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여자, 여우짓, 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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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여자, 여우짓, 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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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여자, 여우짓, 여지
2022.09.18.
승원과 다희가 커피숍에 들어오기 조금 전, 루비는 남자친구인 필립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기야, 뭐 마실래?”
후드를 뒤집어쓴 필립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난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산미 있는 거 말고 고소한 거 좋아하는 거 알지? 아, 차가운 걸로 부탁해.”
“샷 추가, 고소한 거, 아이스. 오케이.”
루비가 카드를 들고 자연스럽게 계산대로 향했다.
그녀가 필립의 요청대로 주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필립은 휴대폰 게임 삼매경이었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남친을 보며 루비가 핀잔했다.
“휴대폰 좀 그만 봐. 자기 오늘 내가 무슨 색 립스틱 발랐는지 알아?”
“갑자기 웬 립스틱?”
“만나서 내 얼굴 제대로 보기나 했냐고.”
루비의 투정에 필립은 그제야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이제 됐어?”
“우쭈쭈, 이렇게 얼굴 보고 얘기하니 얼마나 좋아.”
루비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필립의 볼을 주욱 당겼다.
갸름한 턱에 작은 얼굴, 속쌍커풀이 매력적인 필립은 올해 스물여섯인 루비보다 두 살 어린 연하남이었다. 대학교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정확히는 래퍼 지망생.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고는 있는데 최종 관문에서 번번이 낙방해 현재까지 경력은 백지 수준.
그러나 어딜 가나 눈에 확 띄는 아이돌 외모 탓에 데뷔를 하지 않았음에도 습관처럼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곤 했다.
“이번에 오디션 본 건 어떻게 됐어?”
“아, 몰라. 얘기도 꺼내지 마.”
“왜에.”
“최종까지 가서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막판에 물 먹었잖아. 나 밀어내고 합격한 애가 그 레이블 수장 조카라나 뭐라나. 아, 빽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필립의 푸념에 루비가 위로를 건넸다.
“랩 연습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될 거야.”
“그걸 위로라고 해? 누나가 이쪽 세계를 잘 몰라서 그래. 나 같이 돈 없고 빽 없는 애는 애초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그렇다고 TV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힙합은 원래 할렘에서 탄생한 거 아니야?”
“그것도 옛말이지. 눈에 확 띄려면 금목걸이도 하나 해줘야 하고 명품 모자도 하나 걸쳐줘야 한단 말이야.”
필립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서울만 오면 금세 데뷔할 줄 알았는데 매번 들려오는 건 오디션 낙방 소식뿐이었다.
“재능이 있으면 언젠가는 빛을 볼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힘내자, 응?”
“지금 나 돌려 까는 거야? 이번 오디션 안 된 것도 내 재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내 말은…….”
“아, 됐어. 누나랑은 무슨 말을 못 하겠다니까! 가끔 말하는 거 보면 우리 집 꼰대랑 완전 똑같은 거 알아?”
더는 얘기하기 싫다는 듯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스물 중반에 접어든 남친이지만 루비의 눈엔 아직도 필립이 어린 애처럼 사랑스러웠다. 팽 토라진 모습조차 귀여워서 루비는 애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필립 또 삐졌네. 이럴 땐 필살기가 있지.’
루비는 가방을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화 풀어, 자기야. 내가 용돈 줄게.”
“됐어. 남자가 모양 빠지게 무슨 용돈을 받아? 매번 자기한테 밥 얻어먹는 것도 미안한데 용돈까지 받으면 내가 뭐가 돼.”
“데뷔해서 돈 많이 벌면 호강시켜 준다며. 어차피 갚을 건데 부담은 왜 가져?”
“아이, 됐다니까…….”
루비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필립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필립은 내내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 돈을 받았다. 그러곤 미안한 듯 시선을 누그러뜨렸다.
“이거 내가 이자 쳐서 꼭 갚을 거야. 그러니까 나 성공할 때까지 꼭 기다려야 해.”
