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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키스할까? (21/121)


#21. 키스할까?
2022.08.11.



 
같은 날 저녁.

혜주와 주원이 신월도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한 다희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젊은 두 남녀가 함께 밤을 지새우다 보면 무슨 일이라도 나지 않겠어?’

그녀는 혜주가 승원에게서 떨어져 나가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기왕이면 승원의 눈앞에서 떠들썩한 연애를 해주면 더 좋고.

승원에게서 혜주를 지워낼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승원은 ‘오혜주 짝퉁’ 천다희가 처음으로 혜주보다 먼저 가진 사람이었다. 혜주가 먼저 좋아했든 승원의 마음이 어떻든 ‘천다희의 고백을 승원이 받아주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술이 떡이 되었던 그날 밤.

승원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밤이 다희에겐 아직도 꿈만 같았다. 승원이 충동이라 말했던 그 밤을 위해 다희는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승원이 실수라고 표현했던 그 입맞춤을 떠올리면 아직도 짜릿하기만 했다.

사랑하니까. 가지고 싶으니까.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특히 그 누군가가 혜주가 된다면 다희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요새 승원 때문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원래 우유부단한 성격이긴 하지만 요즘 승원은 도가 지나쳤다.

약속을 잡으려고 하면 은근히 피하는 것 같고 평소엔 하지도 않던 야근을 자처해서 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게 언젠지, 대놓고 헤어지잔 소리는 안 했지만 이 정도면 사귀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제는 다희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원의 마음에 대해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십 년이나 제 마음도 모르고 헤맨 그 바보 같은 남자가 슬슬 진심을 깨우쳐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승원이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고!’

똑똑하지만 어딘지 허술한 남자.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쫄쫄 굶고 있을 것 같은 남자. 뭐라고 한마디 하는 날엔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처럼 불쌍해져서는 “미안해”라고 말해주는 남자.

화가 나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를 것 같은 그 남자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서 시기와 열등감으로 얼룩진 다희를 늘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것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되는 줄도 모르고 다희는 그를 사랑했다.


“승원아, 퇴근 안 해?”

모두가 퇴근한 밤, 다희는 구석에서 홀로 빛나는 모니터의 불빛을 찾아갔다.


“어어. 일이 조금 남았어. 먼저 퇴근할래?”

“아냐. 혼자 일찍 가봐야 뭐해. 너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오래 걸릴지도 몰라.”

“상관없어. 배고픈데 야식이나 시켜 먹을까?”

그제야 승원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뭔가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이내 서류철을 닫았다.


“응. 내가 사줄게. 뭐 먹을래?”

“요 앞에 떡볶이집 생겼더라. 거기 맛있다고들 하던데 한번 시켜볼까?”

“바로 주문할게. 이름 알려줘.”

곧 주문한 떡볶이가 배달되었다.

다희는 이렇게라도 승원과 데이트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매콤한 떡볶이를 나누어 먹으니 뭔가 스릴도 있었다.


“참, 그거 들었어? 강주원 대표님이랑 혜주 지금 섬에 갇혔다더라.”

“뭐?”

승원의 손이 허공에 딱 멈추었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혜주가 지금 주원과 함께 있다는 얘길 일부러 떠들면서 다희가 바란 건 단 하나였다.

승원이 그만 혜주를 놓아주기를. 네가 손댈 수 없는 곳으로 혜주가 멀리 떠나버렸음을 인정해주기를.


“아까 혜주한테 물어보니까 바람 때문에 배가 못 뜬대. 지금쯤 둘이 같이 있을걸? 신월도가 큰 섬이 아니라서 제대로 된 숙박업소도 없는 거 같던데 방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방 없으면 둘이 같이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랬어.”

다희는 혜주가 말하지도 않은 얘기를 사실처럼 떠들었다. 몹시 놀란 듯 굳어 있던 승원은 한참 후에야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출장 간 건데 별일이야 있겠어. 우리 형이 짐승도 아니고.”

“대표님이야 걱정 없지. 문제는 혜주야.”

“혜주가 왜?”

“걔 요새 되게 몸이 달았거든. 생각해봐. 혜주 마지막 연애가 벌써 5년 전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남자 냄새도 못 맡은 거지. 너한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걔 요새 야한 꿈도 종종 꾼댔어.”

“……에이, 설마.”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하겠어? 여자들은 야한 얘기 안 할 거라는 거, 그거 남자들 환상이다?”

