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짜증 나게.
(23/121)
23. ……짜증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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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짜증 나게.
2022.08.18.
몇 시간 전.
혜주는 태양식품에 보낼 설문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밤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평소 야근을 장려하지 않는 사내 분위기상 직원 대다수는 퇴근한 상태였다.
대충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일을 하고 있자니 다희가 들어왔다. 그녀 역시 야근 당첨인지 손엔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쩐다, 오늘 야근이야?”
“응. 오늘까지 넘겨주기로 한 보고서를 깜빡했네.”
“헉, 퇴근했다가 다시 온 거야?”
“응.”
평소 같으면 ‘쌍야근’ 당첨을 환영하며 일단 수다부터 시작하자고 수선을 떨었을 다희가 오늘은 어쩐지 냉랭했다.
서류철을 툭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 그녀를 혜주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나?’
요즘 다희는 정말 이상했다. 하루는 냉탕이었다가 하루는 온탕이었다가 좀처럼 기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연애 초반에 으레 그렇듯 승원과 다퉜나 짐작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난번 꼬칫집 사건 이후 다희에게선 묘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어떤 날은 혜주의 입에서 승원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를 꺼리는 듯했다.
‘신경 쓰이네. 왜 그러지?’
혜주는 다희의 자리를 흘끔거리며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다희에게 혜주가 그렇듯, 혜주에게도 다희는 특별한 친구였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거의 8년을 붙어살았다. 둘 다 고향이 지방이라 자취를 했기 때문에 투룸에서 함께 산 적도 있었는데, 그땐 정말이지 하루 24시간을 붙어 있었던 것 같다.
소소한 얘기들로 밤을 지새우고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날들.
자매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외동인 혜주는 다희가 피를 나눈 자매처럼 소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가끔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다희가 너를 이상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 같다고, 가끔 보면 무서울 정도라고.
혜주의 옷을 따라 산다거나, 혜주의 강의 시간표에 맞춰 제 스케줄을 짠다거나, 하다못해 동아리까지 따라다니는 다희를 보며 그들은 ‘오혜주 짝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럴수록 혜주는 다희에게 더 잘해주려 노력했다. 그녀는 다희가 왜 저토록 자신에게 의지하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도 모르는 다희의 가정사를 오직 혜주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희의 엄마는 무당이었다.
어릴 때 갑작스레 신내림을 받은 엄마 때문에 다희의 가정은 풍비박산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자식을 버리고 이혼을 택했고, 친가 혈육들은 다희의 엄마를 미친X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정신병에 걸려 가정 파탄 낸 X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쫙 퍼지는 바람에 다희의 엄마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다희는 항상 외톨이였다. 친구가 그리워서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하면 어디선가 득달같이 나타난 부모들이 ‘귀신 옮는다’며 다희를 쫓아냈다. 똑같이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혜주와 다희는 상황이 달랐다.
애정결핍이라고 자조하는 다희를 혜주는 외면할 수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다희를 이해해주고 싶었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땐 걱정스럽기도 했고.
“출장 가서 별일 없었어?”
다행히 다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먼저 말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던 혜주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별일 없기는! 바람은 불지, 배는 끊겼지, 숙소라고 들어간 데는 진짜 코딱지만 한 민박이지, 진짜 역대급 출장이었다.”
“강주원 대표님이랑은 아무 일 없었고?”
……키스할까?
혜주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주원의 목소리에 가슴이 콱 조였다.
차 안에서 마주쳤던 까만 눈동자와 토독토독 떨어지던 빗소리. 놀랍도록 생생한 기억이었다.
“아무 일 없지, 그럼. 출장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어.”
“그래? 좀 아쉽겠네.”
“뭐가?”
“왜, 젊은 남녀가 한 섬에 갇히면 있을 법한 일들 있잖아. 마음 접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사람인데 아무 일 없었으면 아쉬운 거 맞지.”
“어우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대표님이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혜주가 장난스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다희의 눈빛은 싸늘했다.
“너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응?”