“그럼, 그럼.”
루비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인 필립의 주머니 사정은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간간이 공연을 뛰며 용돈 벌이를 하긴 하는데, 자취방 월세며 학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데이트 비용은 거의 루비가 부담하는 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처럼 간혹 용돈도 쥐여주곤 했다.
부잣집 막내딸로 자란 루비는 돈에 전전긍긍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필립의 궁핍한 처지가 늘 안쓰러웠다.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필립에게 용돈을 쥐여주면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이번엔 진짜 더 열심히 할 거야. 자기 덕에 힘내서 오디션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 나 믿지?”
“당연하지.”
“손.”
루비가 손을 내밀자 필립이 부드럽게 감쌌다.
“고마워, 자기야.”
강아지처럼 얼굴에 손을 비비는 그의 모습에 루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필립이 이렇게 애정 표현을 해줄 때면 루비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이 부풀어 오르곤 했다.
“나 담배 좀.”
“지금?”
“응. 아까부터 참았더니 너무 땡겨. 같이 갈래?”
필립이 애교를 피우며 말했다. 좋은 분위기에 갑자기 나간다니 서운했지만 루비는 내색하지 않았다.
“노트북 있어서 둘 다 나가긴 그래. 빨리 들어와.”
“당연하지.”
루비는 라이터를 꺼내며 카페를 나서는 필립의 뒷모습을 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강아지들이 나오는 너튜브를 틀어놓고 흐뭇해하던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혜주 때문이니?”
낯익은 이름에 루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헉, 대박.”
승원과 다희였다.
금요일 오전에 사무실에 파란을 일으켰던 주인공들의 만남에 루비는 거북이처럼 목을 쑥 웅크렸다. 둘의 표정이 하도 심각해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고.
본의 아니게 염탐을 하게 된 상황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떤 사정인지 들어나 볼까?’
쫑긋 세운 루비의 귀에 승원과 다희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중간 혜주의 이름이 나왔고 종국엔 다희가 울음을 터트렸다. 카페가 조용한 데다 자리도 멀지 않아 루비는 두 사람의 대화 대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전말은 놀라웠다.
‘정리하자면, 강승원이랑 천다희랑 사귀었는데 사실 강승원이 좋아하던 건 오혜주다. 뒤늦게 그걸 깨달은 강승원이 이별을 고했는데 천다희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계속 사귀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 그 말씀?’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젊은 남녀가 사귀고 헤어지는 문제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중간에 혜주가 끼어 있다? 게다가 셋이 절친이기까지 하고?
회사에 소문이라도 퍼지게 되면 누구 하나 매장되는 건 일도 아닐 듯싶었다.
“회사에 소문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쭉 사귀다가 나 이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진 걸로 하자. 그때까지만 부탁할게.”
잠시 후 다희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승원이 그녀를 따라 나간 후에야 루비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 대박! 나 지금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은데?”
바로 그 타이밍에 필립이 자리로 돌아왔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필립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다. 루비는 그의 정수리를 꾹 누르며 소곤거렸다.
“쳐다보지 마. 우리 회사 사람들이야.”
“회사 사람인데 왜 숨어?”
“인사할 타이밍이 아니니까 그렇지! 사실 이번 금요일에 말이야…….”
루비는 금요일에 있었던 일은 필립에게 털어놓았다.
“알기 쉽게 A랑 B라고 할게. 우리 회사에서 A랑 B가 비밀연애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금요일에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사무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비밀연애를 들키자마자 A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둘이 다툰 거 아니냐, 별별 소리가 나돌았지.”
“그런데?”
“방금, A랑 B가 여기에 왔었다고! 그런데 대박인 게 뭔 줄 알아? 두 사람이 헤어진 게 C 때문이래? A랑 B랑 C랑 회사에서 소문난 절친이라고! 와, 이거 어떡하지? 사내 로맨스가 갑자기 치정극이 된 느낌이네.”
