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오혜주 너라서 (19/121)


#19. 오혜주 너라서
2022.08.04.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태양식품의 주력 인사라 할 수 있는 금석, 은석, 동석 삼 형제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과 데이터화에 매우 긍정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계약할 생각이 없다면 주원과 혜주를 이런 외딴 섬까지 불러들이지는 않았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척 호의적인 태도임엔 틀림없었다.

혜주의 준비성도 빛을 발했다. 그녀는 처음 메일을 보냈을 때보다 훨씬 구체화한 내용으로 발표 자료를 구성했다. 데이터스 코리아와 협업을 했을 때 태양식품이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예상되는 매출 상승액을 발표하자 삼 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회의는 순조로웠다.

삼 형제의 부친이자 태양식품의 사장, 이보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내가 허튼 데 돈 쓰지 말라고 그랬지? 누구 맘대로 서울에서 손님을 불러들여?”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등장하자 삼 형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혜주는 직감했다.


‘끝판왕의 등장인 건가.’

다년간의 사회생활 짬밥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회사의 실권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동의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결정권자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실제로 계약서를 앞에 두고 금석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발표가 끝난 후 초조한 듯 입술을 질겅거리며 괜히 질질 끄는 태도를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 할아버지를 넘어서야 계약을 딸 수 있다 이거지?’

보석은 손님들이 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 고함을 쳤다.


“설문인가 뭔가 쓰잘때기 없는 거에 돈 쓸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혀!”

“아버지, 그러지 말고 이분들 얘기를 한 번 들어보시죠. 멀리서 오셨는데…….”

“누가 와달라고 빌기라도 했당가? 멀리서 오면 뭐, 여든이 가까워진 노인네가 버선발로 뛰어나오기라도 해야 혀?”

완고한 보석의 반응에 금석이 난처해하며 귓속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우리 형제들은 계약에 긍정적인데 아버지가 영 탐탁지 않아 하셔서요.”

혜주는 곁눈질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먼 산에 불구경하듯 무심한 얼굴로 혜주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설득해.’

혜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드디어 내 진가를 발휘할 타이밍이로군.

그동안 나사 하나 빠진 모습만 자꾸 보인 것 같아 억울했는데, 드디어 만회할 기회가 왔다.

나 오혜주. 다섯 살부터 아빠 무릎에 앉아 순대국밥 좀 팔아본 여자.

타고난 애교와 선한 인상으로 뭐라도 하나 입에 떠 넣어주고 싶게 생겼단 얘길 밥 먹듯이 들었다. 제안서를 애초에 까이면 모르되, 일단 미팅에 나서면 계약서에 도장 찍는 건 일도 아니란 말씀.


“사장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들을 필요도 없당께. 귀도 잘 안 들리는 늙은이한테 시덥잖은 얘기나 하려거든 집어치워!”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저 여기 오는 데 다섯 시간이나 걸렸는데 딱 10분만 주세요. 네?”

사근사근한 눈웃음에 보석의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다.

혜주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들으실 필요도 없어요. 가볍게 저랑 걸으실까요?”

“크음, 흠! 허리가 굽어서 걷지도 못하는 노인네한테 산책을 하자니, 이거야 원.”

“그럴수록 더더욱 운동하셔야죠. 제가 부축할게요. 가시죠.”

마지못해 나서는 시늉을 하는 보석을 혜주가 얼른 부축했다. 그러곤 주원을 향해 보이지 않게 윙크를 날렸다.


‘계약 따오겠습니다!’

 

*

주원은 본관 앞 벤치에서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석이 안에서 기다리라고 회의실을 내주었으나 왠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다. 짠 내음이 섞인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주원은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리며 멀리 보이는 혜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예 휠체어를 동원해 보석과 산책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 보면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녀 같기도 했다. 가만히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무슨 얘기를 하길래 저렇게 함박웃음이야?”

계약서에 도장까지 단단히 챙겨간 사람이 저토록 태평하게 웃을 만한 일이 뭐가 있는 건지 주원은 궁금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그리고 또 10분이 더 지났다.

애초에 10분만 내어달라고 부탁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주원은 슬슬 고무되기 시작했다.


‘얘기가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보석이 처음처럼 완강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계약이 녹록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주원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오혜주.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

순 허당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당차고 똑부러진 면이 있다. 거래처 설득하는 일을 갑자기 떠맡기면 보통은 당황하기 마련인데, 혜주는 씩씩하게 보석의 휠체어부터 밀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눈에 빤히 보이는 의도를 가지고 다가서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 그녀가 노련하다는 것이었다. 보석과 산책하는 혜주의 모습은 구멍가게에 사탕 사러 가듯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멋진 여자였다. 그만큼 멋진 파트너였고.

혜주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대표님, 대박대박!”

멀리서 혜주가 오두방정을 떨며 달려오다 턱에 걸려 퍽 자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주원은 이내 툭툭 무릎을 털며 일어서는 혜주를 보곤 그만 웃고 말았다.


“……멋지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주원의 걸음이 성큼성큼 혜주를 향했다. 괜찮냐고 묻고 싶은데 입으론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어떻게 됐어?”

“저 계약서에 도장 찍어 왔어요! 짜잔!”

