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입 다물고 키스하는 방법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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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입 다물고 키스하는 방법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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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입 다물고 키스하는 방법은 모르겠는데
2022.09.11.
승원은 실핏줄이 선 눈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까치집이었고 뺨은 홀쭉했다. 키보드 옆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쌓여 있었고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메리카노도 석 잔이나 있었다.
금요일에 회사를 뛰쳐나온 후 꼬박 2박 3일을 칩거했다. 집에 있으면 자꾸 사람들이 찾아올 것 같아서 일부러 근처의 모텔을 찾았다. 컴퓨터 사양이 좋아 종종 묵었던 곳이다.
“아, 또 졌어.”
주특기인 롤플레잉 게임에서 내리 네 판을 연속으로 패배했다. 한때는 프로게이머를 꿈꿨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그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 열 받네, 진짜.”
승원은 모니터를 한 번 노려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껐다. 게임 할 때만큼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는 그인데 오늘따라 정신이 산만했다.
창밖은 어느덧 깜깜했다. 쪽창에 비친 가로등 불빛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 승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이면 월요일이네.’
아침에 출근할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다희와의 열애 사실이 까발려진 금요일 오전, 회사를 박차고 나온 후 쭉 휴대폰을 꺼놓고 게임에만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과민반응할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하게 대처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펄쩍 뛰고 나왔으니 말들이 많을 것이다. 가뜩이나 크지도 않은 회사에서 얼마나 뒷말을 해댈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미치겠네, 진짜……..”
게임에서 벗어나니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현실이 보인다. 승원은 등받이에 기댄 채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결국 꺼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지잉, 지이잉, 지이잉.
전원이 켜지자마자 문자며 캐치콜이 날아들었다. 그를 걱정한 직장 동료와 주원이 보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희의 메시지였다.
-승원아, 어디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로 흘린 거잖아…… 그게 그렇게 화날 일이야?
-헤어지자고 했던 말 진심 아니지?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문자 보면 연락해줘.
-전화 좀 받아, 제발…….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잠수가 웬 말이야, 잠수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다희에게 먼저 연락을 해주려 했는데 막상 생각을 하려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이런 유치한 짓을 해버리다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큰일났네…… 다희한테 뭐라고 그러지?”
내일이면 당장 출근을 해야 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승원은 머리를 싸맨 채 골몰했다.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다희와의 관계였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찬찬히 곱씹어보니 많은 일이 떠올랐다.
야근을 하는 다희에게 야식을 사다 주었던 일, 가짜 커플링을 낀 그녀에게 화가 났던 일, 다툼 끝에 결국 이별을 고했던 일,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사무실 복도에 떨어져 있던 사진 한 장.
다희는 그 사진을 실수로 흘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다이어리에 멀쩡히 꽂혀 있던 사진이 왜 사무실에, 그것도 출근하자마자 떡하니 보이는 자리에 떨어져 있었겠는가?
승원이 정말로 화가 나는 건 다희와의 비밀연애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보다도 그걸 다희가 ‘일부러’ 떨어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가짜 커플링을 일부러 혜주에게 보여준 다희의 의도, 그리고 사람들 앞에 사진을 공개한 다희의 목적…….
승원은 자신이 다희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그는 다희를 믿을 수 없었다. 익숙함 속에서 편안함을 찾는 그의 연애 스타일에 다희가 아주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승원은 더 이상 그녀에게서 편안함도, 익숙함도 찾을 수 없었다.
‘다희와는 헤어져야겠지.’
회사에 벌써 소문이 쫙 퍼져버려 골치가 아프지만 젊은 미혼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졌다는데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승원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연달아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런데 반드시 있어야 할 이름이 없었다.
‘왜 연락이 없지?’
가끔 게임을 하느라 끼니를 잊을 때면 어김없이 야식을 들고 찾아왔던 오혜주.
깜빡하고 택시에 휴대폰을 놓고 내린 날이면 늘 자신보다 먼저 알고 휴대폰을 찾아다 주었던 오혜주.
주말 내내 퍼져 자느라 본의 아니게 잠수를 탔을 땐 휴대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했던 오혜주.
그런데 이번엔 네 연락이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혜주의 이름에 승원의 심장이 콱 조였다.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느끼는 불안감이 이럴까. 너울처럼 밀려든 상실감에 승원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자리는 그토록 새카맸다. 둥둥, 가슴을 울리는 불안감에 승원은 하릴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지잉, 지이잉.
한바탕 요란을 떨다 잠잠해진 휴대폰이 진동했다.
‘혜주인가?’
승원은 반색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액정에 뜬 이름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다희]
골치 아픈 현실로 맹렬하게 잡아끄는 이름이었다.
*
“입 벌려, 오혜주.”
혜주의 손을 끌어내린 주원이 진득이 시선을 마주했다.
