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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랑 키스해볼래요? (29/121)


#29. 나랑 키스해볼래요?
2022.09.08.



 
라면이 뭐라고 이렇게 좋을 일인가.

나와 라면을 먹기 위해 굳이 두 시간을 뛰었다는 남자 앞에서 혜주는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라면……요?”

예쁜 돗자리 깔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함께 라면 먹을 생각을 하니 괜히 설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머리 위엔 축 늘어진 버드나무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아,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이거.

그러나 아름다운 상상은 주원의 비웃음 한방에 와장창 부서졌다.


“너 배 많이 고프냐? 라면 먹자는데 뭘 그렇게 방방 뛰고 그래.”

픽 한번 웃고는 앞서 걸어가 버리는 주원의 등을 혜주가 노려보았다.

하여간 남자들은 이렇게 포커스를 못 맞춘다니까.

한강에서 ‘너랑’ 라면 먹을 생각을 하니 설레는 거지, 그깟 라면이 뭐 대수겠나요. 이 바보.


“제가 원래 라면이라면 환장하거든요. 특히 야외에서 먹는 라면이요!”

“알았어. 두 개 사줄게.”

“핫도그 추가도 되나요?”

“안 될 거 없지.”

둘은 편의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산들산들 강에서 불어온 바람이 귀밑을 스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혜주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주원이 혜주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기는 했으나 다리 길이가 한참 차이가 나다 보니 조금 숨이 찼다.


“평소에 몸 관리 엄청 하시나 봐요. 그렇게 뛰었는데도 잘 걷네요.”

“어. 이 몸매가 거저 얻어지는 몸은 아니잖아.”

“…….”

“왜 대답이 없어? 다 봐놓고선.”

재수는 없는데 반박할 수도 없네.

지난번에 본 쫙 갈라진 복근을 떠올리며 혜주가 구시렁댔다.


“저기요. 제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어디 가서 그렇게 막 노골적으로 자기 자랑하고 그러지 마세요. 사실이라도 재수 없으니까.”

“재수 없으면 지들이 뭐 어쩔 건데.”

“와…… 친구 있어요?”

“많은데?”

“한 열 명만 이름 대 봐요.”

“싫어. 개인정보라.”

개인정보는 개뿔. 저 성격이면 친구 아니라 친구 할아비도 없을 게 뻔했다.

열 명 아니면 다섯 명이라도 이름을 대 보라는 혜주와, 널 뭘 믿고 내 소중한 개인정보를 내주냐는 주원의 티격태격은 편의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났다.

혜주가 감자 핫도그를 먹을까 오리지널을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주원은 라면을 끓였다. 네모난 은박 케이스에 담긴 편의점 전용 라면이었다.

감자 핫도그를 고른 혜주가 능숙하게 조리 기계를 작동하는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오, 한강 도시락 끓일 줄 아네요? 이런 거 안 먹어봤을 줄 알았는데.”

“안 먹어봤어.”

“처음이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잘해요?”

“기계 쓰는 건 원래 잘해.”

……말을 말아야지.

사실 혜주는 처음 이 기계를 접했을 때 한참을 헤맸었다. 수프를 풀고 뜨거운 물만 받으면 되는 보통의 컵라면과 달리 이 라면은 전용 조리 기계를 통해 끓여야 했다.

용기 사이드에 있는 바코드를 찍고 화구 위에 라면 용기를 올린 후 조리 시작 버튼을 누르면 되는데 혜주는 바코드를 찍는 것부터 버벅댔었다.

그때 승원이 도와줬었는데.


‘아…….’

불현듯 승원을 떠올린 혜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승원이한테는 연락해봤어요?”

주원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아니.”

너무 쌀쌀맞게 대꾸했다 싶었는지 그가 덧붙였다.


“어제까진 전화해봤는데 오늘은 안 했어. 폰이 꺼져 있더라고. 보나 마나 게임 전용 모텔 같은 거 잡아놓고 놀고 있을 거야.”

“잠수 제대로 탔네요.”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잠수 탈 일이 아니잖아. 여친 있는 게 뭐 어때서. 대표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감히 사내연애 운운하며 불이익을 줄 꼰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다희가 그러는데 두 사람 전날 다툰 모양이더라고요. 승원이가 헤어지자고 그랬대요. 그런 마당에 갑자기 소문이 나니 당황스러웠던 거 아닐까요?”

“그 정도 일로 회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무책임한 놈은 아니야.”

“그렇긴 하죠.”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잡았다.

초여름 한강은 싱그러웠다. 푸릇푸릇한 잔디와 머리 위에서 산들거리는 버드나무 잎사귀.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잎사귀 사이사이로 짙은 밤의 색이 드리웠다. 밤이 아직 선선해서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했다.


“여기 좋네요.”

혜주가 고른 장소는 공원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이었다. 잔디에서부터 시작된 계단식 돌이 강물까지 연결되어 사람이 앉기 딱 좋았다. 초저녁부터 이미 누군가 다녀갔는지 다 먹은 과자 봉지와 캔커피가 굴러다녔다.


“누가 이런 데 쓰레기를 버리고 갔네.”

“그냥 놔둬.”

“바람 불면 강으로 날아갈 것 같아서요. 잠시만요.”

혜주는 쓰레기를 주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저 멀리 쓰레기통을 발견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하여간 오지랖은.”

그러나 말과는 달리 입가엔 옅은 미소가 어렸다.

