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안녕 (37/121)


#37. 안녕
2022.10.06.



 
질문을 하는 루비의 표정이 비장했다.


“언니 요새 만나는 사람 있어요?”

의외의 질문에 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궁금해요?”

“아, 어 그게, 만나는 사람 없으면 소개팅 해주려고요! 내 남자친구 주변에 괜찮은 형들 많거든요. 내 남친이 연예인 지망생이잖아요. 그래서 주변 형들이 얼굴이 어우, 완전 조각이라니까요.”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괜찮아요.”

“아…… 남친 있어요?”

루비는 왠지 실망한 표정이었다. 혜주는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호의로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거절당해서 그런가?’

혜주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덧붙였다.


“남친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짝사랑?”

“그런 건 아니고 지금은 사정이 조금 있어서.”

“아…… 사정이요. 그럼 그 사정 해결되면 곧 사귀겠네요.”

“아마도?”

루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루비의 눈빛이 뭘 얘기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혜주는 회사 사람이냐 묻는 루비에게 애매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비밀이에요.”

“에이, 난 담밍아웃도 했는데 그 정도는 알려줘도 되잖아요! 우리 그 정도 사이 안 돼요?”

루비가 징징대며 졸랐지만 혜주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관계도 아니거니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어쨌든 회사 사람이니 괜한 소리를 떠들어댈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 오늘 치마 입었네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옥상을 내려가려는 순간, 문득 루비가 매의 눈을 번뜩였다.


“설마 오늘이…… 디데이?”

헉, 그러고 보니 너무 차려입긴 했네.

일 끝나고 주원을 만날 생각에 오랜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셋팅을 했다.

평소엔 신지도 않는 스틸레토 힐에 백화점에서 이십만 원이나 주고 산 펜슬 스커트도 입었다. 아주 중요한 미팅이 아니면 입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디데이는 무슨! 그만 내려가요.”

혜주는 루비의 등을 떠밀며 옥상을 내려갔다.

그러나 붉어진 귓불에 루비는 이미 답을 얻은 후였다.

*

루비의 오해는 꿈에도 모른 채 혜주는 ‘오늘의 작전’에 돌입했다.

제1단계, 주원을 불러내기.

제2단계, 적당히 술 먹이기.

제3단계, 옆구리 쿡 찔러서 고백 얘기를 먼저 꺼내게 만들기.

제4단계, 못 이기는 척 받아주기.


‘좋아, 완벽해!’

이 정도면 적당히 튕기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 같았다. 고백도 받았겠다, 마음에 확신도 생겼겠다, 더 이상 미룰 이유도 없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자리로 돌아온 혜주는 곧장 주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약속 있어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 분 일 초가 납덩이를 단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책상 밑으로 발을 달달 떨며 휴대폰을 힐끗거리는데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왔다!’

혜주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있어도 없어.]

꺄악! 혜주는 소리 없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약속이 있어도 네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오겠다는, 그 짧은 메시지에 담긴 진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뭐라고 답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혜주는 그의 직진에 과감히 응했다.


[그럼 6시 10분에 회사 앞에서 봐요.]

[응.]

드디어 결전이다!

혜주는 주먹을 꽉 쥔 채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강주원과 데이트를 한다는 자체로도 설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그와의 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떨렸다.

어쩌면 오혜주 인생에서 가장 설레는 날이 될 수도 있는 오늘.


‘잘하자.’

혜주는 오늘따라 더디게 가는 시계를 과감히 치워놓고 빛의 속도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곧 주원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들뜬 혜주는 일찌감치 오늘치 업무를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하고 입술을 다시 바르고, 남들이 보기엔 티도 안 날 자기정비를 했다.

드디어 6시 정각.

엉덩이를 들썩이던 혜주가 손목시계를 보고 씩씩하게 외쳤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혜주 씨 오늘 약속 있어?”

창가 자리에 앉은 욱 팀장이 몸을 일으켰다. 가정이 있어 보통은 6시 땡치면 퇴근하는 분이 웬일로 저런 질문을 하나 싶어 혜주는 불안해졌다.


“네, 있는데요.”

“중요한 약속?”

“네, 그런 편입니다만…….”

“가족 아픈 거 아니면 약속 취소해. 오늘 회식이야.”

“회식, 이요?”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우리 팀 앞으로 배정된 팀비 있잖아. 그거 이번 주 안에 털라고 공지가 내려왔어. 어차피 우리 팀 회식한 지 오래됐으니 겸사겸사 맛있는 거나 먹자고.”

“꼭 오늘이어야 해요? 당일 회식은 좀…….”

“내가 언제 회식 강요한 적 있어? 팀원 과반 이상이어야 팀비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욱 팀장이 가자미 눈을 뜨고 다그쳤다. 짠순이 기질이 다분한 욱 팀장은 꽁돈이라면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닦아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이니 이번 주 안에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져 버릴 팀비를 그냥 날려버리진 않을 거다.


‘아, 왜 하필 오늘이야…….’

혜주는 비어 있는 자리를 재빠르게 스캔했다. 사업부 직원이 총 일곱 명. 그중 세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다. 오늘 아침에 확인한 바로는 두 사람은 출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연차를 냈다. 즉, 혜주가 반드시 참석해야만 팀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왜, 영 안 되겠어?”

