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오혜주 너 좋아한다고 (31/121)


#31. 오혜주 너 좋아한다고
2022.09.15.



 


“……뭘요?”

혜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날씨 얘기하듯 덤덤한 그의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혜주를 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보통 이럴 땐 뭘요가 아니라 누구요, 라고 묻지 않나?”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릴 들은 것 같아서 그렇죠.”

“그래, 뭐. 강주원이 뭐가 모자라서 오혜주를 좋아해, 그런 생각이 들기야 하겠지.”

“저기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 건 맞는데.”

주원이 픽 웃으며 혜주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너 맞아.”

주원이 정수리에 손을 턱 얹은 채 시선을 맞췄다.


“오혜주 너 좋아한다고.”

쿵쾅쿵쾅 가슴이 뛰고 양 볼은 아까완 비할 데 없이 달아올랐다.

이런 고백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때 쪽지로, 대학교 땐 휴대폰 메시지로 받아본 적은 있지만 눈 앞에서, 말로 하는 고백이라니.


‘이런 기분이구나……고백을 받는다는 건.’

심어둔 줄도 몰랐던 씨앗이 가슴에서 움트는 기분.

내리쬐는 햇빛에 금세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어올라 온몸 가득 꽃향기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놀란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는 혜주를 향해 주원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마. 어떤 방식으로 확인하든 칼자루는 너한테 있다고.”

“아…….”

누군가에게 반하는 순간은 때론 색으로 각인되곤 한다. 꽃망울 터지는 핑크빛으로, 때론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지금 이 순간 혜주는 구름에 갇힌 기분이었다. 은빛 물고기처럼 사방에 내려앉은 빛으로 눈이 부셨다.

그 광휘의 한가운데 주원이 있었다. 그의 고백은 담담했지만 온 마음이 담겨 뜨거웠다. 내가 강주원에게 반한 걸까 헷갈리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처음으로 헷갈리지 않았다.

나는 강주원에게 반했다.

그것도 제대로.

늘 차갑다 느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 순간이 마법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대답해야 해요?”

“뭐라고 대답할 건데?”

“뻥 차버릴 건데요.”

혜주는 당장 yes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한 번 눌렀다. 돌다리도 세 번 두드리랬다고 이런 중차대한 일에 성급할 수는 없지.


“후회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마라.”

주원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풀어주지도 않았다.


“지금껏 차여본 적은 없지만, 날 차버린 여자를 다시 받아줄 만큼 너그러운 성격은 못 되거든.”

헉. 벌써 조급해지는 건 기분 탓인가.

혜주는 팍 쫄렸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다.


“후회 안 할 건데요?”

“백퍼 후회한다니까.”

“천퍼 안 한다니까요.”

“퍼센트란 말 자체가 백분율. 즉, 전체의 양에 대해 100분의 몇이 되는가를 나타내는 거라서 원래 천 퍼센트란 말은 이론적으로는…….”

“아, 됐어요, 됐어! 어휴, 정떨어져, 정말.”

팽팽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장난스러워졌다. 가만히 앉아 강물을 쳐다보는데도 뭔가 설레는 기분에 혜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까불지 말고.”

“아이참, 그거 하나 대답해주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튕겨요?”

“너부터 대답해. 나랑 사귈래?”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지금 건 대답으로 안 쳐.”

“그걸 왜 오빠 마음대로 정하는데요? 아까 분명 칼자루는 나한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너한테 있는 거 맞고, 네가 휘두른 것도 맞는데 방금 내가 피했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강물 위에 어우러졌다.

혜주는 부드럽게 휜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고백은 늘 무거운 것인 줄만 알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은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나 주원의 고백은 달랐다. 한없이 담백한 그의 고백은 자연스럽게 스미어 가슴을 움직였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지만 혜주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

승원이 다희를 만난 건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출근 전에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끊임없이 전화를 해대는 다희 때문에 억지로 끌려 나온 참이었다.

묵묵한 표정의 승원과 초조해 보이는 다희가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주말 내내 연락도 안 되구.”

다희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좀 쉬었어.”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은 다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승원은 짧게 대꾸했다.


“그랬구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필 사람이 거의 없는 커피숍이라 잔잔한 음악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북적북적한 곳으로 고를 것을.


“밥은 먹고 나온 거야?”

“아니…… 입맛이 없어서 안 먹었어.”

“그럴 거 같더라.”

다희는 이틀 새 부쩍 말라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는 그녀가 승원은 안타까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이런 이별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겠지.


“생각은 좀 정리해봤어?”

아마도 다희가 말하는 ‘정리’의 의미는 승원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승원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 정리했어.”

질끈 입술을 깨문 다희의 얼굴이 유난히 새하얬다. 잔뜩 위축된 어깨로 고개를 떨군 그녀를 보는데 승원은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차라리 친구로 지낸 시간이 없었다면 좀 괜찮았을까. 모진 말을 해야만 하는 승원은 다희와 함께한 그 모든 시간이 버거웠다.

제 마음도 모르고 덥석 그녀의 고백을 받아준 것이, 만남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이별조차 이렇게 일방적인 것이.

그의 모든 선택이 의도치 않게 다희를 할퀴어버린 것만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우선 미안하다. 금요일에 그렇게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 혼자서 많이 곤란했을 거 같아.”

“아냐, 내 잘못인데, 뭘…….”