“강주원 좋아한다며! 그럼 뭐라도 해봐야지! 고백이나 제대로 해봤어? 아무것도 안 해놓고 마음은 왜 접는데?”
격앙된 다희의 목소리에 혜주는 어리둥절했다.
“내 짝사랑 내가 접었다는데 네가 왜 화를 내?”
“안타까우니까 그렇지! 너랑 나, 베프잖아. 우리 그 정도 사이도 안 돼?”
“아무리 베프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어.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지난번에 마음 접었다고 얘기했는데도 자꾸 이러는 건 오히려 내 마음을 무시하는 거지. 이번엔 선 넘은 것 같다, 쩐다.”
그제야 다희는 착 가라앉은 혜주의 눈빛을 눈치챘다.
“미안…… 난 그저 네가 강 대표님이랑 잘 됐으면 좋겠어서 그래. 강 대표님 너무 멋있는 분이잖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구내 식당 가면 다른 회사 사람들도 다 강 대표님 얘기만 한다고.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뾰족하게 말할 것까지는…….”
혜주는 이번 기회에 다희에게 확실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원에 대한 마음이 있건 없건 다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었다.
정말로 불쾌한 건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다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추기는 덴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란 것이 십중팔구 승원 때문이라는 것도.
“네가 뭘 걱정하는지 대충 알겠어. 남친에게 친한 여사친이 있다는 건 충분히 불안할 수 있지. 나도 그걸 알기에 최대한 조심하고 있어. 승원이랑 따로 연락도 안 하고 단톡방에서도 나왔잖아.”
“혜주야, 나는…….”
그때였다.
삐걱, 유리문을 열고 승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스큐즈미.”
예고 없이 등장한 승원의 모습에 다희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어어? 승원아,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출결 시스템 보니까 너희 야근하는 것 같더라고. 이 오빠야가 응원차 야식 조달하러 왔지.”
승원이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활짝 웃었다. 다희는 조금 전까지 혜주와 날을 세웠던 것도 잊고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와, 고마워. 이리 와서 앉아.”
그러나 정작 승원이 내려놓은 봉지를 보곤 안색이 굳었다. 하얀 비닐봉지 위엔 [핫핫 닭발]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오늘 속 쓰려서 저녁 못 먹었다고 얘기했는데 매운 닭발이라니…… 승원아, 이거 나 먹으라고 사 온 거 맞니?’
공교롭게도 혜주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매운 닭발이었다.
다희는 섭섭하다 못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거 이렇게 뜯는 거 맞아?”
다희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승원이 부지런히 포장을 분리했다. 용기에 압착된 비닐을 떼어내지 못해 버벅대는 그를 혜주가 타박했다.
“그걸 손으로 뜯는다고 되겠냐? 거기 실링칼 있잖아.”
“아아. 이거?”
“이리 줘봐.”
혜주가 직접 포장지를 잘라냈다.
“여친 야근한다고 야식 배달까지 하고. 강승원 인간 됐네.”
“칭찬으로 들을게.”
“그래. 그렇게 눈치가 없어야 강승원이지.”
“그것도 칭찬이지? 사람이 막 일관성 있다, 그런 뜻?”
“넌 알고 보면 사람이 참 긍정적이야.”
“오, 칭찬 쓰리 콤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포장을 뜯는 동안 다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제가 봐도 참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승원이가 저렇게 즐겁게 웃는 모습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서글픈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혜주가 막 뜯은 나무젓가락을 다희의 앞에 놔주며 일어섰다.
“자.”
다희는 영문을 몰라 혜주를 바라보았다.
“포장 다 뜯어놨으니 맛있게 먹어.”
“너는?”
“나 아까 저녁을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네.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다희는 아까 혜주가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운 것을 알고 있었다. 혜주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다는 것도.
“으응, 고마워.”
다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혜주가 나가버린 후.
사무실엔 승원과 다희 둘만 남았다. 승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닭발을 먹었으나 혜주가 나간 후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다희는 그런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시선을 느낀 승원이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거의 그대로인 다희의 앞접시를 발견했다.
“맛이 별로야? 오늘 통 못 먹네.”
