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네가 보기엔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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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네가 보기엔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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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네가 보기엔 어떤데
2022.10.16.
혜주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평소보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30분 넘게 옷을 골랐다. 남들이 보기엔 티도 안 날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정성스레 단장하는 혜주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어제 주원과 입맞춤을 나눈 후 그녀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나고 자꾸만 손발이 간질간질했다.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서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베개를 끌어안고 굴러다니기도 했다.
회사에 도착한 후로 증세는 더 심해졌다. 일 분에 한 번씩 대표실을 힐끗거리다가 사내 메신저 창을 괜히 열었다 닫았다 했다.
멀리서 주원의 목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이 혜주는 영 낯설었다.
‘회사가 이렇게 설렐 일이야?’
분명 승원을 짝사랑할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뭐 챙겨줄 게 없나 자주 들여다보긴 했지만 이토록 심장이 쫄깃하진 않았다. 친구로 지낸 시간이 길어서 서로가 편해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무늘보 같은 승원의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대체로 예상이 되다 보니 긴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주원은 활화산이었다. 언제 뜨거운 용암이 덮쳐 올지 몰라 항상 살피게 되는.
예측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막 키스도 하고 그랬겠지…….’
주원과의 키스를 떠올린 혜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홀한 입맞춤이었다. 온 세상의 소리가 차단되고 오직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만 들렸던 그때를 떠올리니 심장이 욱씬할 정도로 뛰었다.
꿈을 꾸듯 그때를 회상하던 혜주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우리 사귀는 거 맞겠지?’
키스를 하긴 했지만 오늘부터 1일! 이라고 확실하게 말한 게 아니다 보니 조금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귀는 사이 아니라도 키스도 할 수 있고 원나잇도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키스했으면 1일이지, 암.’
혜주는 섣불리 내뱉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
퇴근 시간이 되었다. 혜주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며 대표실을 흘끔거렸다.
‘오빠는 퇴근 안 하나? 같이 밥이라도 먹고 싶은데…… 먼저 연락해볼까? 아니야, 초장부터 너무 매달리는 느낌이잖아.’
심각한 갈등에 빠져버린 그때,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 석 자를 보고 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스!”
“누구길래 그렇게 좋아해요?”
옆자리의 루비가 목을 길게 빼서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아빠예요, 아빠.”
혜주는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전화 받을 데가 없나 두리번거리던 혜주의 눈에 비상계단이 보였다. 혜주는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보세…… 어?”
비상계단엔 그녀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었다. 올라가는 계단 쪽에서 한쪽 다리를 길게 펴고 앉은 주원이었다.
“왔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싱긋 미소를 짓는 그가 우두두두 가슴을 폭격했다. 혜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왜 여기 있어요?”
“네가 이쪽으로 올 줄 알고.”
주원이 몸을 일으켰다.
“일 끝났지? 같이 저녁 먹자.”
혜주가 온종일 했던 고민을 그는 너무도 손쉽게 풀어버린다. 괜히 밀당 한답시고 전전긍긍했던 게 허무했다.
“오늘 우리 뭐 먹어요?”
“사귄 지 이틀째니까 이탈리안 요리 먹자.”
또 다른 고민 역시 너무도 쉽게 풀렸다. ‘오늘부터 1일’이란 낯뜨거운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유연하게,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쾅 도장을 찍어버리는 그의 스킬에 혜주는 감탄했다.
이 오빤 다 계획이 있구나.
“푸흡, 삼 일째는 삼겹살 먹나요? 그럼 사 일째는요?”
“사천짜장.”
“오 일째는?”
“오리 백숙.”
“육일은요?”
“육개장 백반.”
“칠일은?”
“칠리새우.”
쑥스러워서 아무 말이나 던져본 건데 넙죽넙죽 잘도 받는다. 혜주는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팔일은 팔보채, 구일은 구절판이겠네. 다 먹다간 배 터지겠어요. 매일 만날 수 없는 게 다행이지.”
“왜 그렇게 생각해?”
주원은 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씨불이냐는 듯 혜주를 쳐다보았다.
“매일 만날 건데.”
“……안 바쁘세요?”
“일이야 하면 되고, 잠이야 줄이면 되고. 아무리 바빠도 오혜주랑 밥 먹을 시간은 있어.”
가슴에 몽글몽글한 방울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뭐,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스케줄 조정해볼게요.”
“좋은 자세야.”
주원이 기특하다는 듯 혜주의 정수리를 쓱쓱 문질렀다.
주원이 미리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예약해둔 덕에 두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라자냐와 밀라네즈, 와인 등을 먹으며 혜주는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참, 어젯밤에 승원이가 찾아왔었어요.”
이 말을 할까 말까 혜주는 조금 고민했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야밤에 불쑥 남자가 찾아왔다는 얘길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게다가 주원은 혜주가 승원을 짝사랑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묻어둘까 하다가 그와는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말하기로 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나서 찾아온 거야?”
“네. 오빠 가자마자 십 분도 안 돼서 찾아왔더라고요. 당연히 오빠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승원이여서 깜짝 놀랐어요.”
“그 자식 술 먹었나?”