다희는 시선을 떨군 채 끝말을 흐렸다.


“사실은 승원아. 그 사진 말이야.”

한참을 바닥만 보고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승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게 말하지 않아도 돼.”

“……고의든 실수든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니?”

“고의였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커피잔을 매만지는 다희의 손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이별에도 예의가 있다는 걸, 아무리 둔한 승원이라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복잡다단한 제 마음을 어디까지 보여줘야 그 예의란 것에 걸맞은지 알 수가 없었다.

주말 내내 제 뇌리를 휘저었던 이름 석 자를 여기서 털어놓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까맣게 숨기고 그저 묻어두어야 하나.

납득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다희에게 어디까지 내보이는 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답은 다희가 주었다.


“혜주 때문이니?”

다희가 두려운 눈동자로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승원은 깨달았다.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제 감정의 종착역을 어쩌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도 불안해했었다는 것을.

한심했다. 그리고 허탈했다.

틀린 길을 선택하고도 꼭 열 발자국은 걸어봐야 아는 제 고집이 이렇게나 뼈아프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제 어리석음 앞에서 승원은 한없이 무력했다.


“사귀는 내내 넌 혜주를 경계했었지. 혜주는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선을 그어도 계속 불안해했었어.”

“너와 혜주 사이를 의심한 건 정말 미안해. 너와 혜주 모두 노력했다는 거 알아. 나 때문에 그렇게 친하던 너희가 연락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소원해졌다는 거 아는데, 내가 너무 오버했어. 쓸데없는 걱정으로 오히려 널 실망하게 만든 것 같아서 나도 괴로웠어……”

“아니.”

이제야 승원은 제 감정을 마주 보았다.


“네가 옳았어, 다희야.”

움찔, 다희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친구 아니더라. 나랑 혜주.”

“!”

“적어도 내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다희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해?”

“응, 알아.”

“아니! 넌 몰라! 강승원 너 주말에 잠 거의 안 잤지?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서 뭔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일단 돌아가서 잠부터 좀 자고 다시 얘기하자. 응?”

“내 정신은 말짱해, 다희야.”

“제정신이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흥분하는 다희를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온전히 제정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선택이 옳다는 것을.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거. 넌 알고 있었지?”

“아니? 너도 모르는 네 마음을 왜 내가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 난 전혀 몰랐어. 네가 혜주를 마음에 둔 지 알았더라면 고백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랬겠지.”

……그랬어야지.

승원은 입술에 맴도는 말을 겨우 삼켰다.


“이제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당장 혜주한테 고백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다희가 추궁하듯 물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어.”

“지금 혜주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착각이면 어떡할 건데? 나랑 사귀었을 때 생각해봐. 너도 분명 날 좋아한다고 그랬었잖아. 그런데 아니었다며? 혜주를 좋아하는 건 확신할 수 있어?”

“지금 당장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야.”

“하, 어이가 없다. 결국은 혜주 때문에 나를 차는 건 팩트란 소리네. 너 이것도 바람이야. 알아?”

다희가 바짝 독기가 어린 눈으로 승원을 노려보았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서린 지독한 원망을 승원은 덤덤히 감내했다.


“미안해.”

몰라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해도 다희에게 상처를 준 사실이 없어지진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 더 이상 촉법이 될 수 없는 나이. 그러므로 책임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 살을 섞고 침대에서 뒹굴어야만 바람이니? 나랑 만나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담은 게 제일 큰 바람이야!”

“미안하다.”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봤어? 너랑 나랑 사귄다고 회사에 소문난 게 엊그제야! 그런데 주말 사이에 헤어졌다고 어떻게 얘기해? 내 체면 같은 건 아무 상관없다 이거야? 나 진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네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진 거라고 소문낼 거라고! 흐윽!”

다희가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트렸다.


 
승원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늦은 시각이라 다행히 카페 안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두 테이블 건너편에 한 여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것 외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승원이 다희를 달래기 시작했다.


“상관없지 않아.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상관없을 수 있겠어.”

“흐윽…… 흑…….”

“그러게 회사엔 알리지 말자고 그랬었잖아.”

“지금 바람피워놓고 내 탓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한참을 울던 다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퍽 처량했으나 까만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회사에선 계속 사귀는 걸로 해. 당분간이라도.”

다희의 입에서 새어 나온 의외의 말에 승원의 눈매가 굳었다.


“사귀지도 않는데 사귀는 척을 하자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뭐야?”

“나 이직할 거야.”

“뭐?”

“뭘 그렇게 놀라? 헤어진 마당에 계속 얼굴 보는 거 피차 불편하잖아.”

다희의 폭탄선언에 승원은 더욱 가슴이 무거워졌다.


“너 우리 회사 엄청 좋아했잖아. 출퇴근 시간 자유로운 것도, 사내 분위기도, 복지도 다 마음에 든다고 오래 다니고 싶다며. 나랑 헤어졌다고 굳이 회사까지 그만둘 이유가 있어?”

“너는 아무렇지 않은지 몰라도 난 안 그래. 회사에서 너 볼 때마다 화나고 서글프고 가슴 아플 거 같아.”

“다희야.”

“회사에 소문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쭉 사귀다가 나 이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진 걸로 하자. 그때까지만 부탁할게.”

다희가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가방을 메고 또각또각 커피숍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좇던 승원이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

그들이 카페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후우, 대박! 나 지금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은데?”

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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