혜주가 활짝 웃으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선명하게 찍힌 붉은색 인주에 주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와, 정말이지 대단한 오혜주. 그 완강하던 할아버지를 30분 만에 설득해낸 재주가 뭐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혜주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계약 관련된 얘기는 아예 하지 않았어요. 아시죠? 설득의 미학 제1원칙. 상대가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려라. 할아버지랑 산책을 하면서 바다 얘기랑 날씨 얘기만 했어요.”

“할아버지?”

“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할아버지는 오늘같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을 싫어하신대요. 채취선끼리 부딪쳐 사고가 나기도 하고 김을 건져 올리다가 찢어지는 경우도 많아서요.”

“그렇군.”

“10분쯤 지나니까 할아버지가 먼저 얘기를 꺼내시더라고요. 뭐 한다고 이 먼 데까지 와서 사서 고생을 하냐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전을 철석같이 믿고 왔다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보석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혜주의 기대를 완전히 차단하려고 선수를 치기까지 했다.


-긍께 정리해 보자면 네가 하는 게 설문을 돌리는 일이라 그거제? 고런 거라면 내가 진즉에 동네에 쫙 돌려봤당께! 현재 시판되고 있는 김 중 제일 맛있는 파래김이 뭔지, 태양식품의 제품 중 가장 선호하는 게 뭔지 동네 사람들헌테 다 물어봤다 이 말이여.

 
보석은 손수 작성한 설문지를 챙겨오기까지 했다.

혜주는 보석이 내민 종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까 설문이 효과가 없지. 우리 할아버지 완전 답정너셨군.’

첫 질문부터 마지막 주관식까지 온통 틀에 박힌 질문들뿐이었다. 특히나 “향후 태양식품이 개선했으면 하는 점은?”이라는 마지막 질문은 화룡점정이었다. 이런 설문으로 문제의 본질을 끌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혜주는 출장 오기 전 밤새며 공부했던 태양식품의 매출 분석 자료를 떠올렸다. 그러곤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보석의 휠체어를 탁 돌려세웠다.


-할아버지, 설문 대상부터 틀렸잖아요.

-엥? 뭐시?

-태양파래김은 시판되고 있는 김 중에서도 고객충성도가 높은 김입니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많죠.

-그런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보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쉽게 말하면 이미 단골인 고객들은 계속 구매한다는 소리잖아요! 그렇다면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 또는 다른 김으로 갈아탄 사람에게 물어야죠. 왜 이 제품을 다시 구매하지 않는지, 어떤 점을 개선해야 우리 김을 먹어볼 마음이 들지.

-그런겨?

-동네 사람들에게 설문을 돌렸다고 하셨죠? 아마 그 설문에서 태양파래김에 대한 만족도는 아주 높게 나왔을 겁니다. 당연하죠. 그분들은 오랜 기간 태양파래김을 구매해온 충성고객일 테니까요. 개선점에 대한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거야 문제가 없으니께 그런 거 아닌가?

-같은 설문지를 저희 회사에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결과가 나올까요? 경쟁사가 꽉 잡고 있는 마켓에 돌리면요? 아마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겁니다.

-흐음…….

 
흔들리는 보석에게 혜주가 쐐기를 박았다.


-저희 데이터스 코리아에서는 이처럼 태양파래김을 접해보지 않은 잠재 고객과 변심 고객을 타겟팅해 설문을 진행해볼 예정입니다. 올해 태양식품의 목표가 국내 점유율 1위라면서요. 우리는 향후 태양식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은 거예요.

 
혜주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보석이 금석을 시켜 도장을 꺼내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비해온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 거의 울 뻔했다며 발을 동동거리는 혜주를 주원은 빤히 바라보았다.

상기된 두 뺨이, 모아쥔 두 손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수고했다고 칭찬 안 해줘요?”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리던 혜주가 눈을 반짝거리며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알처럼 맑은 눈동자에 박힌 순수한 열정에 주원의 가슴이 일렁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줄까.

잠시 고민하던 주원은 두 팔을 뻗어 그대로 혜주를 끌어당겼다.


“수고했어.”

 

 
계산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참을 수가 없어 저지른 일이었다.

자그마한 체구가 품에 쏙 안겨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 잘했어, 오혜주.”

작은 어깨 위로 고개를 묻자 향긋한 체취가 코끝에 번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욕심이 차올랐다. 주원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혜주를 더욱 세게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듯 얼어버린 어깨, 당황하여 바르작대는 몸, 혜주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느껴졌다.


“어…… 역시 미국물 먹은 분은 다르네요. 뭘 이런 일로 허그까지…….”

혜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떼어냈다.


“그럼 저 먼저 차에 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새빨간 얼굴로 냅다 달아나는 그녀를 보며 주원은 급격히 씁쓸해졌다.

뭘 또 저렇게 도망까지.


“미국물 먹었다고 다 이러면 변태 소리 듣지.”

너라서 그런 건데.

오혜주 너라서.

손끝에 남은 그녀의 온기가 아직 따뜻했다. 주원은 혜주의 등을 어루만졌던 손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통은 왜 이렇게 작고 난리야.”

끌어안기 딱 좋게.

뒷말을 삼킨 주원은 혜주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자꾸만 일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