혜주의 저런 모습이 좋았다.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해서 좋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것도 좋았다. 융통성 있는 척 굴면서 결국은 손해 보는 모습도,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믿어주는 것도 좋았다.

야무지게 탁탁 손을 털며 뛰어오는 혜주를 주원은 새기듯 눈에 담았다. 바람에 찰랑이는 머리칼에, 눈이 마주치자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꼬리에 절로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그래, 나는 오혜주를 좋아한다.

그런 너라서 좋아할 수밖에 없어.


“오늘 갑자기 보자고 해서 좀 놀라셨죠? 주말인데 뭐 하고 있었어요?”

혜주가 철퍼덕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운동하고 청소하고.”

……네 생각도 하고.

사실 운동하는 중에도, 청소하는 중에도 네 생각을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넌?”

끓어 넘치는 마음을 꾹 눌러 담으며 주원이 태연하게 물었다.


“저도 비슷했어요. 오전에 좀 뒹굴거리다가 점심에 세탁소에 다녀왔거든요. 오는 길에 조금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사 먹었는데 진짜 맛있더라고요.”

“주말에 잘 쉬었네.”

“아, 그런데 벌써 주말 다 끝났어요. 여기 오니까 내일이 월요일이란 게 실감이 안 나네요. 저기 봐요. 다들 시계도 안 보고 놀고 있잖아요. 다들 출근 안 하나?”

그녀의 말마따나 한강의 밤은 낭만으로 가득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연인들과 밤을 잊은 청춘들. 그들이 피워 낸 공기는 젊고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그들을 꼭 닮은 여름 초입의 어느 날.


“아, 너무 좋다.”

폐부 깊숙이 차오른 초여름의 향기를 만끽하며 혜주가 고개를 젖혔다.

나란히 앉아 있던 주원이 흘러가듯 대답했다.


“나도 좋아해.”

“?”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말이라 하마터면 흘려들을 뻔했다. 주원의 대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정확히 3초 후였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혜주는 휘둥그레진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블랙아웃이 된 뇌리로 방금 들은 다섯 글자만 둥둥 떠다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뭐가.”

“좋아한다면서요. 좋아랑 좋아해랑 전혀 다른 거 알죠? 나 완전 똑똑히 들었거든요.”

곱씹어볼수록 가슴이 쿵쿵 뛴다.

지금껏 주원이 몇 번 에둘러 표현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이거 고백인가? 확신하기엔 좀…… 애매한데.

너무 스치듯 지나간 말이라 네가 잘못 들은 거라 우겨도 할 말이 없었다. 네 말에 그저 맞장구쳐준 거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억울하게도 그가 던진 문장엔 결정적으로 목적어가 빠져 있었으니까.


-나도 좋아해.

 


‘도대체 뭘 좋아한다는 거지?’

혜주는 빨리 입을 열란 의미로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얄밉게도 주원은 가뿐히 그 시선을 씹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기가 생긴 혜주는 두 손으로 주원의 뺨을 잡아 돌려세웠다.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또박또박 물었다.


“오빠 나 좋아해요?”

주원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라지도 않았다. 까만 밤에 더욱 잘 어울리는 눈동자가 삼키듯 그녀를 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대답해주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둥. 둥.

혜주의 가슴이 진동했다.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그가 물었다.


‘그러게.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혜주는 알지 못했다.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기분이 좋을 것도 같고 두려울 것도 같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져 내내 외면했지만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었다.


“주말 내내 생각을 해봤어요. 그동안 오빠가 나한테 했던 말과 행동 전부요.”

혜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런 덴 워낙 둔한 편이거든요. 다희랑 승원이랑 사귀는 것도 까맣게 몰랐을 정도로요.”

“그런데?”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혜주는 비웃음을 각오하고 말했다. 만에 하나 넘겨짚은 거라면 두고두고 이불 킥을 할 만한 사건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낯뜨거운 말을 뱉는 순간이 올 줄이야!

주원은 웃지 않았다. 쉽사리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타는 듯한 시선이 시뻘게진 혜주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어떤데.”

“오빠를 생각하면…….”

혜주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요.”

“무서워?”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회사 대표님이기도 하고 승원이 형이기도 하니까. 아, 물론 승원이와 전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요.”

“…….”

“가끔은 떨리기도 해요. 단순히 긴장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오빠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겠어요, 이게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때로는 말을 해야 아는 것들이 있다. 안개처럼 드리워진 감정 역시 그랬다. 말을 하는 동안 점점 선명해지는 감정의 조각이 혜주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좋아한다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평생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말인데요. 한번 확인해봐도 돼요?”

혜주는 붉어진 뺨을 들어 주원을 마주 보았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주원이 턱짓하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 내내 머릿속으로 담아두었던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나랑 키스해볼래요?”

주원은 시선을 내리깐 채 피식 웃었다.


“하필이면 제일 위험한 방법을 골랐네.”

커다란 그림자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핏줄이 선 남자의 손이, 짙은 향기를 간직한 남자의 몸이, 그리고 서늘하게 다물린 입술이, 그의 세상에 오롯이 가두려는 듯 혜주를 덮쳐왔다.


“!”

 

 
먼저 제안을 했지만 설마하니 대답을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던 터라 혜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젖히며 입을 가렸다. 기울어진 그녀의 등을 한 손으로 받친 주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입 벌려, 오혜주.”

나직한 숨결이 입술 위를 스쳤다.


“확인해보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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