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싫었어? (35/121)


#35. 싫었어?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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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솜사탕이 폭 덮쳐 온 듯 달콤한 감촉이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은 입술은 놀랍도록 말캉했고 살짝 차가운 입술에선 민트 향이 났다. 이 달콤함이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그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첫키스도 아닌데, 심지어 키스라고 하기엔 너무도 가벼운데 순간적으로 온몸 구석구석 그가 침범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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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처 감지 못한 눈 틈으로 그의 콧날이 보였다. 보기엔 종이도 베어버릴 듯 날카로운데 가볍게 뺨을 누른 코끝은 왜 이렇게 보드라운지.

짙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기다란 눈매가 살 떨리게 매혹적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것처럼 낯선 기분. 눈 앞에 펼쳐진 그 세계가 너무나 아름다워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기분.

이런 생경한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슴이 둥둥 진동했다.

꽈악. 혜주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마음에 걸어 닫은 빗장이 우르르 뽑혀 나가며 스르륵 눈이 감겼다.

바로 그때,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에서 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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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은 집 나간 정신을 단박에 돌아오게 할 만큼 날카로웠다. 혜주가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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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덮친다면서요! 이 거짓말쟁이!”

퍼뜩 정신을 차린 혜주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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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분명 그러지 않았어요? 사귀는 여자 아니면 키스 안 한다면서요!”

아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저 구미호 같은 남자한테 홀려도 단단히 홀려서 회까닥 넘어갈 뻔했지 뭐야.

혜주는 역시 믿을 놈 하나 없다고 구시렁대며 주원을 노려보았다. 주원은 손등으로 입술을 한 번 쓱 닦고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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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방금 건 실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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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미안한 표정 아니잖아요! 이런 변태, 사기꾼! 절대 먼저 안 덮친다더니…… 아주 높은 확률로 안전할 거라더니!”

혜주는 민트 향이 선연한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주원은 홍당무처럼 붉어진 혜주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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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일어서 있던 혜주는 그의 걸음에 밀려 도로 그네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원은 두 손으로 그네의 줄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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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었어?”

꼼짝없이 그의 두 팔 안에 갇힌 혜주의 귓가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렀다. 살짝 허리를 숙인 채 눈을 맞춰오는 그를 혜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졌음에도 하얗게 빛나는 얼굴 위로 미소가 덧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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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었으면 무릎 꿇고.”

강주원이 가끔 사람을 환장하게 할 때가 있다.

허공에서 부딪힌 가느다란 눈매가 예쁘게 휘어질 때. 짙은 장난기가 어린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릴 때.

분명 욕을 해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혜주는 동그란 눈으로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시선에 오롯이 그의 얼굴이 담겼다.

남자답게 짙은 이목구비를 따라 조금씩 내려오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머물렀다. 붉고 단정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 입술이 내려앉으면 얼마나 부드러운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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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을까?”

확인 사살을 하듯, 주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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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는 이번에도 지고 말았다는 걸 알았다.

싫지 않았으므로.

그와의 입맞춤이, 조금도 싫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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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요!”

혜주는 그를 밀치며 그네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녀의 귓불이 어둠 속에서도 붉었다.

*

주원의 본가는 삼성동에 위치한 고급 주택이었다.

호화 주택이 밀집한 주택가는 퇴근 시간인데도 한산했다. 주원은 차고에 주차를 한 뒤 문을 닫고 내렸다.

삐빅.

여러 대의 고급 세단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은 가운데 그가 내린 차의 라이트가 번쩍였다. 차 문이 완전히 잠긴 걸 확인한 주원이 탁탁, 슈트를 가볍게 털며 안채로 연결된 계단으로 향했다.

차고에서 안채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돌계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원은 급한 일이 아니면 늘 계단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정원을 빙 두른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다 보면 선우연 여사가 애정으로 가꾼 꽃과 나무가 지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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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왔습니다, 어머니.”

주원이 들어서자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선우연 여사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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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원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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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곧 퇴근하지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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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데 앉아서 좀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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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우연 여사는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반가운 내색도 없이 곧장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원은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았다.

거실에는 삼십 년 전 주원이 태어났을 때 선우연 여사가 직접 구매했다는 유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거친 터치로 표현한 붉고 커다란 꽃이 새하얀 캔버스 위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프랑스의 한 젊은 화가가 이 작품을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이 작품은 유작으로 남았고, 덕분에 현재 이 작품의 가치는 수십억 원에 이른다고 했다.

달랑 삼천만 원에 산 작품이 이토록 유명해진 걸 보면 과연 선우연 여사의 눈썰미와 안목이 대단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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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은 할만하니?”