다희는 꾹꾹 눌러 온 설움이 터졌다.
“나 오늘 속 안 좋다고 얘기했잖아.”
“아…… 미안. 내가 이렇다. 저녁 못 먹었다고 해서 챙겨주려고 온 건데, 하필이면 매운 걸 사 왔네.”
“…….”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승원은 자책하며 시선을 떨궜다. 다희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어떻게든 잘해주려고 발버둥 치는데, 하는 일마다 이런 식이다.
‘사귄 지 몇 달 안 됐는데 벌써 사과만 백번은 한 것 같네.’
미안하단 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아무리 반성해도 바뀌지 않는 자신이 구제 불능처럼 느껴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입술만 질겅거리던 승원의 눈에 반지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다희야, 그거 뭐야?”
“어?”
다희의 손가락에 낯선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야 뭐 아무 때나 낄 수 있지만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건 아무리 눈치 없는 그라도 안다.
“아무리 봐도 커플링 같은데…… 우리가 언제 반지 맞춘 적 있었나?”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요새 나사 빠진 사람처럼 맹하게 굴긴 했지만 반지를 맞춰놓고 기억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며칠 전에 커플링 문제로 다투기까지 했는데.
“난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반지인 것 같은데 설명해줄래?”
“어어, 그게, 승원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다희의 동공에 승원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희에게 다른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반지는 분명 커플링이었고 다희는 보란 듯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승원이 불시에 회사로 찾아올 거라는 걸 모른 상태에서 그 반지를 꼈다는 건…….
“길 가다가 예뻐서 샀어. 아무것도 아니야.”
승원은 서둘러 반지를 빼서 숨기는 다희의 손목을 탁 잡았다.
“잠깐만.”
이유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다희가 제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
*
혜주는 회사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조금 전 자리를 피해준답시고 사무실에서 나오긴 했는데 딱히 시간 때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나온 김에 배나 채워야겠다 싶어 삼각김밥에 컵라면까지 해치운 혜주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 배불러. 지금쯤이면 돌아갔으려나?”
사무실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 조금 지났다. 닭발에 소주라면 기본 세 시간이겠지만 오늘은 닭발에 사이다다.
‘그러면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대충 시간을 계산한 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원이 사 온 닭발을 먹지 않고 굳이 자리를 피한 건 오롯이 다희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즘 혜주는 베프들과의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처음엔 가슴이 아파서, 다음엔 눈치를 보느라. 그리고 요새는…… 모르겠다. 그냥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금요일 밤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꼬칫집에 모여 웃고 떠들던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반짝반짝 빛나던 20대가 통째로 날아간 듯 허탈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아쉽고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딩동.
엘리베이터가 사무실이 위치한 층에 멈췄다.
환한 로비와 달리 복도 불이 꺼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밝은 사무실 안쪽이 잘 보였다. 혜주는 승원이 갔나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모니터 뒤편에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고 말았다.
“!!!”
다희와 승원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격렬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다희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눈을 감고 있는 승원을 본 순간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아…….”
이미 마음에서 지운 사람이었다. 미련이 남은 것도, 더 이상 그립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승원이 다희를 좋아한다는 것도, 두 사람이 알콩달콩 연애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을 실제로 마주하니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뭐랄까.
가슴이 아픈 건 아닌데 숨이 턱 막혔다.
미운 건 아닌데 보고 싶진 않았다.
지금 저곳에 승원과 다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대도 마찬가지로 놀랐을 테지만, 그 사람이 승원과 다희라서 이렇게 온몸이 굳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툭.
뜨끈한 눈자위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혜주는 실소했다.
‘십 년이란 세월이 참 무섭긴 하네. 뭘 이런 거에 눈물이 나고 난리야.’
혜주는 급히 소매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녀가 채 손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스르륵 눈을 가려왔다.
“오혜주, 또 쓸데없이 멍 때리지.”
“!”
등 뒤에서 뻗어온 손길에 혜주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손목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가 아니었다면.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까칠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짜증 나게.”
그리고, 그게 강주원이 아니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