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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런 걸 원했어? (34/121)


#34. 그런 걸 원했어?
2022.09.25.



 
주원은 침대에 벌렁 누운 채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오혜주, 집에 들어가긴 한 건가? 왜 연락이 없어?”

아까 낯선 남자와 사라지는 혜주를 보고 난 후 계속 이 상태다. 집에 오는 내내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평소의 주원이라면 그깟 전화 한 통에 이리 전전긍긍할 일이 없을 거다. 그러나 고백 후 대답을 기다리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 되고 보니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 연락하지?”

주원은 미동도 없는 휴대폰을 째려보다가 몸을 휙 뒤집었다. 그러곤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뭐해?]
 


“음, 이건 좀 없어 보이는데.”

딕딕딕. 삭제.

[지금 집이야?]
 


“이건 너무 맥락이 없잖아.”

딕딕 딕딕딕딕. 삭제.

빈 화면에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그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우아하고 고상하면서 시크해 보일까 궁리하다 보니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퇴근하고 바로 들어갔어?]
 


“아냐, 이건 꼭 취조하는 것 같아.”

딕딕딕딕 딕딕 딕딕딕딕딕. 삭제.

주원은 보내지 못할 메시지를 썼다 지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도 안 드는 그깟 메시지 하나 보내는 일이 뭐 이렇게 어려운지, 차라리 마치지 못한 일거리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 핑계로 자연스럽게 연락할 수 있을 텐데.

[아까 그 자식 누구야?]

진짜 궁금한 건 이거 하난데 막상 적어놓고 보니 끔찍할 만큼 찌질하다. 주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벌렁 돌아누웠다.


“방금 건 진짜 미저리 같았어.”

그냥 보내지 말아야겠다. 내일 회사에 가서 대충 분위기 보면 알겠지.

딕.

주원은 글자를 지우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대 자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어깨로 문득 오한이 들었다.


‘딕?’

제대로 지웠다면 딕딕 딕딕딕 딕딕딕딕 정도는 들렸어야 한다. 그런데 왜…… 왜 딕으로 끝났지?


“설마.”

주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긴장한 그의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메시지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송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젠장.”

나지막한 신음이 흘렀다. 전송된 메시지를 보니 발가락이 달달 떨렸다.


“미쳤다, 강주원. 아악!”

주원은 머리를 감싼 채 이불 킥을 했다.

내가, 천하의 강주원이 이렇게 찌질한 놈이었다니! 이 와중에 채팅창에 1 사라진 거 실화냐…….

우주의 먼지 한 톨이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처음 것을 보낼걸. 집착이 가득 묻어나는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메시지를 본 혜주의 반응을 상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지이잉!

손발이 오그라드는 자괴감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오혜주 이름 석 자를 본 순간 주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분명 비웃으려고 전화한 거다.

확신이 서자 난생처음으로 혜주의 전화를 거절하고 싶어졌다. 주원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조금 전의 집착 가득한 메시지는 다른 세상 일이라는 듯, 아주 시크하고 도도한 목소리였다.

좋았어, 강주원. 자연스러웠어.


-아까 나 봤어요?

수화기 너머 혜주의 목소리는 조금 울적했다.

대뜸 받자마자 깔깔 비웃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분위기에 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봤으면 말을 걸지. 그랬으면 삥 안 뜯겼을 거 아니에요.

“삥?”

주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너 어디야.”

-왜요. 어딘지 알면 뭐, 달려오기라도 하게?

디리릭!

대답은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대신했다. 겉옷도 입지 못하고 집을 나선 주원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말했다.


“어. 그러려고.”

놀란 혜주가 그럴 거 없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이미 주원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기는 공동을 울리는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방금 전 퇴근한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가는데 피곤하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고?”

주원은 보자마자 혜주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어디 멍든 데가 있는지, 부어오른 곳이 없는지 샅샅이 살펴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다친 데 없다니까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삥 뜯겼다며. 오혜주 성격에 호락호락 돈을 내어주진 않았을 거 아니야. 어디 얻어터진 데 없어?”

“진짜 괜찮아요. 돈만 뜯겼어요. 십만 원.”

“십만 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였는지 주원의 동공이 진동했다.

용돈 떨어진 동네 양아치가 혜주를 뒷골목으로 끌고 가 돈을 요구하는 상상. 지갑에 있는 돈을 싹싹 털어가는 걸로 부족해 카드 비밀번호를 부르라며 눈을 부라리는 상상. 도망치려는 혜주와 실랑이를 벌이다 혜주가 다치는 상상.

온갖 무서운 상상으로 가득했던 뇌리가 순간적으로 텅 비었다.


“누구였는데.”

“그냥 좀…… 아는 동생이요.”

“아는 동생이 삥을 뜯어?”

“아, 정확하게는 용돈을 강탈당한 거죠.”

“하…….”

맥이 빠진 주원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꽉 깨문 그를 보며 혜주가 목을 움츠렸다.


“오빠 많이 놀랐어요? 어휴, 내가 말을 괜히 그렇게 했나 보다. 주기 싫은 돈을 준 건 맞는데 위험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야, 너 내가 얼마나……!”

주원이 격앙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혜주는 뜨끔하여 주원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가 제대로 보인다. 삥 뜯겼다고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오빠…….”

혜주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주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가슴이 울렁였다. 누가 이런 눈으로 나를 봐준 게 언제였더라. 오롯이 나를 향해 있는 조건 없는 관심과 애정은 아빠 말곤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안 다쳤으면 됐어.”