“확인해보자며.”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입을 벌리면 곧장 숨결이 밀려들 것만 같은 거리, 딱 손가락 한 마디만큼을 남겨둔 공간에 존재하는 건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아…….”
혜주는 손목에 힘을 주어 주원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키스를 하자고 한 것도, 확인해보고 싶다고 한 것도 자신인데 정작 몰아치는 그를 보니 덜컥 겁부터 났다.
너무 겁대가리 없이 덤볐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노골적으로 번뜩이는 시선을 마주하니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의 입을 갖고 왜 이래라저래라해요…….”
“입 다물고 키스하는 방법은 모르겠는데.”
“…….”
“하자며, 네가.”
그의 시선은 마치 거미줄 같았다. 촘촘히 얽혀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한입에 꿀꺽 삼킬 기회를 노리는 듯했다.
“안 할 거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시선에 혜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위기에 취해 호기롭게 던진 것까진 좋았는데 뒷일을 계산하지 못한 건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봄바람처럼 살랑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면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혹은 불쾌함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간과한 건 주원이 생각한 키스가 봄바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태풍이고 격랑이었다. 거세게 몰아쳐 모든 걸 앗아가는 바람이었다.
“취ㅅ…… 할게요.”
혜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말해.”
“방금 한 말 취소한다고요!”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혜주가 꽥 소리를 쳤다. 주원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손목을 놓아주었다.
“눈 떠, 쫄보야.”
혜주는 손부채질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내가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고요. 누가 한강에서 입 벌리고 키스를 해요? 이런 데서는 ‘쪽’이 정석이라고요. 공연음란죄로 경찰에 잡혀갈 일 있어요?”
적반하장으로 골을 내는 그녀를 보며 주원이 픽 웃었다.
“그럼 뽀뽀라고 말하지 그랬어.”
“오빠도 그 정도 공중예절은 있는 줄 알았죠!”
“미안하네. 내가 유학파라.”
하아. 이쯤 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미국에서는 아무 데서나 막 물고 빨고 하나 보지? 누가 보면 아예 아메리칸인 줄 알겠어. 꼴랑 7년 살다 온 주제에!
“지금 나 놀리는 거죠?”
혜주가 주원을 째려보았다. 주원은 조금 전까지 야한 말을 내뱉던 사람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문득 깊은 깨달음이 온다. 내가 지금 강주원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구나, 하는.
“오빠, 처음부터 키스할 생각 없었죠?”
“어.”
“……진짜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쿨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는 씩씩대는 혜주를 놀리기까지 했다.
“네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꼬맹아. 발랑 까져 가지고.”
혜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요. 뭐가요.”
“난 사귀는 여자랑만 해.”
“와, 되게 비싸게 구시네. 원나잇도 하는 시대에 키스가 뭐 그리 대수라고!”
“나한텐 대수야. 한 번 하면 그렇게들 헤어나오지 못하더라.”
“…….”
“사귀지도 않는 여자가 들러붙으면 귀찮잖아.”
그의 넘치는 자신감에 혜주는 할 말을 잃었다.
“많이 해 보셨나 봐요?”
“퀀티티가 중요한 게 아니야. 퀄리티가 중요하지.”
그가 씩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귀엽다는 듯, 쓱쓱.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만질 때처럼 소중하게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됐어요. 오빠랑 말 안 할래요. 얘기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야.”
퀀티티와 퀄리티. 주어를 갖다 붙이면 몹시 야한 말이 될 것 같은 상상에 창피해진 혜주가 주원의 손을 뿌리쳤다.
주원은 혜주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할게.”
낮게 침잠한 목소리는 강물처럼 잔잔했다. 쉼 없이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꼭 강물 위에 드리운 달빛 같았다.
“네 인생에 아무나 갖다 붙이지 마.”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확신이 들었을 때, 그때 하자. 뭐든.”
뒤이어 들려온 말에 혜주는 깨달았다.
그가 옥상 위에서 다희와 나눈 대화를 들어버렸다는 걸.
“오빠…….”
그건 키스해 보자며 겁 없이 달려들었던 혜주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마음을 확인해보겠답시고 철없이 달려들던 그녀를 보고 주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희의 말에 솔깃해 어떻게든 마음을 붙여보려는 객기로 보였을까? 아니면 제 마음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애송이처럼 보였을까.
어떤 쪽이든 간에 ‘아무나 갖다 붙이지 말라는’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혜주는 몹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입장 바꿔서 자신이 그런 얘길 들었다면 이렇게 차분하게 대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 우습게 만들었다며 길길이 날뛰어도 모자랐겠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혜주는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변명해도 강주원을 ‘아무나’ 취급해버린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주원은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돌계단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가만히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퐁당!
주원이 던진 돌멩이 하나가 강물에 파문을 일으켰다.
일렁이는 강물 사이로 돌멩이가 쏘옥 사라진 순간, 주원의 입술이 열렸다.
“좋아해, 오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