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섬으로 출장을 간다. 강주원과 단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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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섬으로 출장을 간다. 강주원과 단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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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섬으로 출장을 간다. 강주원과 단둘이.
2022.07.31.
멍-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혜주는 선착장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관광객들과 다르게 그녀는 정장 차림이었다. 서류가 가득 들어 있는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흩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니 적잖이 현타가 왔다.
난 오늘 섬으로 출장을 간다. 강주원과 단둘이.
하필이면 눈물 나게 화창한 날씨였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미세 먼지 하나 없는 하늘이 그림책에 나올 것처럼 깨끗했다.
남들 모두 나들이나 가는 이런 날씨에 웬 출장인지. 그것도 불편한 남자와 단둘이 가려니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 때문에 어젯밤 잠도 설친 터였다.
“하암, 영 잠이 안 깨네.”
고속버스로 이곳까지 내려오는 사이 조금 눈을 붙였더니 머리가 띵했다. 혜주는 곧 도착한다는 주원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주차장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SUV 한 대가 미끄러지듯 선착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을 지나 차량을 선적하는 곳에 멈춰 선 차에서 주원이 내렸다.
“어? 평소에 갖고 다니는 차가 아니네?”
회사에 타고 다니는 세단 대신 커다란 SUV를 몰고 온 주원을 바라보며 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흰 와이셔츠에 진회색 슬랙스를 입은 주원이 차에서 내렸다. 선글라스를 접어 앞섶에 걸치며 내리는 그의 모습은 화보처럼 근사했다. 멀리서 보니 우월한 기럭지가 빛을 발했다.
“대박, 개 잘생겼어.”
바로 옆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 몇 명이 그를 보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어디?”
“저쪽에 걸어오잖아. 연예인인가? 어디 화보 촬영하러 가는 거 같은데?”
“매니저 없는 거 보니 연예인 아닐 수도. 어쨌든 존잘이네.”
속닥거리는 얘기를 들으며 혜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인정한다. 강주원은 그림자마저 잘생겼다.
그러나 그 ‘존잘남’을 기다리는 혜주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와 하루 내내 단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바짝 긴장이 됐다.
주원이 싫은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틱틱거리긴 해도 마음은 따뜻한 남자였고, 시크하지만 무심하지 않은 남자였다. 오히려 따지자면 좋은 남자였다.
문제는 혜주의 마음이었다.
꿈에서 그가 나온 후로 밤이고 낮이고 그가 떠올랐다. 자주 부딪히니 그런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려 해봐도 잘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사무실에서 그의 복근을 본 후론 일하는 도중에도 종종 그의 벗은 몸이 떠올랐다.
자로 잰 듯 완벽한 비율과 공짜로 보기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피지컬. 와이셔츠로 온몸을 가리고 있어도 이미 본 것이 있으니 그 안의 것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손등에 툭 불거진 핏줄을 볼 때마다, “응.” 낮게 대답할 때 선명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볼 때마다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오혜주, 네가 진정 정신이 나갔구나.’
승원에게 고백하려 한 게 두 달 전이다. 그것도 보통 사랑인가? 몇 년이나 그녀를 애타게 한 짝사랑이다. 한데 고작 두 달 만에 그의 형에게 두근거리다니, 제정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제 무의식이 강주원에게서 승원과 닮은 구석을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랜 짝사랑을 정리하며 잠시 붕 떠버린 마음이 목적지도 모른 채 마구 헤매는 것일지도.
주원을 보면 심장이 뛰는 제 자신이 처음엔 황당했는데, 나중엔 걱정스러웠고, 이제는 괴롭기까지 했다.
해서 혜주는 가급적이면 주원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못 잤어? 눈이 퀭하네.”
주원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까이 다가선 그에게서 청량한 향기가 났다. 혜주는 내리쬐는 햇빛을 손으로 막으며 입술을 열었다.
“괜찮습…….”
“오, 저 여자가 매니저인가 봐.”
막 대답을 하는데 아까 수군대던 여학생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불쑥 귓가를 침범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주원이야 그게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 리 없지만 혜주는 달랐다.
‘하아. 졸지에 매니저 행세하게 생겼네.’
그들 눈에 지금 자신이 왕자님 시중드는 무수리 1 정도로 보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혜주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누른 채 대답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차는 왜 선적하시려고요?”
“알아보니 교통편이 여의치 않더라. 선착장에서 태양식품 본관까지 차로는 10분인데 버스 간격이 한 시간 이상이라.”
“아아.”
“택시도 몇 대 없대서 그냥 차 실었어.”
보통 윗사람과 동행할 땐 부하직원이 모든 일정을 계획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강주원은 달랐다. 그는 직접 준비하는 대표였고 부하직원을 아랫사람 부리듯 하지 않았다.
“제가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별일 아니야. 승선 티켓은 끊었어?”
“네. 두 시에 들어가서 여섯 시에 나오는 배편으로 끊었습니다. 여덟 시에 나오는 배편이 하나 더 있어서 혹시 회의가 늦어지면 변경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입도할 때 왕복 티켓을 끊은 건 순전히 루비의 팁이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경우 간혹 나오는 배가 만석일 수도 있어서 미리 끊어놓는 게 좋다고 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루비는 신월도 맛집 리스트까지 쫙 꿰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깝지도 않은 섬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물었더니 그녀는 얼버무리며 말을 돌렸다.