주원이 휙 돌아섰다.

오혜주 한마디에 정신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게 한심하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것에 홀로 예민하게 군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다. 정작 당사자는 저토록 태연한데 난 왜 개복치처럼 굴어버린 것인가.


“가려고요?”

당황한 혜주가 덥석 주원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요. 오빠 주려고 쭈쭈바도 사놨어요.”

“…….”

“오빠가 안 먹으면 나 혼자 두 개 해치워야 하잖아요. 아이스크림 녹으면 먹지도 못하는데.”

“무슨 맛인데.”

“하나는 딸기, 하나는 민트맛이요.”

“그럼 난 민트.”

주원은 못 이긴 척 그네에 앉았다.

혜주가 건넨 쭈쭈바는 산 지 얼마 안 됐는지 아직 단단했다. 주원은 혜주의 쭈쭈바를 손으로 주물러 건네주곤 자신의 것도 입에 물었다.


“맛있네.”

“그쵸? 오빠는 왠지 민트맛 좋아할 것 같았어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던 혜주는 그가 가버리지 않고 곁에 남아준 게 고마웠다.

흔들흔들.

두 사람의 발이 나란히 허공에 흔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꼈던 혜주의 마음이 어느덧 환하게 갰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위로가 되어버린 그다.


“아는 망나니가 하나 있어요.”

혜주가 가볍게 발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자식?”

“네. 동생이라 하기엔 뭐하고 모르는 사이라고 하기에도 뭐한데. 아빠랑 재혼할 아줌마 아들이니 예의상 동생이라 해야겠죠.”

그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털어놓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한 제 아픔에 대해서.


“어릴 때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가 고생 많으셨죠. 국밥 팔랴 딸 돌보랴 하루에 서너 시간도 못 주무신 거 같아요. 나 스무 살 됐을 때 아빠가 미옥 아주머니를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한테 고마운 사람이라고.”

“싫었을 수도 있겠네.”

“처음엔 그랬죠. 경계도 하고 반항도 좀 하고요.”

주원은 담담히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미옥 아주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또 나는 아빠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고요. 두 분이 재혼하신다면 반대할 생각 없었어요.”

“묘하게 과거형이네. 왜, 지금은 반대하고 싶어?”

“아까 그 망나니 때문에.”

혜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혜주는 춘택이 초등학교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얘기해주었다. 자잘하게는 동네 친구들 주머니를 터는 일부터, 못된 아이들과 어울리며 패싸움을 하던 일까지. 커가면서 사고의 스케일은 더 커져서 고등학생 때는 중고거래 사기다 뭐다 경찰서에 들락거린 적도 많았다.

래퍼가 되겠다며 상경한 후로는 좀 뜸하기는 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나타나 미옥 아주머니의 돈을 뜯어 가는 건 여전했다.

혜주가 속상한 건, 미옥이 쥐여준 그 돈이 결국은 수철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국밥 한 그릇 팔아 겨우 천 원 남는 세상에 다 큰 아들 똥 닦아주느라 폭삭 늙어버린 두 분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가끔 무서워져요. 걔 뒤치다꺼리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혜주가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오빠한테 왜 이런 얘길 미주알고주알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나 봐요.”

주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라서’ 털어놓고 싶었다는 얘길 듣고 싶었다. 그러나 욕심부리지 않았다.

네 시름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면 됐지.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내가 좀 도와줘?”

“오빠가 어떻게 도와줘요. 가서 꿀밤이라도 때려주게요?”

“꿀밤 정도로 정신 차릴 놈이면 그렇게 하고.”

“그럴 애였음 벌써 내가 벌써 놨지. 나 은근 왕주먹인데.”

혜주가 꽉 쥔 주먹을 내보였다.


“오빠는 신경 쓰지 마요. 도움받는 거 습관 되면 자꾸 기대고 싶어지거든요.”

“괜찮아. 손 많이 가는 여자가 이상형이라.”

태연히 대꾸하는 주원의 말에 혜주의 뺨이 붉어졌다.

그가 이렇게 툭툭 말을 던질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혈류가 빨라졌다.

뭐라 해야 할지를 몰라 하늘을 올려다보던 혜주의 잇새로 불현듯 한마디가 흘렀다.


“엄마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에 코끝이 찡해졌다. 혜주는 울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누가 그랬다. 눈물을 참으려면 누가 앞에서 로봇 춤을 추는 상상을 하면 된다고.

혜주는 급한 대로 옆에 있는 주원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런웨이에서나 볼법한 훌륭한 기럭지가 펄럭펄럭 움직이는 상상을 하니 겨우 눈물이 참아졌다.


“넌 왜 이럴 때 울지도 않냐. 눈물도 못 닦아주게.”

속도 모르고 주원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혜주는 겨우 방어한 눈물샘을 꾹꾹 닫으며 일부러 밝게 말했다.


“하긴, 지금 딱 울 타이밍이긴 했네요. 왜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복잡한 가정사 얘기하면서 여주가 예쁘게 눈물 한 방울 똑 흘리잖아요. 그럼 남주가 눈물 닦아주면서 막 키스하고…….”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런 걸 원했어?”

터억.

커다란 손이 혜주의 그네 줄을 잡았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타는 듯한 주원의 시선은 혜주의 모든 걸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혜주의 그네가 딸려가듯 주원에게 이끌렸다. 주원은 한 손으로 그네의 줄을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 혜주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초옥.


“!”

흔들리던 그네가 그대로 멈추었다.

혜주의 숨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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