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오빠 지금 고백하러 간다. (22/121)


#22. 오빠 지금 고백하러 간다.
2022.08.14.



 
쿵.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키스할까?

 
미사여구 하나 없이 던져진 딱 네 글자에 혜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네 글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이거겠다 싶었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펌프질을 멈춘 듯했다.

장난이라 보기엔 너무도 진지한 주원의 눈빛.

바다 냄새가 섞인 공기. 우르르 다가왔다 물러서는 파도 소리.

키스하기에 너무도 완벽한 분위기였다.

잔잔히 흐르던 음악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혜주는 떨리는 눈으로 주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 선은 어둠 속에서도 그린 듯 선명했다. 한 번도 그의 입술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이제 보니 단정하면서도 색기가 넘치는 입술이다. 그의 입술에 한 번 폭 파묻히면 헤어나올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키스…… 하고 싶다.

해도 되나?

불현듯 들어버린 생각에 혜주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친!”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선 충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미친?”

“가, 갑자기 키스를 왜 해요? 덮치기만 해! 사내 성추행, 대표 갑질로 고소할 거예요!”

혜주는 혼미한 이성을 가까스로 붙들며 멀찍이 몸을 물렸다. 술기운이었으면 정말로 넘어갈 뻔했다.


‘미친 오혜주. 강주원과 키스하고 싶다니…… 미쳤어, 정말!’

혜주는 아예 두 손으로 입을 봉인한 채 몸을 웅크렸다. 흡사 치한이라도 맞닥뜨린 듯한 분위기였다.

숨 막히게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이대로 멈춘 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주원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매로 혜주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경고에 겁을 먹을 인간이 아닌데, 설마 이대로 덮치려나? 아니면…….’

온갖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주원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사내 성추행, 대표 갑질 좋아하네.”

딸칵.

조명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혜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혜주와 달리 주원의 얼굴은 놀랍도록 말끔했다.

방금 전의 일이 혼자만의 망상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뭐라고요?”

“궁금하다며.”

“?”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매도하네.”

주원이 혜주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노래 제목이라고, 바보야.”

혜주가 입을 떠억 벌렸다.

딱, 소리가 난 이마가 아픈 줄도 몰랐다. 정전이라도 된 듯 까매진 머릿속으로 1분 전 상황이 리플레이되었다.


-이거 제목이 뭐더라? 걔 있잖아요. 얼굴 하얗고 청순한 애! 소주 광고 모델 걔가 부른 거 같은데 혹시 뭔지 알아요? 아, 완전 궁금하네.

 
때마침 라디오에선 기가 막히게 노래의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키스할까? 너도 내 맘과 같다면 한번 시작해 볼까~”

허투루 들었던 노래 가사가 귓구멍에 쏙쏙 박혔다. 특히 “우리 키스할까?”라는 가사는 싸비에만 다섯 번이 넘게 나왔다. 가사가 저 지경이면 노래 제목도 요지경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노래 제목인지도 모르고 설레발을 쳤다니…… 손톱만 한 틈만 보이면 아주 기회다 싶어 쫙쫙 벌려대는 강주원 앞에서, 그것도 하필 키스…… 하아.’

혜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 노래 제목이었구나. 제목이 참 직설적이네요, 하하.”

“궁금하대서 알려줬더니 별.”

비웃는 듯 올라간 주원의 입꼬리는 혜주를 거의 군고구마로 만들었다.

그녀는 슬금슬금 우산을 손에 쥐었다. 쪽팔릴 때는 튀는 게 상책이다.


‘난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다. 난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주문을 외며 슬며시 내빼려는 혜주를 발견한 주원이 픽 실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바닥으로 내려앉은 혜주의 발이 멈춰 섰다.


“한 번도 먼저 덮친 적 없어. 키스든, 그 이상이든.”

“그런데요?”

“네가 그렇게 까불지만 않으면 대. 체. 로 안전하다는 소리야.”

웃음기 서린 음성에 혜주가 발끈했다.


“덮치긴 누가 덮친다고 그래요?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덮칠 일은 없으니 그쪽이나 안심하세요!”

주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하는 꼴 보니 아슬아슬해서.”

“하나도 안 아슬아슬하거든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웬 설레발이람?”

“그래, 뭐.”

그때까지만 해도 혜주는 몰랐다.

지금 자신이 던진 호언장담이 얼마 후 처절히 무너지리란 것을.

떡을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화수로 곱게 빚어 갖다 바치고 싶어질 거란 걸.


“천천히 가. 괜히 뛰다가 자빠지지 말고.”

“앗, 차가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주가 비틀거렸다.

물웅덩이를 밟아 흠뻑 젖은 채로 달아나는 혜주를 보며 주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펴지도 못한 우산으로 대충 머리를 막고 뛰어가는 뒷모습이 잔상처럼 이어졌다.

*

일주일이 흘렀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밤, 주원은 회사 빌딩 앞에 서 있었다.

신월도에서 돌아오자마자 급히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회사에 온 건 오랜만이었다.