남자친구가 여행을 좋아한다더니 신월도도 여러 번 갔었나 보네.
혜주는 단순히 추측했다.
“오케이. 가자.”
주원이 티켓을 주머니에 넣었다. 혜주는 탑승 시각을 재차 확인하며 주원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곧 배가 출발합니다. 바람이 심한 관계로 탑승객 여러분은 가급적 선실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선내 방송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출발했다. 위층에서 경치를 구경하던 혜주가 엉망이 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선실로 내려왔다.
“와, 바람 대박이네요. 갑판에 서 있다가 날아갈 뻔했어요.”
“별 걱정을 다.”
“……무슨 뜻이죠?”
“원래 하체 튼실한 애들은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어서 어지간한 충격엔 안 넘어가. 평소에 잘 안 넘어지지?”
하아, 말을 말자.
“한숨 주무시죠, 대표님. 저는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혜주가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주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주원은 시선을 내리깐 채 태연히 서류만 넘길 뿐이었다.
‘후우, 상사만 아니었어도 콱.’
혜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강주원 앞에서는 방심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을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
[태양식품] 본사는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이 잘 닦여있어 차로 가기엔 무리가 없었으나 관광지에서 거리가 있는 편이라 확실히 차가 없으면 불편할 듯했다.
주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본사에 도착하자 서른 후반에서 마흔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그들을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태양식품 이사 이금석입니다.”
“이은석 부장입니다.”
“저는 이동석이요. 생산관리부 과장입니다.”
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진한 가족애란.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사장 이보석의 아들들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삼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흡사 데칼코마니를 연상케 했다.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에 숱이 빽빽한 머리카락, 웃으면 실눈이 되는 작은 눈과 두꺼운 입술까지. 설사 이름을 듣지 못했더라도 형제지간임은 족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데이터스 코리아 강주원입니다.”
깔끔한 인사와 함께 건넨 명함을 들여다보던 금석이 놀란 듯한 눈초리를 했다.
“대표님이 이 먼 데까지 직접 오셨군요. 일전에 메일로 연락은 했지만 촌구석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에서 너무 멀어서 힘드셨죠?”
“별말씀을요. 경치가 너무 좋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던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쪽은?”
혜주가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이터스 코리아 사업팀 대리 오혜주입니다.”
은석이 아는 체를 했다.
“아! 맨 처음에 연락 주셨던 분이네요!”
“네, 맞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디까지나 사업을 의뢰한 상대측이 갑이라 행여 깐깐하게 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씨 삼 형제는 순박하고 푸근한 스타일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공장 구경은 한 번 하셔야죠.”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바람이 심하니 다 둘러보긴 힘들겠고 생산 라인만 둘러볼까요?”
금석은 미소를 지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국내 최대의 김 제조 업체답게 태양식품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여기 오기 전까진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시설을 상상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마당을 십 분이나 가로질러 도착한 공장의 위용에 혜주가 감탄했다.
“공장이 엄청 크고 깨끗하네요. 역사가 깊은 곳이라 오래된 건물을 상상했거든요.”
“우리 태양식품이 40년이 넘었습니다. 공장이 워낙 낙후돼서 기계 고장도 많고 직원들 노고도 심해서 재작년에 싹 리모델링 했어요. 쓸데없는 데 돈 쓴다고 아버지가 워낙 완고하셔서 설득하는 데 몇 년이 걸렸지요.”
“그러셨군요.”
“데이터스 코리아는 어떻습니까?”
“저희 회사요?”
예상치 못한 은석의 질문에 혜주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회사 건물은 깨끗한가요? 층마다 화장실도 있고?”
질문이 너무 뜬금없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짧게 고민한 혜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신축 빌딩이에요.”
“신축이면 시설이 좋겠네요.”
“아무래도 그런 편입니다.”
“보안도 철저하겠군요. 직원 아닌 사람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겠죠?”
“로비에 보안 직원이 두 명이나 있어서 보안은 훌륭한 편입니다.”
그때 동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직원 식당은 따로 있나요? 밥은 잘 나옵니까?”
아니, 대체 이런 걸 왜 궁금해하는 거지? 누가 보면 데이터스 코리아에 취업하고 싶어 안달 난 줄 알겠네.
“직원 식당은 따로 있고 맛도 훌륭합니다. 조리사님 솜씨가 좋아서 다들 만족하고 있어요.”
“야근은 많이 없고?”
“네?”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든 혜주가 머뭇거리자 금석이 동생들을 제지했다.
“너희 둘 다 그만해.”
맏형의 한마디에 은석과 동석의 입이 조개처럼 맞물렸다. 금석은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원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서울에서 온 손님을 오랜만에 보다 보니 궁금한 게 많았나 보네요. 최근에 공장을 리모델링 해서 나름 조직개편을 하고 있거든요. 서울 회사는 어떤가 참고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신월도를 벗어나지 못한 촌놈들이라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했군요. 공장 구경은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이제 사무실로 이동하시죠.”
주원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혜주는 앞서 걷는 삼 형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 분위기?’
콕 찍어 말할 수는 없지만 삼 형제의 반응에서 수상한 냄새가 났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느낌이랄까?
이상한 건 딱히 짐작될 만한 ‘잿밥’이 데이터스 코리아엔 없다는 것이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조금 뒤처진 혜주를 향해 주원이 눈짓했다.
‘안 와?’
‘지금 가요!’
찜찜한 기분으로 혜주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