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승원에게, 혜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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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승원에게, 혜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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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승원에게, 혜주가
2022.10.13.
몇 시간 전.
출장이 끝난 승원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싱가포르의 한 회사와 공동 개발 중인 앱에 문제가 생겨 급히 잡힌 미팅이었다.
“으, 피곤해.”
승원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다리를 뻗고 누웠다. 온종일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씻을 엄두도 나지 않아서 기절하듯 잠들었던 승원이 깨어난 건 두어 시간 후였다. 옷도 불편하고 갈증도 났다. 그는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물컵을 찾았다.
“내 곰돌이 물컵 어디 있지?”
그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휘적휘적 거실을 가로질렀다. 곰돌이 컵은 싱크대 안에 있었다.
“여기 있네.”
승원은 대충 흐르는 물에 컵을 씻어 생수를 따랐다. 벌컥벌컥 찬물을 마시니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졌다.
다시 잘까, 저녁을 먹을까 고민하며 그가 다시 한 모금 물을 들이켰다.
핑크 리본을 한 곰돌이가 그려진 물컵.
덜렁대다 자꾸 컵을 깨는 그를 위해 혜주가 사준 선물이었다.
“…….”
물끄러미 곰돌이를 바라보던 승원은 새삼스레 제집에 혜주의 흔적이 많은 걸 느꼈다.
땀이 많은 그를 위해 이사 선물로 사준 차렵이불, 협탁에 안경을 두다 자주 깨 먹는 그를 위해 사준 안경 거치대, 심지어 다희와의 데이트 스케줄을 빽빽이 적어놨던 탁상 달력도 혜주가 사준 것이었다.
“……한심하다, 강승원.”
이렇게나 혜주의 흔적이 가득한데, 그동안 제 마음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혜주를 친구 이상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가 생각하는 친구 이상의 관계는 가족밖에 없었기에, 그저 편하게만 생각했다.
‘혜주가 내게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알았더라면 다희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혜주와 주원이 어떤 사이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전혀 티를 내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혜주에게 다른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자체를 해 보지 않은 까닭이었다.
고등학생 때 혜주가 주원에게 빼빼로를 주었다는 것도, 주원의 귀국 직후 고백송이 울려 퍼진 것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야 뭐 강주원 좋아하는 여자애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혜주도 분위기에 휩쓸려 풋사랑이라도 했나 싶었고, 고백송은…….
그래, 그때 잠깐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주원이 경찰에 신고까지 해가며 요란을 떨었으니 적당히 정리됐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그땐 다희와 한창 사귀고 있었던 때라 혜주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승원의 기억 속에서 혜주는 늘 솔로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 몇 놈이 혜주에게 관심을 갖긴 했으나 실제 고백까지 이어지진 않았고 그땐 한창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었다.
대학을 다른 곳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4, 5년 떨어져 있다가 회사에서 재회했을 때도 혜주는 혼자였다. 대학교 다닐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곤 하는데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니 패스.
회사 들어오고 누군가를 사귄 적이 없으니 그의 기준에서 혜주는 늘 솔로인 게 맞았다.
그래서였을까. 한없이 느긋해진 건.
늘 곁에 있는 혜주가 좋았고,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그녀가 고마웠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떨어져 있으면 궁금했다. 곁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그녀가 제게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음이 늑장을 부린 까닭에 이제야 깨달은 진심 앞에서 승원은 한참이나 방황했다. 섣부른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희와의 관계에서 처절히 배웠기에 실수를 거듭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후 내린 결론은 자신이 생각보다 혜주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혜주의 흔적 속에서 섣부른 기대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혹시 혜주도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 그랬다면 왈가닥 오혜주가 그동안 이렇게 티를 안 냈을 리가 없다.
다희와 사귄다고 했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해준 그녀였고, 또…… 또…….
‘잠깐, 그건 진심이 맞았었나?’
문득 다희와 사귄다고 말했을 때 혜주의 표정이 떠오른다. 웃는 입술에 비해 가늘게 떨리던 눈동자, 점점 뜸해지던 연락, 알게 모르게 피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
‘혹시……?’
승원은 정신없이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이사를 한 후 풀지도 않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이삿짐이었다.
“분명 그때 쪽지 같은 걸 본 것 같은데…….”
주원의 귀국일. 방안에 우렁차게 고백송이 울려 퍼지던 날.
방 어딘가에 반듯하게 두 번 접혀 떨어져 있던 쪽지가 있었다. 그날은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던 데다가 집구석이 워낙 돼지우리라 다시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사를 할 때도 박스 몇 개에 우르르 짐을 쏟아붓다시피 해서 쪽지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쪽지가 번뜩 떠오른 건 운명일까.
“찾았다!”
잔뜩 구겨진 옷가지 사이에서 쪽지를 발견했을 때, 승원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잔뜩 긴장한 손가락이 꼬깃꼬깃한 종이를 폈다.
쪽지에 적힌 글자를 보는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승원에게, 혜주가.]
