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어디서 못 배운 짓을 (38/121)


#38. 어디서 못 배운 짓을
2022.10.09.



 
톡. 토옥.

주원과 마주 보고 선 혜주가 구두 앞코를 톡톡 찍으며 몸을 꼬았다.


“안녕하세요…… 오빠.”

“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잘생긴 강주원이 평소보다 열 배는 더 잘생겨 보인다. 이렇게 밤에 보니 더 떨리는 것 같고.


“나한테 고기 냄새 많이 나죠.”

“한우에 와인까지 푸지게 먹었더만.”

혜주는 옷깃을 킁킁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팀비 넉넉히 넣어주신 덕분에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계속 저 따라다닌 거예요?”

“언제 마칠지 모르니까.”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은 없었다. 메시지를 제때 확인하지 못한 건 미안한데 실은 너무나 반가워서 혜주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럴 거면 차라리 들어오지 그랬어요. 대표님이 참여 못 할 회식이 어디 있다고.”

“회식에서 환영받는 대표 봤냐. 대표는 카드만 쥐여주고 퇴장하는 게 국룰이야.”

“잘 배우셨네요.”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나도.”

씨익.

가볍게 웃었을 뿐인데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사방에 가로등이 켜진 듯 눈앞이 환해졌다.

눈이 부셔서 어지러워 본 적이 있나요. 예, 제가 그렇습니다.

주책맞게도 혜주는 실제로 살짝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물론 그 작은 몸짓은 주원에 의해 술주정 취급을 받았지만.


“취했네. 이거 누가 이렇게 먹였어?”

쯧쯧, 혀를 찬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무심히 내민 손길에 혜주의 심장이 쿵 진동했다. 긴 손가락과 툭 불거진 힘줄이 기가 막히게 조화로운 손이었다. 달빛에 보니 상아로 만든 예술작품처럼 서늘하면서도 톡 건드리면 보드라울 것 같았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용기는 저 오빠가 내네. 사귀는 것도 아닌데 손부터 막 잡고 이래도 돼?’

맨정신이면 한 번쯤 망설였을 텐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용기가 마구 샘솟았다.


‘오빠가 정 그렇다면 뭐.’

혜주는 못 이긴 척 그의 손바닥에 손을 올렸다.

주원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가방 달란 뜻이었는데.”

“……아.”

혜주는 움찔했다. 뺨이 홧홧해진 그녀가 얼른 손을 빼내려 할 때 주원이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그런데 손이 오니까 더 좋네.”

도망가지 말라는 듯, 단단히.

그러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그의 체온에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손 하나 잡았을 뿐인데 이렇게 설렐 일이야?’

어느새 민망함은 사라지고 두근두근 심장이 박동했다.

서로의 일부가 된 것처럼 함께 걷는 걸음.

살짝살짝 스치는 어깨.

나란히 움직이는 그림자.

이 길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 걸음마다 그런 바람을 싣고서 혜주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는지 주원은 혜주가 완전히 차에 오른 후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벨트 매.”

“네.”

천천히 차가 출발했다.

그의 차에서는 늘 주원에게서 나는 향기가 났다. 살짝 묵직하면서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향기. 향수 냄새인지 섬유유연제 냄새인지 모르겠지만 흔히 맡을 수 있는 향기는 아니었다.

살짝 스쳐 지나갈 때마다 좋은 냄새가 난다며 여직원들이 소곤대는 걸 들었던 적이 있는 혜주는 제 옷에서 나는 고기 냄새가 영 신경 쓰였다.


“오빠는 무슨 향수 써요?”

혜주가 묻자 주원이 운전을 하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때 되면 보내주셔서.”

“아, 그렇구나.”

저번에 옷도 어머니가 보내주신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마마보…….


“마마보이는 아니고.”

“아, 넵.”

귀신이네, 귀신이야. 혜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나나 승원이나 옷이나 쇼핑엔 관심이 없어서 그래. 미국 유학 시절엔 공부하느라 바빠 더더욱 그랬고. 그에 반해 어머니는 쇼핑을 좋아하시지. 서로 윈윈인 셈이야. 아들만 둘이라 망정이지, 딸이었으면 아예 인형 놀이를 하셨을걸?”

“오빠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승원이랑 오래 알고 지냈지만 엄마 얘기를 거의 안 하더라고요.”

“그랬을 거야. 뭐랄까.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 분이라.”

혜주는 덜컥 불안해졌다. 엄청 깐깐하고 예민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가 사모님들은 꼭 안하무인이던데.

그러곤 실소했다.


‘아니, 내가 왜 강주원 어머니 걱정을 하냐고. 오혜주 진짜…….’

어째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을 드링킹하고 있냔 말이다!

이게 다 술 때문이다. 알코올을 마시면 혈류가 빨라진다는데 그래서 뇌세포도 활발해진 게 분명해. 그러니 이렇게 앞서 나가는 거지!

계속 말을 섞다가 말실수를 할까 싶어 혜주는 입을 꾹 다물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주원이 라디오를 틀었다.

