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필립 (33/121)


#33. 필립
2022.09.22.



 
[(주)태양식품 서베이 초안 공유드립니다.]

라는 제목의 문서는 사업팀과 마케팅팀이 밤낮으로 미팅을 거듭해 탄생한 결과물을 담고 있었다.

문항의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설문대상자 타겟팅부터 설문을 푸쉬할 타이밍, 심지어 대상자에 따른 문항의 개수까지 아주 섬세하게 고안된 문서였다. 두 팀이 고혈을 짜낸 흔적이 역력했다.

주원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혜주의 보고서를 거듭 읽었다. 마지막 줄에 ‘회신’ 부탁드린다고 또박또박 쓰인 글자를 보곤 그가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오타도 없네. 서운하게.”

오타 핑계로 혜주를 대표실로 불러들일 궁리를 하고 있던 주원은 아쉬울 뿐이었다.

혜주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정작 주원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혜주에게 고백을 툭 던져놓은 상황이라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인데 막상 손 놓고 기다리자니 몹시 신경이 쓰였다.


‘오혜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설마 나 진짜 까이는 건 아니겠지?’

고백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이 지경이면 앞으로 어쩌나. 진짜 차이면 얼굴을 어떻게 보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제만 해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메시지를 보낼까 전화를 할까 수십 번은 망설였었다. 오늘 아침엔 또 어떻고. 우연히 마주친 척하려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몇 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오가는 직원들 눈치가 보여 못 이긴 척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혜주를 보고 어찌나 아쉽던지.


‘세상 쿨한 척 여유를 떨어놓고 대답을 재촉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주원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혜주의 마음은 반반인 것 같았다. 저한테 호감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승원을 넘어서는 정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괜히 오혜주 기분 안 좋을 때 맞닥뜨렸다가 대뜸 거절이라도 당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제아무리 하늘을 찌르는 자존감으로 무장한 강주원이라고 해도 고백을 까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접근해야 혜주에게서 OK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내겐 너무 어려운 오혜주.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 회의 핑계로 불러낼까, 옥상에 죽치고 앉아 있어 볼까 별생각을 다 하던 주원은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저녁이 되었다. 식사도 거른 채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던 주원은 출결 시스템에 혜주가 로그아웃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강주원 진짜 오래 참았다.”

혜주에 대한 그의 인내심은 참으로 얄팍했다. 언제쯤 물어봐야 재촉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나. 수도 없이 자문하던 그가 답을 내렸다.


“고백한 지 24시간 지났으니 이제 물어봐도 되겠지?”

그가 서둘러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혜주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올랐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원은 전광판의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계단실 문을 열고 뛰기 시작했다.

19층, 18층, 17층…… 층마다 표시된 숫자가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허벅지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숨이 차올랐다.

마침내 1층에 다다랐을 때 주원은 벌컥 문을 열고 나와 혜주의 모습을 찾았다.


“어디 간 거야?”

그새 혜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주원의 눈에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혜주의 모습이 비친 건 그때였다.


‘누구지?’

주원은 곧장 로비를 가로질렀다.


“대표님, 이제 퇴근하세요?”

퇴근하던 직원 몇 명이 인사를 건넸다.


“네.”

주원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으로 혜주의 뒤를 좇았으나 건물을 나섰을 때 이미 혜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원은 허무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거리에 못 박혔다. 이렇게 놓칠 줄 알았으면 재킷 따위 챙기느라 밍기적거리지 않았을 텐데.

혼자 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전화라도 할 텐데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본 후라 선뜻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누구였을까.’

주원은 유리문 밖으로 언뜻 보았던 남자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키는 175센티미터 전후쯤? 헐렁한 티셔츠에 주머니가 많은 카고바지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본 데다 옆모습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체형이나 분위기에서 힙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오혜주, 남자가 대체 몇 명이야?”

주원은 구시렁대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눈앞에서 혜주를 강탈해간,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질투가 났다.

그것도 맹렬히.

*



“Yo, 시스터! 아, 뭐야! 손 좀 놓지?”

빌딩 뒤 어둑한 공터.

낯선 남자가 혜주의 손을 뿌리쳤다.

회사 앞에서 마주치자마자 혜주에게 질질 끌려온 남자의 이름은 춘택.

혜주보다 세 살 어린 미옥의 아들이었다.


“오춘택,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미옥 아주머니가 알려줬어?”

춘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개소리야. 나야말로 깜놀했다고! 누나가 왜 여기에 있어?”

“내 회사니까 여기 있지! 정말 나 보러 온 거 아니야?”

“아, 누나 여기 다녀? 난 또 뭐라고.”

“진짜 몰랐어? 그럼 여기 왜 왔는데?”

춘택이 귀를 후빈 후 손가락을 후 불었다.


“누나 서울에서 직장 다닌다는 것만 들었지, 어디서 일하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여친 만나러 온 사람을 왜 질질 끌고 오고 난리야?”

“여친?”

“그래, 여친!”

저런 날건달 백수랑 사귀어주는 여자가 있다니.

혜주는 속으로 그녀를 애도했다.


“너 지난번에 사고 친 이후로 천안에 붙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너 서울 온 거 미옥 아주머니가 아셔?”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일일이 보고하고 다닐 짬밥이야?”

“뭐?”

“아, 그 촌구석에서 뭐 하냐고! 아무튼 엄마한테 말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춘택이 으름장을 놓았다.