“10시가 넘었는데 퇴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가 힐끗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휴대폰에는 데이터스 코리아의 출결 시스템이 켜져 있었다.

혜주의 자리가 녹색불로 빛나고 있다는 건 태그를 찍지 않고 퇴근한 게 아닌 이상 아직 회사에 있다는 뜻이었다.

주원은 피로한 눈자위를 꾹꾹 누르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의 회사. 야근을 확 없애버리든지 해야지, 원.”

주원은 오늘 혜주를 만날 생각이었다.

신월도에서 돌아온 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내내 생각했다. 우리 둘 사이에 풀어야 할 무언가가 남은 것 같다고.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게 착각일지라도 한 번쯤은 확인해보아야 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수수께끼를 너도 느끼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일주일이나 끌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어영부영 시간만 갔다. 원래도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마주치면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연락을 하기가 쑥스러웠다.


“……낯서네. 이런 기분.”

천하의 강주원이 긴장이란 걸 한다.

막상 들어가려니 몹시 떨려서 주원은 한참이나 심호흡을 했다.


“후우.”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키스할까?

 
같은 말을 머리로 생각했을 때와 입으로 내뱉었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뭐랄까. 정리되지 않던 감정들이 한 방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감정의 파편은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실체가 되었다. 그녀를 떠올리고, 웃음 짓고, 궁금해하던 모든 시간이 돋보기에 모인 빛처럼 강렬해졌다.

주원은 알고 있었다. 장난으로 넘겼지만 그건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을.

혜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느새 분명한 결을 가지고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키스…… 하마터면 해 버릴 뻔했지.’

그녀가 입을 막고 도리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친!

 
황당한 눈으로 욕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저질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주원은 1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빼빼로를 던져주고 도망갔던 소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그만 웃음이 나버렸다.

잘 가다가 멀쩡한 가로등엔 왜 들이받는지. 미어캣처럼 주위를 휙휙 둘러보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뛰어가 버리는 그녀를 보며 도와주려 급히 신발을 꿰었던 게 멋쩍었었다.

그때 그 소녀를 학원 앞에서 다시 만났었지. 키는 쪼매난 게 눈은 어쩜 그리 땡그란지 만화 캐릭터처럼 귀여웠다.

한번은 슬금슬금 도망가려는 그녀를 딱 잡아 세웠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고.

 
내게 빼빼로를 왜 주고 간 건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나의 어디가 좋은 건지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러면서 기대한 말은 단 하나였다.

좋아한다고.

그래, 그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혜주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빼빼로를 받아서 불쾌하셨죠?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빼빼로는 죄가 없으니까 막 버리진 마시고…… 승원이 주세요, 승원이. 걔 단 거 좋아하니깐.

 
고백도 제대로 안 한 주제에 왜 멋대로 내가 불쾌할 거라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빼빼로는 내가 알아서 할게.

-혹시 버리실까 봐서요.

-…….

-그럼 가봐도 될까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떠는 그녀를 닦달할 수가 없었다. 그땐 주원도 고작 열아홉의 소년이었기에 간다는 애를 붙잡을 용기가 없기도 했다.


-그래, 가 봐.

 
그때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되짚어보면 분명 호감이 있었던 것 같다.

강주원 인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아주 작은 씨앗 같은 감정이었다. 꾸준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었더라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원에게 그런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제 감정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원혜림이 자살했으니까.

주원은 이듬해 바로 유학을 떠났고 혜주의 일은 소소한 해프닝으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운명은 장난처럼 두 사람을 다시 붙여놓았다. 젖살이 빠져 손톱만큼 예뻐진 모습으로 나타난 혜주는 10년 전 그 시절처럼 귀엽고 엉성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하루 내내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어헤친 듯 숨이 트였다.

자꾸만 웃게 되고 자꾸만 보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습관처럼 그녀를 찾고 있는 제 모습에 주원은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토록 궁금한 것은 제 마음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란 걸.

너도 나와 같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너도 나처럼 가슴이 뛰냐고.

너도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나냐고.

몇 달 전 혜주는 마음을 접었다고 선언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주원이 제일 먼저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녀가 마음을 접은 것에 안도한 게 아니라 한때나마 그녀의 마음이 제게 있었음을 확인한 셈이라, 그게 기뻤다.


‘역시 날 좋아한 게 맞았네. 네가 그렇게나 진심이라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줘?’

하지만 어이없게도, 혜주는 철벽이었다.

내 시선이 머무르는 내내 단 한 차례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 여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람 마음이 색종이처럼 딱딱 접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넌 어떻게 그래. 왜 한 번을 질척대질 않냐고.

빼빼로를 덥석 안겨주곤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았던 그때처럼 헷갈리다가, 최근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접은 게 아니라 애초에 접을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닐까.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나를 좋아한 적이 없는 거라면.


‘그럼 어때. 깔끔하게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

결론을 내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좋아한 적이 없다면 좋아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내 마음을 모르는 거라면 알려줄게.

그러니까 오혜주, 너 거기 딱 기다려.

주원은 시계를 힐끗 보았다.


“가자, 강주원.”

오빠 지금 고백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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