밤에 딱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여자 DJ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꿀을 바른 듯한 음성으로 나긋나긋 사연을 읽어주니 진짜로 잠이 솔솔 왔다. 혜주는 실눈을 뜨고 운전 중인 주원을 바라보았다.


‘아, 좋다.’

오늘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같이 있으니 좋았다.

정작 고백의 ‘고’자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오빠랑 같이 있는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 키스할까? 너도 내 맘과 같다면 한번 시작해 볼까~”

차가 혜주의 동네 어귀에 진입했을 무렵,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혜주는 가물가물한 눈을 번쩍 떴다.


“어? 그 노래네?”

신월도에서 함께 보냈던 밤.

비가 오는 날 파도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알전구가 예쁘게 반짝이던 캠핑카, 무릎에 덮인 담요에서 나던 포근한 냄새, 그리고…….


-키스할까?

 
나직했던 그의 목소리.

결국 혜주의 삽질로 끝난 사건이지만 그때 그 순간 느꼈던 설렘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혜주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음음 음음음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긴 했던 모양인지 두 번째 듣는 노래인데도 후렴구를 얼추 따라부를 수 있었다.

그사이 차가 혜주의 원룸 앞에 멈췄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안전 벨트를 풀며 씩씩하게 말한 순간 음악이 끝났다. 라디오에선 1부 마지막을 알리는 DJ의 목소리가 흘렀다.


[비가 오는 날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노래죠? 방금 들으신 곡은 아이쥬의 봄날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2부에서 찾아뵐게요.]

 
……어?

혜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번에 분명히 ‘키스할까?’라고 그랬는데?


“오빠, 이 노래 제목이…….”

더듬거리며 묻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묘한 떨림을 지닌 눈동자가 불빛에 일렁인다. 사람의 진심이 눈에 담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혜주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날도 그는 이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었다는 걸.


‘진심이었구나, 오빠는.’

대놓고 말해줘도 알아먹지 못하는 진심을 그는 몇 번이나 표현했었다. 그래, 몇 번이나.


-……미친!

 
입을 틀어막으며 욕을 해버린 내게 그저 노래 제목이라 둘러대면서 오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원은 잠시 핸들을 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벌리던 그가 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오해야?”

아주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이었다.

아직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승원이냐고.

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난데, 그것 역시 오해냐고.


“오빠…….”

혜주는 떨리는 눈으로 주원을 마주 보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을 열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제 가슴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는 것.

혜주는 대답 대신 두 손으로 주원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수줍게 입을 맞추었다.

초옥.


“!”

주원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은 순간 세상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순간엔 그 세상이 반쯤 도려져 나간 듯했다. 지금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목이 탔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디서 못 배운 짓을.”

터억. 주원이 도망치는 혜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뭐가요!”

혜주는 불타는 고구마처럼 벌게진 얼굴을 푹 숙였다. 주원은 두 손으로 혜주의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이런 건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비틀었다. 코끝이 살짝 뺨을 누르고 부드러운 입술이 와닿았다. 턱을 쥔 그의 엄지에 힘이 실리자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말캉한 것이 밀려든 순간, 혜주는 숨을 멈추었다.


‘아…….’

허벅지에 힘이 꽉 들어가고 발끝이 찌릿찌릿했다. 머리는 멍하고 호흡은 가빴다.

거침없이 짓쳐 드는 그의 숨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짝 밀착한 입술 사이로 그가 전해오는 진심은 뜨겁고 강렬했다. 온몸이 타버릴 만큼.


“좋아해, 오혜주.”

주원의 입술이 꾹 감은 혜주의 눈꺼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곤 다시 콧날을 따라 내려갔다.

주원은 부드럽게 혜주의 손을 쥐며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번 헤집었다.

잘 봐. 이게 어른의 키스다. 가르치듯이.


 

*



“어떡해, 어떡해……!”

집으로 돌아온 혜주는 이불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두방정을 떨었다. 조금 전 주원과 나눈 키스의 여운이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었다.


“나 강주원이랑 키스한 거야? 진짜? 그럼 오늘부터 1일인 거야?”

와…… 못 이기는 척 고백을 받아주려고 작심했지만 오늘 당장 키스부터 할 줄은 몰랐다. 키스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달콤한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키스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되게 부드러웠어. 끈적하지도 않고.’

머릿속을 점령한 그 감촉에 아랫배까지 간질거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야밤에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그저 이불을 끌어안은 채 발만 동동거리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럴 때 다희와 사이가 틀어진 건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전화를 걸어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을 텐데.

혜주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딩동! 딩동!

그때 현관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혹시 오빤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헤어진 주원이 다시 찾아온 거라 생각한 혜주는 얼른 머리를 매만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달칵.

그러나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건 주원이 아니었다.


“강승원? 네가 이 시간에 왜…….”

“혜주야.”

승원의 얼굴이 붉었다.

당황한 혜주는 일단 밖으로 나가려고 슬리퍼를 꿰었으나 승원은 오히려 문을 닫고 들어왔다. 디리릭,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 하나만 물어보러 왔어.”

승원의 그림자가 혜주의 정수리 위로 내리깔렸다.

쿵쿵,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덜컥 불안해진 혜주의 귓가로 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아니라……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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