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가 정말 미쳐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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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내가 정말 미쳐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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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내가 정말 미쳐가나 보다
2022.09.01.
어젯밤.
승원이 다희를 뿌리치고 나가버린 후 다희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만 헤어지자.
키스가 끝난 후 승원이 한 말은 그거 하나였다.
-……뭐?
-지금 이러는 거 너한테나 나한테나 좋을 거 없어. 너도 알잖아.
다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승원의 마음에 대해서는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오늘 당장 이별을 맞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사 온 야식에 행복해하던 그녀였다.
-승원아,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나한테 화나서 그런 거 알아. 정작 넌 혜주를 신경 쓰지도 않는데 나 혼자 지레짐작하고 질투해서 화난 거잖아. 이런 일로 헤어진다는 게 말이 돼?
-아니. 우린 헤어지는 게 맞아.
-정 그러면 우리 서로 시간을 갖자. 너 화 풀릴 때까지 내가 기다릴게. 응?
그러나 승원은 끝내 대답 없이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이대로라면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승원은 한번 결정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그는 그만큼 오래 생각하는 스타일이었고, 그렇기에 한 번 결정한 일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헤어지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같은 생각을 거듭했다는 뜻이었다. 다희는 그게 더 속이 상했다.
‘헤어지자고? 누구 마음대로 헤어져?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절대 안 돼!’
어떻게든 승원의 마음을 붙잡아두어야 했다. 아니, 마음을 잡아둘 수 없다면 그가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골몰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초, 중, 고, 대학교까지 16년을 학교에 다녔는데 그 어디에서도 떠난 사람의 마음을 잡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아악!”
다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나하고 헤어지고 나서 혜주한테 가면 어떡하지? 설마 지금 혜주랑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함에 발끝이 저렸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희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이겼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혜주는 절대 안 돼!’
승원을 사랑했다. 혜주도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던 다희에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울타리를 갖게 해준 사람이었다. 셋이라는 소속감 속에서 처음으로 행복했고, 난생처음 안정감을 느꼈다.
승원에 대한 혜주의 마음을, 그리고 혜주에 대한 승원의 마음을 알게 된 순간. 다희가 제일 걱정했던 건 그 울타리 안에서 홀로 튕겨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었다.
질근질근 손톱 끝을 깨물던 다희가 다이어리에 넣어둔 사진을 꺼냈다. 사귄 지 일주일 무렵 승원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서로의 뺨에 뽀뽀하는 사진을 보던 그녀의 뇌리로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사내연애, 비밀연애, 삼각관계.
언뜻 생각해도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키워드였다. 열 명 정도만 모여도 그중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 한둘쯤은 꼭 있기 마련이고 더욱이 회사라는, 폐쇄적이고 단조로운 공동체에선 소문이 쉽게 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쉬쉬하며 뒤에서 만나는 것이고. 승원 역시 당분간 회사에는 숨기자고 얘기했었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아. 가뜩이나 우리 형이 대표로 와서 말들이 많은데 너랑 사귀는 것까지 알려지면 귀찮아질 거야. 너랑 나랑 업무가 조금만 얽혀도 누가 누굴 도와줬다느니 수혜를 줬다느니 떠들어댈 거 아니야.’
만약 승원이와 내가 사귀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러고선 곧장 혜주를 만난다면?
회사에서 혜주, 승원, 다희 삼총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아마 셋의 관계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댈 테고, 진실이 어떻든 바람이라는 둥 환승이라는 둥 온갖 말이 나돌 것이다.
그런 걸 모를 나이도 아니니 승원은 아마 혜주를 욕 먹이기 싫어서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지.
‘그래. 이젠 어쩔 수 없어.’
다희는 스산한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곤 사진을 슬쩍 떨어뜨렸다.
*
“응, 맞아. 사실 나 일부러 그랬어.”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
다희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혜주는 놀란 얼굴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왜 그랬는데?”
“헤어지자고 하더라, 승원이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혜주야.”
이해할 수가 없어 눈을 치켜뜬 혜주를 향해 스르륵, 다희가 무릎을 굽혔다.
“나 좀 살려주라.”
“야, 쩐다, 너 왜 이래. 일어나. 응?”
“나 좀 도와줘, 혜주야…….”
혜주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다희를 급히 일으켰다. 그러나 다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요새 미친 거 같아. 승원이한텐 나밖에 없다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불안해 미치겠어.”
“뭐 때문에?”
“너. 혜주 너 때문에.”
충격을 받은 듯 다희의 어깨를 붙잡은 혜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냐, 네 잘못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어. 그런데 나 불안해 미칠 거 같아.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서 그래.”
“다희야.”
“너희 둘이 정말 친했지. 위급상황에서 승원이가 널 먼저 구할 정도로.”
“구한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붙잡은 거야. 눈앞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오르니까……!”
“어제도 그래. 강승원 나 야근할 때 야식 사 들고 온 거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너랑 같이 야근한 날에.”
“너 먹이려고 사 온 거잖아.”
“그래, 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그런데 난…… 자꾸만 그 모든 걸 너랑 연결하게 돼.”
