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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런데……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냐. (24/121)


#24. 그런데……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냐.
2022.08.21.



 
사무실 앞에 우두커니 선 혜주의 뒷모습을 봤을 때 주원은 반가웠다.


‘종이접기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딱딱 접히냐? 까짓거 뭐, 받아줄게. 되지도 않게 용쓸 필요 없다고.’

나름 고백이랍시고 준비한 말을 내내 되뇌는 동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내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던 주원은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혜주의 뒷모습에 가슴이 쿵쿵댔다.


“오혜……!”

하지만 채 한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둑한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뒷모습으로도 충분히 유추되는 당혹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듯 꿈쩍도 안 하는 두 어깨.


‘쟤 저기서 뭐해?’

주원은 혜주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

사무실 안에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등허리로 소름이 쫙 끼쳤다.

다 큰 동생 놈의 연애질을 목격한 거야 뭐, 기분이 더럽기는 해도 아주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혜주의 등에서 느껴지는 감정 때문이었다.

그건 뭐랄까. 단순히 못 볼 꼴을 보고 당황한 정도가 아니었다. 깊고 진한 감정의 파동 같은 것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녀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불안정한 감정이 닿아 있는 곳에, 승원이 있었다.

처음엔 이게 어떤 상황인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절친 둘이서 사무실에서 물고 빨고 있는 걸 목격했다면 모른 척 피하거나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게 보통 아닌가.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멍 때릴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냐.’

잠시 호흡을 고르는 혜주의 어깨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 순간, 뇌리에 떠돌아다니던 퍼즐이 거짓말처럼 딱딱 제자리를 찾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뇌리로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그거 승원이한테 줄 선물이었어요. 10년 전, 그 빼빼로도 승원이 줄 거였고요.

 
혜주는 그때 분명히 말했었다.


-그쪽 아니고 강승원이라고요. 알아들었어요?

 
그걸 믿지 않았던 건 주원 자신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빼빼로를 전하고 갔던 과거의 어느 날,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마주했던 재회의 순간.

쩌렁쩌렁 울리던 고백송의 가사가 틀림없이 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님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던 혜주의 말에 안도했고, 가끔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믿었다.

오혜주는 나를 좋아한다고.


‘……정말 승원이었어?’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일이 구슬처럼 꿰어졌다. 말로는 좋아한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빨리 포기해버린 그녀가, 대놓고 여지를 주는데도 모르는 척 딴청부리는 그녀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하…….”

주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뒤돌아 가고 싶다. 그러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그녀가 있다.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가.

꽉 막힌 숨을 겨우 토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주원은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 뺐다.


“오혜주, 또 쓸데없이 멍 때리지.”

성큼성큼 다가간 주원이 혜주의 두 눈을 가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짜증 나게.”

네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상처 입은 얼굴을 할 거면서, 대체 왜.


“대표님……?”

보지 마.

저딴 거 보지 마, 혜주야.


“나와.”

주원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혜주의 손을 끌고 나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눈물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화가 난다는 표현으론 부족할 만큼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솟구쳤다.


“이거 놔요. 대체 어딜 가는데요……!”

“잔말 말고 따라와.”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할 동안 주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광판만 보았다.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혜주가 이내 포기한 듯 잠잠해졌다.

주원은 완전히 건물을 빠져나온 후에야 혜주의 손을 놔주었다. 그사이 진정이 된 혜주가 붉어진 눈으로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나 사무실 들어가서 일해야 하는데 왜 멋대로 끌고 나와요?”

“지금 그 정신으로 무슨 일을 해?”

“내 정신이 뭐가요. 완전 멀쩡한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돌덩이처럼 굳어 있던 주제에 멀쩡하단 말이 나오나.

주원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화낼 구실도 없는 게, 실제로 그 말을 하는 혜주의 표정이 의외로 덤덤했다. 덤덤하다 못해 혜주는 화난 눈으로 거친 숨만 몰아쉬는 주원의 눈치까지 살폈다.


“오빠도 봤어요?”

“어.”

혜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이내 건조하게 웃었다.


“오빠도 엄청 당황했겠네요. 아, 진짜 순간적으로 완전 얼었다고요. 신성한 사무실에서 베프 두 명이 그러고 있으니 참……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노트북 놔두고 퇴근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잠시 서 있었던 거예요.”

“…….”

“전화로 산통 깨버릴까, 아님 한 번만 눈감아 줄까 고민 중이었어요. 아무리 친구들이라고 해도 너무했잖아요.”

“너 울었잖아.”

“눈꼴 시려서 그런 건데?”

“뭐?”

혜주가 배시시 웃었다.


“솔로 앞에서 염장 지르잖아요, 걔네가.”

주원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아직도 눈자위가 붉은데 너는 웃음이 나오냐.

괜찮은 척하는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봐요. 걔네 둘이 사귀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닌데 내가 울 이유가 없잖아요.”

주원은 차라리 혜주가 울었으면 했다. 이미 들킨 것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숨기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떻게 해줄까, 내가.

끝까지 모른 척해줘야 하나. 아니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네 비밀을 나만은 알아줘야 하나.

짧은 순간에도 수십 번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결국 주원은 어떤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혜주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퇴근이나 해.”

“저 노트북 사무실에 두고 왔는데요? 오늘 일할 것도 남았어요. 욱 팀장이 오늘까지 보고서 써서 올리라고 했거든요.”

“어차피 못 들어가잖아.”

주원이 턱짓으로 빌딩을 가리켰다.