“술 냄새는 안 나던데요?”
혜주가 라자냐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어요.”
“뭐가?”
“내가 예전에 자길 좋아했었던 걸 알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알았지?”
주원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승원이 표정은 어땠는데.”
“좀 많이 당황한 것 같더라고요.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랜 여사친이 속으로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나? 하긴, 맨날 쌩얼로 방구석에서 뒹굴거리고 뱃가죽 벅벅 긁던 애가 고백이라니, 좀 웃기긴 하죠.”
혜주는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말했지만 주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걸 확인하려고 자정이 다 된 야밤에 뛰어왔다, 라.
일단 집에 들어가면 불이 나지 않는 한 꿈쩍도 안 하는 놈이 연락도 없이 뛰어온 게 이상했다.
불현듯 꼬칫집에서 혜주를 껴안고 바닥을 뒹굴던 승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위태로워 보이던 그의 눈빛도.
“다른 얘긴 없었고?”
“네, 뭐.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하니까 축하한다고 하던데요?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던데.”
혜주가 빵빵한 볼을 우물거렸다.
주원은 문득 불안해졌다.
*
혜주를 데려다준 후 막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주차를 마치고 나온 주원의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우뚝 섰다.
“형, 나 술 한잔 사줄 수 있어?”
주차장 돌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승원이었다. 한참을 기다렸는지 몹시 초췌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마침 물어볼 얘기가 있었던 주원은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툭 두드리며 앞장섰다.
“그래, 한잔하자.”
오피스텔 주변은 밤이라 문 연 곳이 별로 없었다. 자주 가던 꼬칫집도 정기 휴무일이었고, 눈에 보이는 곳은 죄다 포장, 배달 전문점이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씩 사서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혜주 찾아갔었어?”
먼저 말을 꺼낸 건 주원이었다. 혹시나 하는 제 예상이 틀리기 바라며 혜주 얘기를 꺼낸 주원은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움찔 어깨를 떠는 승원을 보며 낙담했다.
“들었어? 생각보다 둘이 친한가 보네.”
치익, 승원이 캔을 따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 다희랑 헤어졌어, 형.”
“……언제?”
“사무실에서 사진 발견됐을 때. 사실 그때 헤어졌어.”
“저번엔 잘 사귀고 있다고 했었잖아.”
“다희가 당분간 그렇게 해달라고 해서. 사귀는 거 들키자마자 헤어졌다고 하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내가 생각해도 그날 너무 애처럼 굴긴 했어. 사진 발견되자마자 미친놈처럼 뛰쳐나가 버렸으니.”
승원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가버리고 다희가 해명한답시고 우리 사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버린 모양이더라고. 차라리 깔끔하게 이미 헤어진 사이라고 얘기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대처를 잘못했던 거 같아.”
“왜 헤어졌는데.”
“좋지가 않아서.”
승원이 금방 뱉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 처음부터 좋아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나직한 그 고백은 주원을 몹시 초조하게 만들었다. 맥주를 원샷해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주원은 갈라진 목소리로 냉소를 지었다.
“꽤나 무책임한 소리로 들리네.”
“변명할 것도 없이 내 실수야. 하아…… 미치겠다, 나도.”
승원이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 아무래도 혜주가 날 좋아했었던 것 같아.”
주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슨 근거로.”
“이삿짐 속에서 쪽지를 발견했어. ‘승원에게, 혜주가.’ 이렇게 쓰인 쪽지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형 귀국한 날 흘린 것 같더라고. 그래서 물어보려고 혜주를 찾아갔었어.”
“널 좋아했던 게 맞냐고?”
“아니. 너도 나를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핏기없는 눈매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 혜주 좋아해, 형.”
“…….”
“같이 있으면 편하고 재미있고 뭘 먹어도 맛있었어. 난 그게 혜주 때문인 줄 몰랐는데…… 같은 자리에 오혜주 하나 빠졌을 뿐인데 모든 게 지루하더라.”
승원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놓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어. 혜주는 이미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대. 아오, 대체 언제 만난 거야?”
주원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순식간에 방해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척 대충 위로나 해주면 간단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혜주와 잠깐 사귀다 말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고백을 했을 땐 미래를 함께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 두 사람이 그려갈 미래를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상처가 되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어.”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진짜? 형 그놈에 대해 뭐 아는 거 있어? 뭐 하는 놈이야?”
“회사 다녀.”
“혹시 우리 회사? 아, 아니다. 우리 회사 사람이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승원은 캔을 우그러뜨리며 인상을 썼다.
“진짜 어떤 놈인지 면상이라도 보고 싶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오혜주 눈 되게 낮거든. 대학교 때 사귄 애들 사진 봤는데 죄다 멸치에 안경잽이였어. MT 가면 저 구석 자리에서 혼자 술 먹다가 웅크리고 잠들 것 같은 인상 있잖아. 보나 마나 이번에도 그런 놈일 텐데 별 되도 않는 놈한테 밀린 거면 억울해서 어쩌지?”
“멸치에 안경잽이는 아니던데?”
“형이 봤어? 잘생겼어? 어느 정도로?”
주원은 얼굴을 돌려 승원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떤데.”