다희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우는 다희 앞에서 혜주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승원과 다희가 사귀는 걸 알게 된 이후 각별히 조심했던 혜주는 이 상황이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희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관계가 달라졌으니 행동도 달라져야 했다. 승원이 똑같은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는 것이 예전엔 당연했다면 지금은 다희에겐 서운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정신병 걸릴 거 같아. 혜주야. 너 그냥 강주원 대표님이랑 사귀면 안 돼?”
“뭐?”
“아니, 굳이 대표님 아니라도 좋아. 아무나 좀 사귀어주라. 승원이가 온전히 나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줘…….”
다희가 혜주의 치맛자락을 잡고 빌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원하는 친구를 보는 혜주의 가슴도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절박해도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이다. 행여 자신의 존재가 걸림돌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치워버리듯 그렇게 물건 취급하면 안 되는 거였다.
혜주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나 갖다 붙이면 네 마음이 좀 편해지니?”
“혜주야…….”
“그래, 네 말대로 승원이랑 내가 친구로 지낸 시간이 좀 길었지. 습관처럼, 버릇처럼 서로를 챙기는 모습에 네가 불안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혜주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다독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신경 쓸까 싶어 단 한 번도 승원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 없었어. 간혹 셋이 모일 일이 있어도 이런저런 핑계 대고 일찍 빠져나오기도 했고.”
“너도 많이 노력했던 거 알아. 흐윽…….”
“생색내는 거 아니야. 그런 노력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내 마음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무리 너라도 안 돼. 특히 그게 강주원 대표님 얘기라면 더더욱.”
단호한 어조에 다희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미안. 이번에도 내가 선을 넘었네. 내가 정말 미쳐가나 보다…….”
퍽, 퍼억. 다희가 제 가슴을 치며 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혜주야.”
하늘이 무너진 사람처럼 우는 그녀를 보며 혜주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잘못도 없이 죄인이 된 것 같은 지저분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말 잘못이 없는 걸까?
승원을 좋아했던 마음 자체가 잘못이었던 건 아닐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내내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흘렀다.
퇴근 시간이 되어 가방을 챙기던 혜주가 물끄러미 대표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퇴근 안 했나?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네.’
물론 일개 직원과 대표가 매일 얼굴을 보는 게 더 이상한 그림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혜주는 그가 신경이 쓰였다.
승원의 자리는 여태 비어 있었다. 출결 시스템에 조퇴 신청서만 남겨놓고 잠수해버린 그는 퇴근 시간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혜주는 연락을 해 볼까 수십 번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희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따로 연락을 했다간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서였다.
“먼저 들어갈게요.”
혜주는 남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종일 어수선한 데다 오전에 다희와 진을 쭉 빼버린 탓에 오늘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졌다. 혜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가방을 고쳐맸다.
“아, 피곤하다.”
저녁을 걸렀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다. 다희와 승원에 대한 걱정 반, 주원에 대한 궁금함이 반. 지금 그가 뭘 하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맛있는 밥 먹고 재밌는 영화 보고 가끔 한강에서 자전거도 타고. 나랑 하자, 오혜주.
그날 혜주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한 게 전부였다.
알쏭달쏭하던 주원의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후 혜주의 심경은 더 복잡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회사 대표다. 게다가 강승원의 친형.
‘대충 사귀다 끝나기라도 하는 날엔 골치가 아프겠지…….’
정말 문제인 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그 자체였다. 그에게 아무 마음이 없다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는 것 자체가 반 이상 그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였다.
“오혜주 진짜 쉽다, 쉬워…….”
미남계에 홀랑 넘어가 버린 자신을 탄식하며 혜주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터억.
그때, 스르륵 닫히는 문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오혜주, 잠깐만.”
혜주는 얼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어…… 타세요.”
퇴근 시간임에도 구김 하나 없는 와이셔츠 차림의 주원이었다.
다사다난한 하루의 끝에 처음 얼굴을 봐서 그런지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색하기도 했다.
“지금 퇴근해?”
“네. 이제 하려고요.”
“나도.”
주원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전광판만 응시했다. 평소와 달리 서늘한 기운이 도는 그의 모습에 혜주는 몇 번이나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닫았다.
“식사하셨어요?”
한참 고민한 끝에 꺼낸다는 말이 고작 그거였다.
“아니. 넌?”
“저도 아직이요.”
혜주는 그도 아직 식사 전이라는 사실에 반색했다. 그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승원과 연락이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어제 나눴던 대화에 대한 결론도 궁금했다.
그래서 나랑 정확히 어떻게 지내고 싶다는 것인지, 정말 나랑 한강도 가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어줄 것인지.
“저기, 괜찮으시면…….”
딩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주원이 힐끗 혜주의 얼굴을 보았다.
“1층에서 내릴 거지?”
“아, 네.”
혜주는 엉겁결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마치 등을 떠밀린 기분이었다. 속으로 대패삼겹살을 먹을까 마라탕을 먹을까 궁리하던 혜주는 무척 심란해졌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너도.”
스르륵.
미련 없이 문이 닫혔다.
천천히 바뀌는 전광판의 숫자를 보며 혜주가 중얼거렸다.
“오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아님 혹시 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