다희는 동요하는 승원을 보며 태연히 거짓말을 이어갔다.


“특히 강 대표님과는 몸까지 본 사이잖아. 지난번에 네 오피스텔에서 마주쳤던 거 기억나지? 혜주가 그 일에 대해 종종 얘기했었어. 되게 인상 깊었나 보더라.”

“…….”

“그 껌껌한 섬에서 두 사람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심심하면 술이나 한잔하겠지? 낯선 장소에, 술까지 취하면 없던 감정도 생기겠다. 너랑 나도 그랬었잖아. 안 그래?”

승원은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난 혜주랑 강 대표님 잘됐으면 좋겠어. 혜주처럼 좋은 애한테 강 대표님처럼 근사한 남친 생기면 좋잖아. 우리 넷이 더블데이트할 수도 있고. 그치?”

“……둘이 알아서 하겠지.”

승원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뒤틀렸다.

입맛이 뚝 떨어진 듯 젓가락을 내려놓는 승원의 눈치를 살피며 다희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우리 내일은 뭐 할까?”

“내일?”

승원은 반사적으로 탁상 달력을 체크했다. 하트 스티커와 케이크 스티커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다희 생일?’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자꾸만 다희에게 소홀해진다. 했던 약속도 까먹고 데이트 날짜를 자꾸 잊어서 궁여지책으로 탁상 달력에 모든 일정을 적어놓게 되었다.

사귀기 전엔 고삐 풀고 술 마실 날이라며 잘도 기억했는데, 왜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나쁜 놈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다희에게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레스토랑 예약해뒀어. 같이 가자.”

승원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동이야, 자기야.”

“내일 금요일이니까 일 마치고 같이 퇴근하자. 괜찮지?”

“당연히 괜찮지! 나 벌써 너무너무 설레. 내일 예쁜 거 입고 와야겠다. 나름 특별한 날인데 우리 드레스코드라도 맞출까?”

“응. 네가 고르면 내가 맞출게.”

급조한 변명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다희를 보며 승원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 퇴근하자. 아홉 시가 넘었네.”

승원과 다희는 나란히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직장인들로 바글바글한 낮과 달리 로비는 한산했다.


‘눈치 볼 사람도 없는데 팔짱 껴도 되나?’

다희는 조금 망설였다. 아직 누구에게도 사귄다는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연애를 해야 하나 싶었다.


‘에이, 모르겠다. 설마 승원이가 뿌리치진 않겠지.’

결정을 내린 다희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다희니?”

그때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희 맞구나! 다행이다. 벌써 퇴근했는지 알고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로비를 딱 나서자마자 나타난 낯익은 얼굴에 다희의 얼굴이 하얗게 식었다.


“아…….”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십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정확히 반으로 가르마를 탄 쪽 진 머리에 짙은 눈화장. 개량 한복 위로 보이는 굵은 금목걸이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땅으로 꺼지고 싶다는 게 이런 심정인가. 승원이 옆에 없었다면 그대로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다희는 이 상황이 끔찍했다.


“회사까진 어쩐 일이세요?”

“하도 연락이 안 돼서 와봤어.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그런데 이분은?”

여인의 시선이 승원을 향했다. 승원은 일단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다희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강승원이라고 합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

예의 바르게 웃는 승원의 한마디가 칼날처럼 가슴을 후빈다. 다희는 회사 앞인 것도 잊고 승원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이분 앞에선 거짓말 안 해도 돼. 회사 사람도 아닌데, 뭐.”

그러곤 여인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세웠다.


“제 남자친구예요.”

“어어, 그랬구나. 우리 다희 남자친구였군요. 반가워요. 나는…….”

“아는 아줌마야.”

다희가 말허리를 뚝 끊고 끼어들었다.


“예전에 같은 동네 살았는데 요즘도 가끔 안부 인사드리고 그러거든. 아줌마, 그동안 잘 지내셨죠?”

다희가 엄포를 놓듯 여인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듯 조금 흔들리던 여인의 눈동자가 이내 고요해졌다.


“으응, 그래.”

“연락 못 받아서 죄송해요. 회사 일로 바빠서 통 정신이 없었네요. 지나가는 길에 들르신 거예요?”

“지나가는 길은 아니고…….”

여인의 손에는 금색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머뭇머뭇하던 여인이 이내 체념한 듯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뭐예요?”

……전해주래. 네 엄마가.”