지금 이 순간 두 가지 생각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눈 딱 감고 회식을 쌩깔 것인가, 고분고분 따라갈 것인가.


“나머지 분들은 다 시간 되시는 거예요?”

혜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새 자리를 정리한 명환과 루비가 잇따라 대답했다.


“난 오늘 아니면 안 돼. 내일부터 프로젝트 시작이라.”

“저도 오늘이 좋아요.”

아……

수십만 원에 달하는 팀비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니.

혜주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럼 저도 약속 시간을 조정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넷이서 육십만 원 털어 쓰려면 투뿔 정도는 가야겠지?”

“오오, 한우는 언제나 옳습니다! 룸 있는지 바로 전화해볼게요!”

명환이 신이 나서 휴대폰을 들었다.

혜주는 축 늘어진 어깨로 대표실을 힐끔 바라보았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내 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갈 수가 없다…… 젠장.


[오늘 약속 취소해야겠어요. 급 회식이요.]

혜주는 얼른 메시지를 보내곤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기대했던 약속이 깨져 몹시 시무룩한 혜주를 보며 루비는 조금 자책했다.


‘되게 실망한 표정이네. 진짜 오늘이 디데이였나?’

팀비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던 욱 팀장의 옆구리를 쿡 찔러 회식을 잡은 루비는 조금 착잡한 기분이었다. 혜주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저질렀는데,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을 보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옳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좋아하는 언니가 바람녀가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지, 암!’

혜주가 승원과 다희 사이에 끼어 분탕질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루비는 하루속히 혜주가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랐다.

약속 취소 메시지를 받고 허탈해하는 사람이 강승원이 아닌 강주원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

뻔한 회식이었다.

거래처가 어떻다, 실적이 어떻다, 직원 누가 이번에 집을 샀다더라 등등 회식 자리에서 흔히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나왔다.

그 중엔 승원과 다희의 얘기도 있었다. 두 사람과 친한 혜주가 있어 말을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사내연애는 회식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소재가 아닌가!

개발팀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요새 승원이 무척 저기압이더라,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니 헤어진 건 아니라더라 등등 저마다 아는 얘기를 쏟아내니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두 사람 얘기였다.


“자기는 뭐 아는 거 없어? 두 사람이랑 제일 친하잖아.”

명환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요새 다들 바빠서 금요 회동을 못 했네요. 다음에 만나면 한번 캐보겠습니다, 하하!”

혜주는 넉살 좋게 웃으며 유연하게 질문을 빠져나갔다. 남 얘기 좋아하는 명환은 아쉬워했고 욱 팀장도 은근히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루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금붕어처럼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1차에서만 투뿔 등심 12인분을 해치운 네 사람은 곧장 근처의 와인바로 이동했다. 원래 혜주는 1차만 하고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이미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라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주원을 못 만나 아쉽긴 하지만 당장 어디 떠나는 것도 아니니, 기회야 또 만들면 그만이지.


‘어차피 약속도 취소됐는데 그냥 맘 편히 놀자!’

미련을 과감히 접으니 회식 자리가 좀 더 재밌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흥이 돋고, 내친김에 노래방도 가고.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열한 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1차에서 3차까지, 팀비를 완전히 닦아 쓴 후에야 회식이 끝났다.

혜주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

혜주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털레털레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 우뚝 선 빌딩들은 아직도 밤을 밝히며 반짝거렸지만 낮에 빌딩을 가득 채웠던 직장인들은 모두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없었다.

한없이 정적인 거리,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오른 열을 식혀주는 느낌이 좋아 혜주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걸었다.


‘오늘 진짜 큰맘 먹고 먼저 데이트 신청한 거였는데 내일도 용기가 날지 모르겠네.’

홀로 밤거리를 걷다 보니 주원이 떠올랐다. 아까 메시지를 보내놓고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한 게 생각난 혜주가 얼른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뭐라고 답이 와있으려나.


“어……?”

메시지를 확인한 혜주의 동공이 확장됐다.


[기다릴게.]

다섯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기다린다고? 왜 기다려? 몇 시에 끝날 줄 알고 기다려?

혜주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른 전화부터 걸었다. 두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주원이 전화를 받았다.


“이제 끝났어?”

그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네, 방금 끝났어요. 메시지 너무 늦게 확인해서 죄송합니다아.”

적당히 기다리다 집에 갔겠거니 생각한 혜주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정도로 되겠어?”

“하늘 같은 대표님과의 약속을 파투낸 걸로도 모자라 여섯 시간이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

“사과는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허리는 90도로. 몰라?”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어?”

내가 허공에 대고 인사한 거 어떻게 알았지.

삐비빅, 삐비빅.

그의 목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횡단 보도 신호음이 바로 옆에서 울렸다. 혜주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예요?”

“네 앞.”

멀지 않은 곳에 주원이 있었다.

정차한 차에 비스듬히 기댄 그가 한 손을 들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안녕.”

그가 있는 그곳, 그 시간이 반짝이는 파편이 되어 눈에 머물렀다.

마치 시간의 조각처럼.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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