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강주원, 벨도 없는 놈 (28/121)


#28. 강주원, 벨도 없는 놈
2022.09.04.



 
일요일 아침.

주원은 흠뻑 땀에 젖은 채 런닝머신을 뛰고 있었다. 눈뜨자마자 오피스텔에 딸린 헬스클럽으로 내려와 운동을 시작한 지 벌써 두 시간째다.

평소 드는 중량보다 더 많은 무게를 치고, 평소 달리는 거리보다 더 많은 킬로 수를 찍었지만, 아직도 체력이 남아돌았다.

어제도 헬스클럽에서만 여섯 시간을 보냈다. 운동 선수도 아닌데 이렇게 미친 듯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체력을 바닥내기 위해서다.

아무 생각 없이 쓰러져 자기 위해서 누군가는 술을 마시지만, 강주원이 택한 방법은 바로 운동이었다.


‘두 시간은 더 뛰어야겠군.’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힐끗 바라본 그가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운동이라면 환장하는 그이지만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운동을 하는 이유는 혜주 때문이었다.

누우면 생각이 나고 앉아도 생각이 나고, 집 앞 슈퍼를 가도 생각이 났다. 머릿속을 꽉 채운 혜주 때문에 주원은 골치가 아팠다. 과열된 머리를 잠시나마 비우기 위해선 몸을 괴롭혀야 했다.


‘나이 스물여덟에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오다니, 젠장.’

사춘기 때도 안 하던 방황을 이제야 하고 있다.

미치게 궁금하고, 미치게 보고 싶고, 미치게 갖고 싶은 이 마음이 주원에겐 낯설기만 했다. 고등학생일 때 잠깐 사귀었던 혜림과 헤어지고 스무 살에 유학길에 오른 후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머니 아시면 난리 나겠군. 아들 두 놈이 여자 때문에 이렇게 절절매고 있는 걸 알면.’

주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인 선우연 여사에게 두 아들은 아픈 손가락, 믿는 손가락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픈 손가락 쪽이 주원이었다.

혜림이 목을 맨 사건으로 주원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악몽 때문에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이니 선우연 여사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게 당연했다.

반면 승원은 어릴 때부터 순둥이로 유명한 놈이었다. 집에선 애교 있는 아들, 학교에선 수재. 다소 맹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제 앞가림 하나는 똑똑히 하는 놈이었다.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조만간 선우연 여사 뒷목 잡을 일이 생길 것 같단 말이지.’

금요일에 그렇게 뛰쳐나간 후 승원은 여태 연락이 없었다. 휴대폰도 꺼두고 집도 비운 채 완전히 연락이 두절됐다. 다 큰 남자 새끼가 뭐 별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뭔가 대형 사고를 치고 잠수를 탄 거라면 걱정이 덜 되겠는데, 사실 별일도 아니지 않은가!


‘전날 여친과 다투었다. 홧김에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밀연애가 탄로가 났다.’

간단히 정리하면 딱 이 정도 사건.

승원처럼 무던한 녀석이 데미지 1정도의 사건을 10으로 반응을 한다는 건 뭔가 숨겨진 얘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주원이 걱정하는 부분은 정확히 그 포인트였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주원은 꽉 차오른 숨을 정리하며 런닝머신에서 내려왔다.

잠깐 호흡을 고르니 그새 잡생각이 떠올랐다.


-너 그냥 강주원 대표님이랑 사귀면 안 돼? 아니, 굳이 대표님 아니라도 좋아. 아무나 좀 사귀어주라.

 
금요일에 옥상에서 들었던 혜주와 다희의 대화.

바람에 섞여 모든 대화를 듣지는 못했지만 혜주의 대답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아무나 갖다 붙이면 네 마음이 좀 편해지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날아와 심장에 박힌 것 같았다.

‘아무나’, ‘갖다 붙인다’.

따로따로 들어도 기분 나쁜 두 마디가 합쳐진 시너지 효과는 상당했다. 그건 강주원 인생에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이었다.

마치 진열대에 올라간 떨이 상품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주인이 동전을 짤랑거리며 사가는 날만 얌전히 기다리는 싸구려 물건이 된 기분.

혜주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기분이 아주 더럽고 불쾌했다. 미적분보다 풀기 어렵다는 남자라는 얘길 심심찮게 들은 내가 왜 이딴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강주원, 많이 죽었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냐.’

주원은 땀을 닦으며 전신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숱 많은 머리칼, 쭉 뻗은 콧대, 다크 브라운 색상의 눈동자. 웃을 때마다 살짝 패는 세로 보조개는 자신이 봐도 완벽했다.

몸매는 또 어떻고. 슈트에 최적화된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떡 벌어진 어깨는 남자들의 워너비라 봐도 무방했다. 슬쩍 티셔츠를 들어 확인하니 쫙 갈라진 여섯 개의 복근이 보인다.


“이렇게나 멀쩡한데, 아니, 멀쩡하다 못해 아주 빛이 나는데 오혜주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강남역에 오 분만 서 있어도 기획사 명함을 몇 개나 받는 강주원이 떨이 취급을 받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주말에 혜주와 할 일을 스무 개쯤 적어놓았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내친김에 한강에서 바이크도 타고.

고백은 아니지만 그 비스무리한 것을 하긴 했으니, 어쨌든 그쪽에서도 뭔가 생각이 있을 거고 주원은 그 대답을 빨리 듣고 싶었다.

혜주가 거절할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남자의 짐승적인 육감으로 보건대 오혜주는 분명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

가끔 빤히 훔쳐보던 눈빛, 무슨 말만 하면 붉어지던 볼, 키스할까 한마디에 가팔라지던 숨소리.