잔뜩 흥분한 루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셋이 삼각관계인 거면 어떡하지? 난 누구 편을 들어야 해?”
“편을 왜 들어. 남의 연애사에 끼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건 남의 연애사라고 하기엔 좀 그래. 나 C랑 친하단 말이야. 절대 그럴 사람 아니라니까?”
필립은 콧방귀를 뀌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자긴 그런 여자랑 친하게 지내지 마.”
“한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인데 왜 꼭 바람녀라고 단정 지어?”
“대충 얘기 들어보니 각 나오는구만. 그 여자가 여우짓 한 거라고. 여자가 여지를 주지 않으면 남자는 움직이지 않아. 오, 말하다 보니 라임 죽인다.”
여자, 여우짓, 여지 세 글자를 던져놓고 필립은 스스로 뿌듯해했다. 이걸로 랩 메이킹을 하면 장난 아니겠는데?
“그런가?”
루비는 머리를 긁적였다.
속으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귀로 들은 게 있으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필립이 저렇게 확신하니 더더욱 귀가 팔랑거렸다.
“진짜 그럴 사람 아닌데…… 별일이네.”
루비는 혜주를 아주 좋아했다. 입사 초기에 버디 프로그램의 사수와 부사수로 만나 친해진 이후 쭉 가깝게 지냈다. 장염으로 급히 병가를 냈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한 것도 혜주였다.
그런 혜주가 바람녀라니! 루비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홀로 심각해진 루비를 보며 필립이 건성으로 조언했다.
“정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확인을 해봐. 대충 분위기 보면 각 나오잖아.”
“정말 바람녀라면?”
“그런 나쁜 X은 상대도 하면 안 되지. 자기한테 더러운 물 들면 안 되잖아.”
루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립은 메모장에 방금 떠오른 가사를 적느라 바빴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조언이 어떤 파란을 일으킬 지도 모르고.
*
월요일 아침.
주원은 승원을 대표실로 불렀다.
“나 외부 미팅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급한 일이야?”
슈트 차림으로 들어온 승원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지난 금요일에 사적인 일로 회사를 박차고 나간 것이 마음 쓰이는 모양이었다.
“멘탈 돌아왔냐?”
“절반 정도는.”
“일할 정신은 있나 보네. 그럼 됐어.”
사실 주원은 물어볼 말이 많았다. 주말 내내 어디에 있었는지, 다희와는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뭘 해주면 좋을지.
그러나 일곱 살짜리 코찔찔이라면 모르되 다 큰 동생 놈 연애사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묻기는 좀 그랬다. 초췌한 승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 주원이 무뚝뚝한 손길로 어깨를 두드렸다.
“안색 별로 안 좋네. 미팅 길어지면 거기서 바로 퇴근해.”
회사로 돌아오기 껄끄러우면 바로 퇴근하라는 그의 배려를 승원은 곧잘 알아들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돌아서며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형.”
우려했던 것과 달리 사내 분위기는 평온했다.
승원이 외부 미팅을 핑계로 밖으로 나간 데다 다희 또한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니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물론 뒤에서 쑥덕대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각자 업무가 바쁘다 보니 떠들 시간도 없었다.
승원이 무사히 복귀한 걸 확인한 주원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 곧장 업무에 집중한 그는 무서운 속도로 쌓일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데이터스 코리아는 전직원이 백 명 정도인 작은 회사라 대표가 맡는 실질적 업무가 많았다. 대기업의 경우 여러 단계의 보고 라인을 거치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결재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데이터스 코리아는 각 부서에서 다이렉트로 올라오는 보고가 많아 주원이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주원은 각 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빠른 속도로 훑었다.
그중에는 혜주가 상신한 것도 있었다.
[오혜주]
발신인에 적힌 이름 세 글자에 가슴이 말랑말랑해진다. 굳어 있던 미간이 부드럽게 풀리고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따사로운 햇볕에 기지개를 켜는 풀잎 같았다.
“반갑네, 오혜주.”
주원은 턱을 괸 채 혜주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