선우연 여사가 차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그녀가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건 드문 일이라 주원은 성의껏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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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재밌습니다. 직원들 자질도 훌륭하고 시스템도 잘 잡혀 있는 편입니다. 앞으로 기대해봐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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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되기 전에 주식 좀 사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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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 그렇게 많은데 더 불리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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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누가 재산 불리려고 주식을 사니? 재미로 하는 거지.”

선우연 여사가 픽 웃었다. 살짝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선우연 여사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매사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원리원칙이 분명해 물건 하나를 두더라도 늘 있던 자리를 고집하는 편이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놀랍도록 아름다웠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 적 없는 사람처럼 태가 꼿꼿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함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인지 안다. 지금껏 알랑방귀 뀔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와서 누구 비위 맞추는 일은 죽어도 못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우연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 팔 벌려 안아주는 것만이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선우연 여사는 두 아들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가르쳐주었고, 힘든 사람에게 베푸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주위의 시샘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선우연 여사는 두 아들을 그렇게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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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방에 옷가지 좀 준비해놨어. 이따 갈 때 가져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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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사도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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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결혼하면 며느리 눈치 보여 챙겨주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미리 해두는 거야. 내 즐거움이니 뺏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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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러시다면.”

주원의 반응에 선우연 여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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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얘 좀 봐? 저번엔 절대 며느리 볼 일 없으니 걱정 놓으시라고 하더니 오늘은 얘기가 좀 다르네? 너 누구 생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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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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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이니 있든 말든 상관은 없다만 기왕 생긴 거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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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얘기할 때는 아니에요.”

주원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선우연 여사도 누구냐며 닦달하지 않았기에 주원은 마음 편히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주원의 방은 호텔 룸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처음 한국에 귀국했을 때는 본가에 들어와 살까 생각도 했었다. 부모님이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회사에서도 멀지 않고, 삼시세끼 밥도 잘 나오니 아무래도 편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독립을 선택한 건 이 층에서 보이는 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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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는 아직도 그대로네.’

이 층에서 내려다보면 맞은편 주택 앞에 우뚝 서 있는 상록수가 보였다. 주원이 고등학생일 때도 가로등보다 더 큰 나무였으니 못 해도 수십 년간 같은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주원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한 여자가 떠올랐다.

원혜림.

비가 오는 날엔 빨간 우산을 들고, 바람이 부는 날엔 까만 코트를 입고서 항상 저 자리에 서 있던 그녀가.

주원이 이별을 고한 후 스스로 목을 맨 그녀로 인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십 년 전.

빨간 우산만 봐도 소스라칠 정도로 피폐해졌던 그때보다야 조금 나아졌지만, 주원은 아직도 악몽에 시달렸다.

누구도 그의 탓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주원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던 날 제가 내뱉었던 말이, 그 목소리가, 분위기가,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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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달 사귄 걸로 이 정도로 집착하는 거 정신병이라고. 알아?

 
지긋지긋하고 싫었던 그 모진 감정들이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채 혜림을 할퀴었을 생각을 하니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주원은 침잠된 시선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늘 혜림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던 그의 눈에 까만색 옷자락이 비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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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원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커덕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들숨이 목구멍에 턱 걸린 채 나오질 않았다. 창문에 어른거리던 까만 옷자락이 천천히 움직이는 광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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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도련님?”

뻣뻣이 경직된 주원의 어깨에 누가 손을 얹은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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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길래 노크를 그렇게 해도 몰라요?”

후아.

주원은 가위에서 깬 사람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뒤를 돌아보니 가정부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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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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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랑 둘째 도련님 오셨어요. 식사 준비 끝나서 내려오시라고 하길래 노크했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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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려간다고 전해주세요.”

주원은 마른세수를 하며 대충 대답했다.

잠시 후 쉬이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달래고 일어났을 때 주원이 멈칫했다. 진즉 내려간 줄 알았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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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주원이 조금 불편한 내색을 하며 물었다. 가정부 도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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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조금 힘들어 보이셔서요. 뭐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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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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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사모님이 옷이랑 속옷 가져다 두라고 하셔서 정리해 두었어요. 혹시 입어보셨어요? 사이즈가 잘 맞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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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아서 입어 보겠습니다.”

엄마도 하지 않는 과한 간섭에 귀찮아진 주원이 짧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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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려오세요.”

축객령을 눈치챈 도 씨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내려갔다.

주원은 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국으로 간 직후 새로 들어온 아주머니라 별로 마주칠 일이 없어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인데, 보통 이상으로 친근하게 구는 그녀가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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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낯이 익은 듯도 한데.’

주원은 찜찜한 기분으로 그녀를 뒤따라 내려갔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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