어.

 
크게 흔들리던 승원의 눈동자에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다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가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어색할 거 알아. 하지만 오래전부터 내 마음은 너를 향해 있었어. 너 역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걸 어제 느꼈고…… 그러니까 우리 노력해보면 안 될까?

 
감정에 둔한 건 너 스스로가 제일 잘 알지 않느냐며 승원을 몰아붙였다. 마음이 있는데도 네가 모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며 다그치기도 했다.

꼬박 이틀을 고민한 후 승원이 찾아왔다.


-그래. 우리 사귀어보자.

 
시작은 그토록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다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서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진심이 될 거라 믿었다.

오산이었다.

승원이 가버린 후 적막하게 내려앉은 집 안의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다희는 반도 먹지 않은 삼계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애는 개뿔…… 이런 게 무슨 연애야, 흐윽!”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사실 이건 연애로 포장한 머리싸움이 아닐까. 제 마음도 모르는 바보를 상대로, 그가 진심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나하나 돌을 쌓아 눈을 가리는 기분이었다.

다희는 제가 쌓아 올린 돌무더기 너머에 혜주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원망스럽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자꾸만…… 미워진다.

가장 소중했던 친구가 지금 자신을 제일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다희는 면역력이 없었다.


‘혜주가 없었다면 승원이가 날 바라봐 주었을까?’

혜주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텅 빈 방 안에 홀로 버려지진 않았을 텐데.

정말 싫다. 오혜주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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