“하긴.”

혜주는 금세 수긍했다. 사무실 안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데 지금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은 일은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해야겠네요.”

“노래방 갈래?”

“에엑?”

느닷없는 주원의 제안에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그는 노래방을 싫어한다고 했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애걸복걸했는데도 단칼에 거절한 사람이 갑자기 노래방을 가자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래방 싫어한다면서요.”

“어, 싫어해.”

“그런데 왜요?”

주원은 대답 대신 혜주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따라와. 배꼽 찢어지게 해줄게.”

 

 

*

사무실에 홀로 남은 다희는 허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어느 때보다 적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원이 있었던 곳엔 아무도 없었다.

불과 십 분 전.

혜주에게 보여주려고 꼈던 반지를 미처 빼지 못한 다희는 승원에게 반지를 들키고 말았다. 무슨 반지냐고 추궁하는 그 앞에서 식은땀만 줄줄 흘렀다.


“에이,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

하늘이 무너져도 살길은 있다고, 그 순간 퍼뜩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다희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해실해실 웃으며 변명했다.


“이 반지, 사실 우리 커플링이야. 저번에 같이 커플링하자고 했었잖아. 너 요새 많이 바쁜 거 같아서 내가 먼저 샀어. 내가 너무 설레발 쳤지?”

평소의 승원이라면 대번에 미안하다고 했을 거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줄도 모르고 내 생각만 했다며 오히려 새 커플링을 선물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원은 다희가 기대한 대답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반지 맞추는 건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했잖아.”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지나가다가 너무 예쁜 반지가 보여서 그냥 샀어.”

“내 건 어디에 있는데?”

“응?”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에 다희가 눈을 크게 떴다.


“커플링이라며. 그럼 내 것도 있을 거 아니야.”

“네 건 집에…….”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다희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말도 없이 커플링을 맞춘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정말 네가 커플링을 산 거라면 적어도 나 모르게 혼자 끼고 다녔을 리가 없잖아. 커플링의 의미 몰라?”

“네가 당장 끼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미뤄둔 거야!”

“나랑 커플링을 하고 싶었는데 정작 나한테는 숨겼다고?”

“그래! 네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다희는 울분이 차올랐다. 항상 다정하던 승원의 눈빛이 오늘따라 매섭게 느껴졌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너를 좋아하니까, 너와 모든 걸 함께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이해해주지 않아?’

승원은 벌게진 다희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속을 꿰뚫는 듯한 시선에 다희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데 혜주 앞에서는 왜 끼고 있었던 거야?”

“혼자 몰래 끼고 있었다가 빼는 걸 깜빡한 것뿐이야! 혜주도 야근하는 줄 몰랐다고!”

“게다가 혜주는 네 커플링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음식 포장을 뜯으면서 분명히 봤을 텐데 말이야.”

“그건……!”

“혜주에겐 이미 보여준 적 있는 거 아니야?”

승원은 바보가 아니었다. 맞추지도 않은 커플링을 굳이 혜주 앞에서 끼고 있었던 게 뭘 의미하는지 그는 단숨에 알아챘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


“실망이다, 천다희.”

승원이 돌아섰다.


“거기 서, 승원아!”

다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승원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니, 처음부터 그의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팠다. 가슴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제발 가지 말라고!”

그녀는 돌아서는 승원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내 얘기 안 끝났어! 이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생각은 무슨 생각! 나랑 얘기해. 내가 다 말할게.”

“네 말은 충분히 들은 것 같다.”

이대로 가면 이별이라는 것을 다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출입문을 막아섰다.


“가지 마.”

“비켜.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

승원은 단호했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다희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를 붙잡을 기회는 지금이 유일했다.


“내가 오죽하면 이래?”

다희는 승원의 가슴팍을 붙잡고 울먹였다.


“그래, 맞아. 이 반지 혜주 보여주려고 샀어. 됐니?”

“그러니까 혜주한테 왜!”

“불안했으니까!”

“내가 혜주랑 뭘 했는데? 네가 싫다고 해서 혜주랑 따로 연락한 적도, 만난 적도 없어. 매주 같이 갔던 꼬칫집도 가지 않았고 단톡방도 나왔잖아. 혜주가 신경 쓰인다고 네가 말한 뒤로 단둘이 만난 적도 없어. 그런데 뭐가 불안해?”

“네 눈빛, 표정, 행동 전부 다!”

다희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인기투표에서 혜주가 대표님을 찍었다고 했을 때 놀라던 네 얼굴, 꼬칫집에서 혜주를 감싸던 네 행동! 오늘만 해도 그래. 나 혼자 야근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추던 애가 오늘은 왜 야식까지 사 들고 온 건데?”

“…….”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이럴 거면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왜 거절하지 않았어?”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승원은 이를 악물었다.

다희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해서 그녀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녀와 보낼 시간이 자꾸만 기다려져서 정말로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날엔 혜주도 함께였다는 것을.

즐겁고, 행복하고, 기다려졌던 모든 시간 속에 혜주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미안하다, 다희야.”

“미안하다고 하지 마!”

다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승원을 쏘아보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승원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리며 울부짖었다.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제대로 노력해본 적도 없잖아!”

“노력……했어.”

“아니, 넌 하나도 노력하지 않았어. 날 여자로 봐줘.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봐달란 말이야!”

승원은 묵묵히 선 채로 다희의 주먹질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힘이 빠져버린 다희의 눈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혜주가 보인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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