단 일곱 글자였지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 쪽지는 고백송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왜 이걸 이제야 본 거야!”
승원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가 슬리퍼를 꿰고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오혜주, 너를 보기 위해서.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네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
밤늦게 찾아온 승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승원이 잔뜩 고무된 모습에 혜주는 얼떨떨했다.
“강승원? 네가 이 시간에 왜…….”
“혜주야.”
승원이 한발 다가섰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슬리퍼를 꿰었던 혜주는 좁은 신발장에 어정쩡하게 서 있게 되었다.
“나 하나만 물어보러 왔어.”
승원의 그림자가 혜주의 정수리 위로 내리깔렸다.
“형이 아니라…… 나였어?”
떨리는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혜주는 놀란 얼굴로 승원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밤을 새운 듯 눈 밑이 어둑한 그였지만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꼭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무슨 소리냐고 발뺌을 할까.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을 할까. 짧은 순간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혜주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승원의 눈을 본 순간 이미 회피하기엔 늦어버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 너였어.”
혜주는 승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날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었고, 본의 아니게 실패했어. 내가 좋아했던 사람 너 맞아.”
“아…….”
승원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발밑에 오아시스를 두고 목구멍이 찢어질 때까지 헤맨 사람처럼 허탈했다. 결국 찾아낸 오아시스 앞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기만 했다.
“난 정말 몰랐어.”
승원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혜주가 고백하려 했던 사람이 자신이란 걸 알게 되자 오만가지 감정이 밀려들었다.
안도가 되면서도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행복하고, 그러면서도 행복함을 느끼는 자신이 미웠다.
‘다희와 사귀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네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승원은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미안해, 혜주야. 난 그것도 모르고…….”
“사과 안 해도 돼. 이제 상관없으니까.”
“상관없다고?”
다갈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미 지난 일이잖아.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네가 다희와 사귀는 걸 알게 된 후 마음을 정리했어.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아, 이게 아닌데.
승원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한술 더 떠서 혜주는 승원을 타박하기까지 했다.
“뭐, 생각해 보면 그때 너한테 고백 안 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싶어. 잘못했으면 너랑 다희 사이에 딱 끼어서 샌드위치 될 뻔했잖아.”
“…….”
“야, 그리고 넌 쪽지를 봤으면 그냥 모른 척할 것이지, 뭘 또 뽈뽈거리고 뛰어오고 그러냐? 괜히 쪽팔리잖아.”
“…….”
“아무튼 다희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알겠지?”
예상치 못한 혜주의 태도에 승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까지 뛰어오며 그가 준비한 말은 단 하나였다.
‘나 혼자 널 좋아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혜주야.’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이 변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쪽지도 그렇게 칼 각으로 접더니, 마음도 그런 건가.
넌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그날 고백하지 않은 게 신의 한 수였다고 얘기하는 여자 앞에서 무슨 얘길 해야 하는지 승원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 완전히 접은 거야?”
“응.”
“혹시 나랑 다희의 관계 때문에 그런 거라면…….”
“물론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정말 아니야.”
혜주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 오혜주는 눈을 많이 깜빡거리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승원이 진짜로 궁금한 건 혜주가 ‘언제’ 마음을 접었느냐가 아니었다. ‘왜’ 마음을 접었느냐지.
“새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저도 모르게 툭 나와버린 한마디.
그 말을 하면서 승원이 기대한 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혜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부쉈다.
“오, 못 본 새 눈치 빨라졌다? 맞아.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생글생글 웃는 혜주의 미소가 승원의 앞에 거대한 벽을 세웠다. 그녀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버렸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랬구나…… 몰랐네.”
“모를 수도 있지. 요새 우리 소원했잖아. 뭔가 말할 만큼 진척이 된 것도 최근 일이고.”
“진척?”
그 단어가 무참히 가슴을 할퀸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넌 그 남자와 단계를 밟아나갔구나.
내가 무심히 흘려보낸 시간 속에서, 넌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어.
“아, 단어 선택이 좀 그런가? 아무튼 썸을 좀 오래 타서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어.”
“지금 네가 이 얘길 한다는 건 뭔가 결론이 났다는 뜻이야?”
“그런 거 같아.”
“언제?”
“아마도…… 오늘?”
혜주의 양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승원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온 건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혜주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내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기랄.’
물론 혜주의 잘못이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알고 지낸 남사친이, 그것도 자신의 베프와 사귀는 중인 남사친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란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그러니까 혜주 입장에선 제 마음만 정리하면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내 마음은 이제 시작인데.
난 이제야 네가 욕심나기 시작했는데.
“그래, 뭐 일단 축하한다. 궁금한 거 풀렸으니까 갈게.”
승원은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네며 돌아섰다.
“그게 궁금해서 야밤에 우리 집까지 달려온 거야? 전화로 하지 그랬어.”
“지나가는 길이었어. 내일 봐.”
“그래, 잘 가.”
와락. 주머니에 넣어둔 쪽지가 구겨졌다.
화가 났다. 이렇게 늦어버린 자신에게……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서 버린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