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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나 다희 좋아해 (36/121)


#36. 나 다희 좋아해
2022.10.02.


주원의 아버지 강필연은 모 대학의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학자였다. 어릴 때부터 집안이 부유해 돈 걱정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발밑에 깔고 태어난 억세게 운 좋은 남자였다.

서른이 되었을 때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를 마다하고 자주 가던 책방 주인의 딸과 결혼을 했다.

한데 돈복이란 게 정말 있는 모양인지 그 여자의 투자 안목이라는 게 보통이 넘었다. 아내 선우연이 사들이는 그림과 도자기, 주식과 부동산이 족족 잭팟을 터트리며 그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부자들이 모인 삼성동 노른자위 땅에서도 강필연 이름 석 자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모임에서 종종 만나는 친우들처럼 굴리는 회사가 있는 게 아니니 골치 아플 일도 없고, 와이프 예쁘니 눈 돌릴 일 없고, 두 아들 훤칠하고 똑똑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취미는 와이프와 수다 떨기. 특기는 와이프 비위 맞추기.

자기 이름이 필연이라 ‘우연’인 와이프와 찰떡궁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성이 ‘선우’였다며 왠지 된통 당한 것 같다고 허허실실 얘기할 때도 누구 하나 비웃지 않았다. 그만큼 강필연은 존재 자체만으로 대단한 남자였다.


“허허, 형제 둘이 같이 일해보니 어떠냐? 할 만해?”

필연은 오랜만에 두 아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즐거웠다. 특히나 스무 살 되자마자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첫째가 장성해 돌아온 모습은 언제 봐도 흐뭇했다.


“방구석에서 퍼즐이나 하던 녀석이 회사에서 어떻게 일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하긴, 우리 승원이가 어릴 때부터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좋았지. 보기엔 맹해 보여도 막상 시켜놓으면 잘한다니까.”

필연이 껄껄 웃었다.


“아무래도 승원이는 날 닮고 주원이는 당신을 닮은 것 같아. 승원이가 나 닮아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잘했잖아요. 여섯 살에 구구단을 달달 외워서 주변 애들 기 좀 죽였었지. 안 그래요, 여보?”

“당사자 면전에서 그런 얘기하면 못 써요. 승원이가 밥을 못 먹잖아요.”

두 사람의 칭찬에 선우연 여사가 팔불출이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그려졌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수다는 이쯤하고 편하게 밥이나 먹자꾸나. 오늘 아주머니가 너희 온다고 특별히 솜씨를 발휘한 모양이야. 주원이 좋아하는 양갈비 구이랑 승원이 좋아하는 평양냉면도 있다.”

필연이 아들들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주원은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애정 가득한 이 집은 언제 들러도 좋았다. 필연이 말이 많았기에 억지로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애교 많은 동생이 있기에 특별히 살갑게 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특히나 필연과 승원은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이 붙어 있으면 식사 시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전공까지 같은 바람에 두 사람이 나눌 대화의 주제는 넘쳐났고, 그걸 듣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곤 했다.

한데 오늘은 승원이 영 이상하다.


“승원이는 왜 이렇게 못 먹냐?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

“아니에요. 요새 야근을 많이 해서 좀 피곤한가 봐요.”

“으이구, 요령껏 해. 요령껏. 형이 회사 대표인데 왜 그렇게 유도리가 없어?”

필연의 걱정에 승원이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앞으로 잘 조절해볼게요.”

주원은 깨작대는 승원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홀쭉해진 뺨이 신경이 쓰였다.

*

식사가 끝난 후 주원은 따로 승원을 불러냈다.

키 낮은 가로등이 돌계단을 따라 점점이 불을 밝힌 정원. 선우연 여사가 제일 좋아하는 하얀 테이블에 형제가 마주 앉았다.


“얼굴이 영 까칠하네. 그 일, 아직도 해결 안 됐어?”

그 일이라 함은 다희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승원은 송글송글 물기가 맺힌 맥주캔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뭐…… 대충 봉합하긴 했어.”

사실 승원은 모든 걸 툭 털어놓고 주원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명백히 의도적이었던 다희의 행동, 그녀와의 관계, 혜주에 대한 헷갈리는 마음 등.

소주 한 짝 앞에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누면 터질 것 같은 가슴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승원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희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다희는 이직하기 전까지 헤어졌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이직 후 자연스럽게 멀어진 걸로 해달라고, 그래야만 제 자존심이 지켜질 것 같다고.


“계속 만나기로 한 거야?”

그래서 승원은 진심을 얘기할 수 없었다. 물론 주원이 어디 가서 소문을 내진 않을 테지만 고지식한 승원에게 약속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응. 일단은 계속 사귀기로 했어.”

“아, 난 또.”

문득 주원의 표정에 안도가 스쳤다. 마지막 남은 고비를 깔끔히 넘어낸 사람처럼 후련해 보이는 얼굴에 승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랑 다희랑 헤어진 줄 알았어?”

“대충 그러지 않았을까 했어. 네가 오죽 살벌하게 회사를 박차고 나갔어야 말이지.”

“그 정도였나?”

“어. 난 또 뭔 삼각관계라도 있나 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도통 이해가 안 돼서.”

“삼각관계는 무슨.”

승원은 목구멍에 까슬까슬한 모래가 걸린 것 같았다.


“혹시…… 회사에 이상한 소문 돌았어? 혜주 관련된 얘기라든가.”

“원래 회사 대표가 소문에 제일 어두운 법이야.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다가도 나만 나타나면 우르르 사라져버리는 거 모르냐.”

“하긴.”

“그런데 갑자기 혜주 얘기하는 거 보니 넌 좀 들은 게 있는 모양이다?”

주원이 넌지시 물었다.


“그거, 그냥 소문인 거지?”