볼 때마다 색색깔로 바뀌던 머리가 웬일로 얌전해졌기에 조금 달라졌나 했더니,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혜주는 스물이 훌쩍 넘어서도 철이 들지 않는 춘택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여친 만나러 온 거지? 나한테 볼일 없는 거 확실한 거면 이만 찢어지자.”

“잠깐만, 누나.”

혜주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왜, 뭐.”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나 용돈 좀 주라.”

“인연 같은 소리 하네. 난 너랑 그런 고귀한 단어로 엮이고 싶지 않거든?”

“에이, 왜 그래. 우리 엄마랑 누나네 아빠 곧 결혼할 모양이더라. 법적으로 부부는 아니지만 곧 살림도 합칠 텐데 부부가 아니라고 하면 섭하지? 게다가 우리 둘 다 오씨잖아. 얘기 안 하면 남들도 다 친남매인 줄 안다고.”

“너 해주 오씨잖아. 난 함양 오씨거든?”

“누가 자기소개할 때 ‘안녕하세요, 저는 함양 오씨 춘택입니다’ 그래? 오씨면 다 같은 오씨지.”

혜주는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어 돌아섰다.


“‘예비’ 남매간에 회포 풀러 온 거면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 그럼 안녕.”

물론 춘택은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었다.

터억.

춘택이 벽에 손을 짚어 혜주의 앞을 막았다.


“그럼 나 이십만 원만 빌려줘.”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질 않네. 이 징글징글한 놈.


“빌려달라는 말이 참 같잖네. 지금껏 한 번도 갚은 적 없잖아.”

“이번엔 꼭 갚는다니까 그러네.”

“싫어.”

“돈 빌려 달라는데 좋아할 사람 없는 거 누가 몰라? 싫은 거 알겠으니까 좀 해달라고.”

사람이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혜주는 어이가 없어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춘택의 어머니, 그러니까 미옥과 수철이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 게 7년이 넘었다. 혼인신고만 안 했다 뿐이지 사실혼 관계나 다름없다는 건 혜주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부산물처럼 딸려온 춘택의 존재만큼은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춘택은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시절부터 경찰서를 들락거린 양아치였다. 중학교 때는 동급생을 삥 뜯고, 고등학교 때는 여자를 등쳐 먹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오토바이를 몰다 사고를 내지 않나, 군대를 빼보겠다며 단식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가질 않나, 하여간 골치 아픈 녀석이었다.

그 뒤치다꺼리를 한 게 바로 미옥이었다.

갓 스물이 넘은 나이에 춘택을 낳고 미혼모로 살아온 미옥은 바보처럼 착한 여자였다. 수철의 가게에서 일할 때 자신의 형편도 녹록지 않음에도 부랑자나 폐지 줍는 노인을 외면하지 못했다. 한없이 곱고 여린 그녀의 심성에 반한 수철이 먼저 마음을 터놓았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미옥은 혜주에게도 참 상냥한 사람이었다. 엄마라고 부르진 못했지만 학창시절에 그녀를 의지하며 버티던 순간들이 있었다. 혜주가 춘택을 외면하지 못하고 몇 번 돈을 빌려준 것도 미옥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약점은 따로 있었다.


“아아, 알았어. 그렇게 빌려주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아버지 지금 천안에 계시지? 천안 가는 기차표가 몇 시에 있더라.”

끝내 수철을 들먹이는 춘택의 말에 혜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망할 놈. 잇속으로 욕지기가 나왔다.

혜주가 중학생이던 무렵 수철이 큰 병을 앓은 적이 있었다. 위암 3기였다. 고된 항암치료를 받는 내내 수철의 병 수발을 든 사람이 바로 미옥이었다. 그때부터 미옥은 두 부녀의 은인이었다.

수철이 춘택에게 절대적으로 약하다는 걸 아는 혜주는 되도록 두 사람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부모 등쳐 먹고 사는 것도 정도껏이지. 네가 싸놓은 똥 치우느라 미옥 아주머니 늙은 거 안 보이니?”

“아, 나도 생각이란 게 있는 놈이야. 누군 부모한테 폐 끼치는 자식 되고 싶어서 이래? 지금껏 빚진 것들 갚아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거든?”

혜주는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지갑에서 오만 원 권 두 장을 꺼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왜 두 장이야? 더 없어?”

“이게 확 그냥.”

혜주가 눈을 부라리자 춘택이 냉큼 주머니에 돈을 넣으며 물러섰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 정도면 미옥 아주머니가 우리 아빠한테 베풀어준 은혜는 거의 갚은 것 같네. 행여나 아빠한테 찾아갈 생각은 하지 마. 그랬다간 너 진짜 어디 한군데 부러진다.”

“그럼! 누나 말은 무조건 듣지. 나 정말 열심히 살 거라니까.”

춘택이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자식이 개과천선하는 것보다 개가 똥을 끊는 게 빠르겠다.’

혜주는 한숨을 내쉬며 춘택의 뒤통수에 주먹 감자를 날렸다.


“아, 그리고 누나.”

건들건들 걸음을 옮기던 춘택이 문득 돌아섰다.


“왜! 또 뭐!”

“나 개명했어.”

혜주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뭐? 개명?”

“연예인 돼도 오춘택으로 살 수는 없잖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

“필립.”

춘택, 아니 필립이 두 손가락을 눈썹 끝에 대었다 떼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내 이름 필립이야. 앞으론 그렇게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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