주원은 굳이 따지자면 곰보다는 여우 스타일이라, 승원이 십 년을 두고도 읽지 못했던 감정을 단번에 읽었다.


‘적어도 날 남자로는 본다는 얘기지.’

혜주가 원래 좋아하던 사람이 승원이라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둘이 사귀었던 것도 아니고, 사귈 것도 아니고, 하물며 썸을 탄 것도 아니고.

혜주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려줘야 할지, 아니면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갈지, 속도에 대해 고민이 되긴 했지만 방향은 분명히 정해진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겠다.

떨이 취급당하는 건 싫은데.


‘아무리 너라도 이건 아니지. 내가 이런 취급 받으면서 애걸복걸할 이유가 뭐야.’

이건 강주원 자존심의 문제였다. 고고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주원은 지금 당장은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좋아도 그 자신만큼 소중하지는 않았고, 자존심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빠 뭐 해요?]

운동을 마치고 캐비닛을 열자마자 도착한 메시지 하나에 왜 나는 댕댕이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인가.


[저녁에 약속 없으면 한강 갈래요?]

이모티콘 하나 없는 그 메시지에 왜 나는.


[그러든지.]

……가슴이 뛰는 거냔 말이다.


“하아, 강주원, 벨도 없는 놈.”

주원은 깊은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캐비닛을 닫았다.

혜주가 던져준 뼈다귀를 덥석 물어버린 개가 된 기분이었다.

*

몇 시간 후.

혜주는 옷장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고르고 있었다.


“이건 좀 더울 것 같고, 이건 너무 애 같고…… 산책하다가 바닥에 앉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짧은 옷은 좀 그렇겠지?”

옷장에 옷 넣을 공간도 없는데 입을 옷도 없는 아이러니한 진실.

결국 한 시간이나 고르고 고른 옷이 일주일 전에 입었던 청바지와 블라우스였다. 혜주는 옷을 피팅하곤 벽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여덟 시면 저녁은 먹고 나가야겠지? 시간을 너무 애매하게 잡았나?”

살짝 허기진 배를 어루만지며 혜주가 냉장고를 열었다. 다행히 어제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있었다.


“이거라도 먹어야겠다.”

혜주는 샌드위치를 덥석 물곤 침대에 앉았다. 약속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오늘 주원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혜주로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주말에 승원과 하던 일들을 주원이 해주겠다고 얘기한 후 처음 하게 된 데이트.

주원에게서 생각보다 늦게 답이 오는 바람에 십 초에 한 번씩 휴대폰을 열어보며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혜주는 노래방에서 그가 보낸 사인이 분명 그린라이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평소 눈치 없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는 강승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분명한 시그널이었으니까.


‘오늘 만나면 무슨 얘길 하지? 혹시 나 좋아하냐고 물어볼까? 아냐, 그건 너무 직설적이지. 그냥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물어볼까? 티 안 나게 은근슬쩍 떠보는 식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데면데면하게 헤어진 후 주말 내내 주원을 생각했다.


‘분명 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왜 그렇게 쌀쌀맞게 가버린 거지? 황금 같은 불금인데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선약이 있나? 대체 누구랑?’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토요일에라도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흔한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온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혜주는 뒤늦게 현타가 왔다.


‘내가 왜 이렇게 강주원 연락을 기다리는 거지?’

자정이 넘어서 확인하니 휴대폰 배터리가 10퍼센트도 남지 않았다. 그만큼 하루 온종일 휴대폰을 들고 살았다는 얘기다.

급격히 심각해진 혜주는 밤새 뒤척이며 골몰했다. 그러고 나서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나?’

다희에게 아무나 갖다 붙이지 말라고 쏘아붙인 게 바로 어저껜데,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생각이 바뀌다니.

이건 말이 안 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그렇게 말한 건 주원이 싫어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희가 강매하듯 주원을 ‘찍어 붙이는 게’ 싫은 거였다. 외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텐데, 다희가 콕 찝어 말한 사람이 주원이라 더 과하게 반응한 면도 있었다.


‘그 사람이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내가 백 일 동안 삼보일배를 하며 애원해도 사귀어줄까 말까 한 사람인데.’

결국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운 혜주는 아침이 되자마자 결심했다. 주원을 만나보기로.

잘생겨서 좋은 건지, 돈이 많아서 좋은 건지, 남자다워서 좋은 건지, 혹은 승원과 닮아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혜주는 이 감정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길 바랐다. 아주 오랫동안 승원을 짝사랑했는데 이제 와서 그의 형을 좋아한다는 게 그녀로선 퍽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잠깐 이러다 말 감정이면 좋겠는데. 만약 아니라면…….’

혜주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간과한 단 한 가지는 그날 옥상에 주원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다희와 나눈 얘기를 그가 모두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혜주는 잔뜩 부푼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저 멀리 주원이 보였다.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흔하디흔한 복장이었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비율 탓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혜주를 발견한 주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왔어?”

“네. 오빠는 언제 왔어요? 여기서까지 운동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운동까진 아니고.”

그렇게 땀을 흘리는데 운동이 아니면 뭔가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마를 훔치는 주원을 보며 혜주는 혀를 내둘렀다.


“언제 왔어요?”

“한 두어 시간 전에?”

“그때부터 달린 건 아니죠?”

주원은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1029칼로리 소모했네.”

“헐. 무슨 운동을 그렇게 무식하게 해요?”

주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라면 먹으려고.”

“?”

“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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