 

 
승원은 마치 버릇처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친하게 지내니까 별 소문이 다 도네.”

혜주를 알고 지내는 내내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조차 솔직하지 못하다. 부정하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이 먼저 나왔다.


“나 다희 좋아해. 회사에 이상한 소문 안 돌게 잘 사귈 테니 걱정 마.”

가슴과 머리가 다른 말을 하니 입으론 전혀 엉뚱한 결론이 튀어나온다.


“소문 같은 건 상관없어. 그냥…… 아니, 됐다.”

주원은 승원의 어깨를 툭 두드려주곤 일어났다.

멀어져가는 형의 등을 보며 승원은 금세 후회했다.


‘한번 물어보기나 할걸. 내가 혜주를 좋아해도 되는 건지.’

뒤늦게 알아버린 이 마음이 너무 이기적인 건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마음이라면 그냥 접어야 하는 건지.


‘모르는 게 없는 형이라면 답을 해줬을 텐데.’

그냥 솔직히 말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승원은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동동동동.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혜주는 회사 옥상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꺄, 어떡해!’

점심 먹으러 나오는 길에 멀리서 주원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투자자들과 함께 로비를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은 영화 주인공처럼 근사해서 밥 먹고 들어오던 직원들이 홍해처럼 쫙, 알아서 갈라졌다.

평소 캐주얼한 슈트 차림을 즐겨 입는 그는 오늘처럼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땐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로 무게감 있는 스타일링을 연출하곤 했다. 짙은 남색 슈트를 갖춰 입고 머리를 쓸어올려 이마를 드러낸 모습에 부티가 철철 넘쳐 없던 거리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가만히 있어도 몸이 배배 꼬이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게 당연지사.

갑자기 민트맛 쭈쭈바가 당긴 혜주는 업무 복귀 전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들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초옥.

잠깐 틈만 생기면 그날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아랫입술에 부드럽게 와닿았던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

민트 향이 은은하게 밴 그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 어떤 소리를 냈는지, 얼마나 달콤했는지 눈을 감아도 선연했다.

자다가도 떠오르고, 밥 먹다가도 떠오르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떠올랐다. 고백을 받은 건 자신인데 왜 짝사랑에 빠진 여고생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이럴 거면 그냥 확 받아줄 걸 그랬지.’

그의 고백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았던 건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을 짝사랑한 세월이 너무 길어 그 감정이 정답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잔잔하고, 편안하고, 챙겨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색깔로 따지자면 파스텔 핑크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주원의 색은 너무도 붉었다. 그를 떠올리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아귀에 땀이 흘렀다. 긴장되고, 겁이 났다.

그의 색채는 너무도 강해서 곁에 서면 나의 빛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덥석 목덜미를 물려 그의 세계에 끌려 들어갈 것처럼 두렵기도 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승원이를 좋아할 땐 이러지 않았는걸.’

수없이 고민하던 혜주는 제 심장에서 답을 얻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순간 아프도록 쿵쿵대던 심장의 소리. 더 이상 헷갈릴 수도 없게 낙인을 찍어버린 그 울림 덕에 더는 자신을 속일 수도 없었다.


‘오늘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봐?’

혜주는 자연스럽게 주원과 약속을 잡을 계획을 짜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바스락.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출입문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옥상 정원을 지나 조금만 꺾어 들어가면 물탱크가 있는데 그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혜주는 난간에 턱을 괸 채 고개만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루비 씨네?”

“악, 깜짝이야!”

입에 가글을 머금고 걸어 나오던 루비가 화들짝 놀라 켁켁댔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혜주는 더 당황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나쁜 짓 하다 걸린 사람처럼.”

“어…… 그게.”

그제야 혜주의 눈에 루비의 손에 들린 담뱃갑이 보였다. 얼른 주머니 안에 담배를 숨기는 그녀를 보며 혜주가 안심하란 듯 웃어 보였다.


“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사실 혜주는 담배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승원이 게임을 하며 주야장천 피워 대는 걸 봐서 그런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낯선 광경도 아니었고, 기호식품에 남녀를 가린다는 게 사실 더 웃기다고 생각했다.


“담배 피우는 게 뭐 어떻다고. 그게 숨길 일인가?”

그러나 루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다들 수군거리더라고요.”

“설마, 지금이 어느 땐데.”

“언니, 우리 회사 남직원 중에 누가 담배 피우는지도 모르죠? 남자가 담배 피우는 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니까. 그런데요. 여직원이 담배 피운다고 하잖아? 그럼 하루 만에 회사에 소문 쫙 깔려요. 이름 대신 ‘담배 피우는 여직원 걔’로 불리는 거 시간 문제라니까요.”

“경험담이에요?”

루비는 한 번 더 가글을 한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회사에서 인턴 할 때요. 한 번은 저 높으신 분이 불러서 꾸중하더라고요. 어디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냐고, 감. 히.”

“꼰대네요.”

“그 꼰대가 우리 팀장님 불러서 인턴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혼도 냈다니까요. 채용전환형 인턴이었는데 결국 날아갔죠, 뭐.”

담배 때문에 채용 기회가 날아갔다니, 이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인가.

쌍팔년도도 아니고 무려 2022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여직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혜주는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 마요. 루비 씨가 숨기고 싶다면 나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루비는 조금 감동 받은 표정이었다.


“점심시간 지나면 보통 옥상에 아무도 안 오거든요. 일부러 이 시간에 온 건데 누가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무튼 고맙네요. 언니 말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지 아찔해요.”

“뭘 어째요. 이참에 담밍아웃 하는 거지.”

“담밍아웃이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루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얼른 표정을 정돈한 그녀가 머뭇머뭇 입술을 열었다.


“언니, 나 사적인 질문 하나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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