여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엄마한테는 제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다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여인은 멀어지는 다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보온밥통에 든 미역국이 참 초라해지는 순간이다.

*



“좀 앉을래?”

마침 잠이 안 오던 터라 혜주는 흔쾌히 주원이 만들어준 작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다.


“차에서 자려고 나온 거예요?”

“응. 차박용으로 개조한 차라서.”

“그러게요. 조명도 있고 이불도 있고 치약 칫솔도 있네요? 와, 이럴 거면 방은 왜 구했담?”

“너는 편하게 자야 할 거 아니야.”

아. 나 편하게 재우려고 숙소를 구한 거구나.

투덜대던 혜주는 급격히 민망해졌다.


“대표님 의외로 매너가 좋으시네요.”

“직원복지 차원이지.”

“암요, 그러시겠죠.”

“그런데 너.”

주원이 빤히 혜주를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야?”

“네?”

“6시 지난 게 언젠데 자꾸 대표님, 대표님 하니까 퇴근 안 한 기분 들어.”

“그럼 뭐라고 불러요?”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하자. 고딩 땐 그렇게 안 불렀잖아.”

내가 고딩 때 강주원을 뭐라고 불렀더라?

혜주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내 닭살 돋는 단어 하나가 뇌리에 딱 떠올랐다.

오. 빠.

그래, 내가 강주원을 오빠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구나. 서로 부를 일이 별로 없어 손에 꼽힐 정도지만, 그래도 그 호칭으로 부르긴 했었다.


“호칭 편해지면 막 나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그러라고 밑밥 깔아주는 거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다. 대표님, 대표님 하다 보니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구겨지곤 했었는데, 이제 맞먹을 수 있다 이거지.


“그럼 냉큼 주워 먹겠습니다. 오. 빠.”

“좋네.”

주원이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처럼 깨끗한 여가수의 음성이 빗소리에 잘 어울렸다.

주원은 살짝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혜주는 알전구 아래 더욱 도드라지는 조각 같은 옆선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의 공기를 음미하듯 잔잔히 들썩이는 가슴과 박자를 맞추듯 움직이는 손가락.


“그렇게 쳐다보면 오해하는데.”

주원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아니라고 하는데 아닌 것 같지가 않아서.”

낮은 음성은 스미듯 달콤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목소리가 감미롭게 느껴지는 건 밤이 부린 마법일까.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비도 오고 파도 소리도 들리고 하니까…… 설마 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너도 이렇게 떨릴까.”

주원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 생각하고 있었어.”

“!”

‘너도’라고 말했다.

별것도 아닌 그 두 글자가 콱 박혀 자꾸만 가슴을 헤집는다.

아까부터 뛰던 심장이 숫제 폭격이라도 맞은 듯 덜컹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죠. 아무래도……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물론 제 옆에 대표님이 아니라 승원이가 앉아 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오빠.”

주원이 호칭을 정정했다.


“……네, 오빠. 아무튼 오빠라서 떨리는 건 아니고요.”

“난 너라서 그런 것 같아.”

“네엑?”

“옆에 있으니 확신이 드네.”

혜주는 저도 모르게 꿀꿀이 소리를 낸 입술을 틀어막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뭔가 어마어마한 얘길 들은 것 같은데 도저히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혜주는 떨리는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주원은 처음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이 스쳐 갔나 싶을 정도로 담담한 옆얼굴을 보니 더더욱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거 고백인가? 아니, 고백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데…… 그럼 이거 뭐지?’

혜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다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하하…… 노래 좋네요. 이거 제목이 뭐더라? 걔 있잖아요. 얼굴 하얗고 청순한 애! 소주 광고 모델 걔가 부른 거 같은데, 혹시 뭔지 알아요? 아, 완전 궁금하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몹시 더웠다. 어색한 공기를 참지 못한 혜주는 손부채질을 하며 연신 몸을 움직였다.


“어유, 조명이 엄청 뜨겁네요. 이거 한 단계 낮출 수 있어요? 아, 스위치 여기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혜주의 손바닥이 조명 스위치를 꾹 눌렀다.

딸깍.


“!”

알전구가 꺼지고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밝기 조절을 해야 하는데 허둥대다 조명을 오프해버린 것이다.

완벽한 어둠.

숨 막히는 정적 사이로 주원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몹시 당황해 허둥대던 혜주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불을 켰을 때보다 폭발적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 혜주는 감전이라도 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주원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키스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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